노예도덕과 암호화폐
노예도덕과 암호화폐
지난 26일 일본 코인체크란 암호화폐 거래소가 해킹 피해를 입었다.
일각에서는 이게 자작극이라 주장을 하기도 하나,
그 깊은 내막을 나는 알 위치에 있지 않다.
不正に送金された仮想通貨NEMの保有者に対する補償方針について
2018.1.28
コインチェック株式会社(代表取締役社長:和田晃一良、以下:当社)が運営する仮想通貨取引所サービス「Coincheck」において発生した仮想通貨NEMの不正送金に伴い、対象となる約26万人のNEMの保有者に対し、以下の通り、補償方針を決定いたしましたので、お知らせいたします。
1月26日に不正送金されたNEMの補償について
総額 : 5億2300万XEM
保有者数 : 約26万人
補償方法 : NEMの保有者全員に、日本円でコインチェックウォレットに返金いたします。
算出方法 : NEMの取扱高が国内外含め最も多いテックビューロ株式会社の運営する仮想通貨取引所ZaifのXEM/JPY (NEM/JPY)を参考にし、出来高の加重平均を使って価格を算出いたします。算出期間は、CoincheckにおけるNEMの売買停止時から本リリース時までの加重平均の価格で、JPYにて返金いたします。
算出期間 : 売買停止時(2018/01/26 12:09 日本時間)〜本リリース配信時(2018/01/27 23:00 日本時間)
補償金額 : 88.549円×保有数
補償時期等 : 補償時期や手続きの方法に関しましては、現在検討中です。なお、返金原資については自己資金より実施させていただきます。
今般の不正送金に伴い、一部サービスの停止などお客様、取引先、関係者の皆様にご迷惑をおかけしており、重ねてお詫び申し上げます。原因究明、セキュリティ体制の強化などを含めたサービスの再開に尽力するとともに、金融庁への仮想通貨交換業者の登録申請の継続的な取り組みも併せて、今後も事業を継続して参りますので、引き続き、宜しくお願い申し上げます。
(http://corporate.coincheck.com/2018/01/28/30.html)
코인체크는 28일 이리 공시했다.
피해자 26만 명이 보유 5 억 2300 만 XEM에 대하여, 일본 엔으로 환불해주기로 했다.
자금은 자사의 자금으로 충당하기로 하였다 한다.
(NEM, XEM : 재단 이름, 코인 이름으로 다를 뿐, 지칭 대상은 한 곳임.)
이러자, 우선은 나부터도 안도의 한숨을 쉰다.
네티즌들은 코인체크는 물론 나아가 일본까지도 칭송하기 바쁘다.
하기사, 한국에서도 이와 유사한 사건이 일어났지만,
피해자 네들이 운이 나쁘니 스스로 감당하라며 나자빠진 것과 비교하면,
과시 천양지차라 하겠다.
한편, 코인체크 페이스북에 들어가 보니,
피해자들은 엔화로 줄 것이 아니라, NEM 코인 자체로 보상해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당연한 것이 코인체크가 보상해주기로 한 보상 기준은,
NEM의 매매정지 시점으로부터 보상 공시 발표시까지의 거래량가중평균가격이라 한다.
매매정지이후로부터 NEM의 가격은 하락 일변도였음이니, 가당치도 않은 셈법이라 하겠다.
내가 주목하는 것은, 보상 공시가 나가자,
한국 사람들의 일방적인 찬양 일색 반응이다.
일본 피해자들이 고통을 호소하고 있으며,
코인체크 측에 불만을 터뜨리는 것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도대체가 잘못은 코인체크가 저질렀는데,
여기 사람들은 어째서 어제의 그를 버리고, 오늘의 그만을 마냥 칭송하고 있는가?
이 점에 서 있자니, 이것은 분명 잘못된 인식에 기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소한 자리를 바꿔, 자신이 피해자 위치에 있다면,
이리 일방적인 찬사를 늘어놓지는 않았을 터이다.
헌즉 일차적으로는 서있는 위치가 당사자 공감선상과는 분리되어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근원적 아픔이 제각(除却)되고, 거죽 결과에 매몰된,
지극히 일차원적인 동물적 자극-반응 프로세스에 든,
저 마냥 가벼운 달뜬 영혼을 목도한다.
이 표피적인 인식, 판단, 반응 능력들이라니,
너무 안일하다.
두 번째는 보상의 동등성 원칙 문제이다.
보상(補償 compensation)은 위법성은 없으나,
손해를 끼친 것을 전보(塡補)해준다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코인체크 입장에서는 위법한 것은 없으나,
고객을 배려하여 제법 선의를 베푼다는 것이 된다.
하지만, 만약 코인체크측의 직무 유기, 배임, 사기 등을 원인으로 사고가 난 것이라면,
보상이 아니라 배상(賠償, reparation)을 해주겠다고 하는 것이 옳다.
배상은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를 전보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차후 일본 정부 당국의 조사에 따라 보다 명확해지길 기대해본다.
보상이든, 배상이든 피해 정도를 충분히 전보할 수준 이상이어야 한다.
하지만, 코인체크측이 제시한 보상 평가 기준은 객관적이지 않다.
거래 정지 이후로부터, 공시일까지의 가중평균치라는 것은,
사고 사후의 시장 거래 가격을 반영한 것인즉 하향 바이어스가 심하게 걸려 있다.
공정하지도 않고, 일방적인 자의적 이해를 도모하려는 여간 약은 셈법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피해자는 거래정지 이전에 코인을 이미 소유하고 있었으므로,
이미 가격이 사뭇 떨어진 사후의 시장 가격을 평가 기준으로 감수할 이유가 없다.
최소 사고 시점 직전 당시의 가격을 기준으로 하여야 할 것이며,
이후, 거래가 정지되어 시장 활동을 하지 못하게 된 불이익,
정신적 피해 손실 등은 전혀 계상이 되지 않았은즉,
이는 마땅히 법적 소송을 통해서라도 구제되어야 하리라.
이 모든 것의 책임 당사자는 코인체크로 유일무이 특정된다.
그가 사고 손실 모두를 부담하여야 한다.
따라서, 원칙적으로는 그가 칭송 받을 이유는 없다.
세 번째는 NEM측의 다음과 같은 선언이다.
‘해킹된 계좌에 모자이크 처리를 하여,
움직일(추가 이전 거래) 수 없도록 조치를 하였다.‘
NEM의 개발자인 Paul Rieger는 이런 말을 떨구어,
여러 사람을 놀라게 한다.
이 순간 NEM은 더 이상 코인이 아니다.
탈중앙화 이념을 거스리는 이런 결정은,
바로 자기 스스로의 존재를 부정하는 길로 들어섰음을 언명한 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중앙 권력이 될 수 없도록 설계된 것이 블록체인 기술의 핵심 내용이 아닌가?
헌데 하다못해, 일개 개발자가 공의(公議)에 붙이려는 최소한의 노력조차 없이,
마음대로, 편의껏 개폐, 수정을 할 수 있다면,
이런 코인 시스템을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
이런 식이라면, 언젠가 악의의 인물에 의해 시스템이 교란되고,
이용자가 피해를 입을 개연성은 언제나 열려 있게 된다.
이로서, NEM은 더 이상 코인 역할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물론 해커가 훔쳐간 코인이 더 이상 역할을 할 수 없게 무력화된다면,
해커를 응징할 현실적 효과를 낼 수는 있겠다.
하지만, 이로써 코인으로서의 지위를 잃게 되었을 때,
발생하는 기존 화폐 소유자의 피해는 어찌 보상되어야 할 터인가?
이로써 초래된, 극도의 존립 불확실성에 노출된 코인의 장래는 누가 책임질 것인가?
해킹 응징과 화폐 존립 근거 수호와는 전혀 별개의 사안으로,
이들을 중심으로 발생하는 제 문제는,
각각 별도의 방법으로 모색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Paul Rieger는 코딩은 잘 할려는지 몰라도,
탈중앙화 철학에 대하여는 전혀 깊은 이해가 없는 어릿배기, 쑥맥인가 하노라.
더불어 코인체크의 일방적 보상 계획이나, NEM측의 해킹 코인 무력화 조치들에,
무작정 환호하는 이들 역시 사물 인식 수준이 상당히 저열하다고 여기지 않을 수 없다.
이들을 보자 나는 니체의 노예도덕(Slave morality)을 절로 떠올리고 만다.
자기를 극복한 인간, 즉 위버멘쉬(übermensch)는 남에게 복속하지 않고,
세속에 굴복하지 않고, 스스로를 극복한 사람을 말한다.
"차라투스트라의 이름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무도 내게 물어보지 않았다. ... 차라투스트라는 도덕이라는 오류를 최초로 고안해낸 인간이다. 그렇기에 그는 도덕의 오류를 최초로 인지한 인간임이 분명하다. 성실성을 통한 도덕의 자기 극복, ... 이것이 차라투스트라의 이름이 지시하는 의미이다.
잘못을 저지른 것은 코인체크인데,
바로 엊그제, 돌로 인한 아픔은 잊고,
다만 오늘의 물을 빌어,
갈증이 채워졌다고 환호한다.
본디 어제 저들의 돌팔매질이 없었다면,
오늘 마치 은혜인 양 내려주는 물을 굳이 구걸할 이유도 없었을 터이다.
노예는 어제까지 채찍을 들어 등짝을 내리치던 주인을 잊고,
개떡 하나를 던져주자 엎드려 땅바닥을 기며 주워 먹으며,
오늘 주인의 덕을 칭송하기 바쁘다.
이게 바로 니체가 말하는 노예의 도덕인 것이다.
노예는 엊그제까지 암호화폐 거래소 폐지를 외치고,
트레이더를 사기꾼, 투기꾼으로 몰아붙이던 정책 당국자를 성토하였으리라.
허나, 오늘 저들이 발표하길,
‘좀 봐줄게’ 하면,
아마도, 태극기 들고 광화문으로 달려 나가며,
저들의 덕을 칭송하지 않겠는가?
이런 짓거리를 일찍이 맹자는 그물질이라 하였다.
無恒産而有恒心者 唯士爲能 若民則無恒産 因無恒心 苟無恒心
放僻邪侈 無不爲已 及陷於罪然後 從而刑之 是罔民也
여기 罔民이 백성을 그물질 한다는 구절인데,
요는 백성을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고는,
이를 형벌로 옭아맨다는 말이다.
원래 낚시질이나 그물질을 잘하는 이는,
능수능란 죄었다 늦추었다하는 챔질을 물고기가 눈치 채지 못하게 한다.
냄비에 개구리 넣고 물을 끓이면 따뜻하다고 잠시 맥 놓고 놀지만,
이도 잠깐, 무정한 인간은 이내 뚜껑 덮어버리고 불을 때올리고 만다.
글을 마치려는 지금 뉴스를 보았다.
오늘 아침만 하여도 뭇 언론들은 정부가 가상(암호)화폐 관련 발표한다는 소식을 쏟아내었다.
이에 따라 거래소 시장 코인들은 프라이팬 위에 올린 메뚜기처럼 마구 뛰놀았다.
하지만, 정작 정부는 시치미를 뚝 떼고 그런 일 없다고 했다.
그리고는 바로 김동연인지, 간철수 닮아 간보기 바쁜 간동연은 중국 출장을 간다고 한다.
‘혀라도 빼어 내밀며 메롱’할 기세다.
오늘 아침 시민들은 또 한 번 저 잘난 녀석들에게 그물질을 당하고 만 것이다.
저들은 이를 그저 땅바닥에 흩어뿌린 한 홉(合) 좁쌀처럼 대수럽지 않게 생각할 터이지만,
시민을 능욕한 죗값을 저들은 오만 말(斗)들이 표(票)의 총알로 되갚음 받고 말 것이다.
冤有頭 債有主。
원래 이 말은 선사(禪師)들이 곧잘 내뱉는 말이다.
원한엔 그 원수가 있고, 빚엔 그 빚쟁이가 있다는 말이다.
이것 있다면, 결코 그 한을 잊을 수가 없는 일이다.
그런데, 기실 伸冤討債라 즉 원한을 갚고, 빚을 따지는 일은,
옳게 헤아려 보면, 저들 원수 집안이라든가, 빚쟁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정작은 스스로 어리석음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그런즉, 내가 표를 던져 위정자를 잠시 뽑아 일을 맡겼음인데,
되려 욕을 당하고 있다면, 이는 저들 잘못이 아니라, 곧 내 허물이라 하겠다.
나는 지난 광화문 촛불 집회에 열 셋 차 나섰다.
현 정권을 지지해서가 아니라, 박정권에 대한 분노 때문이다.
헌데, 문정권이 하는 짓을 보니, 박정권 못지 않구나.
冤有頭 債有主。
선사의 말씀처럼,
冤家 원수 집안,債主 빚쟁이는
알고 봤더니, 저들이 아니고,
정작 자신이 밝지 못함에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다음 번 선거에선,
내 기필코 어둠을 몰아내고,
밝은 판단을 하고야 말리라.
그대를 부리는 주인은 노예가 가진 힘의 의지를 빼앗는 데카당이다.
이런 세력, 선전, 가치들을 뿌리로부터 전복시켜야 내가 참주인이 된다.
탈중앙화 역시 모든 기존의 가치를 전복하려고 한다.
이 유사이래 처음으로 기술적 완벽성을 무기로,
떨쳐 일어난 자유 영혼을 향해 우리는 스스로 감동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탈중앙화는 주인도덕(Master morality)이다.
탈중앙화를 옹호하고 싶다면,
세상의 모든 지주, 기득권, 권력에 저항하여야 한다.
예수 또한 이리 말하지 않았던가.
“너희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려고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노라 나는 사람이 제 아버지와 맞서게 하고 딸이 어머니와 맞서게 하고
자기 시어머니와 맞서게 하려고 왔다”
아, 절절 끓는 예수의 저 말씀은,
세상을 향해 날린 표창과 같이 섬뜩하기도 하고,
동지섣달 자리끼 물처럼 짜릿하니 시원하여 내 묵은 영혼을 씻어내리누나.
서 푼도 아니 되는 눈깔사탕 입에 물려주고 울지 마라 할 뿐,
저들 세력들은 뒷전에서 그대를 몰아가며 앵벌이를 시키는 악덕 주인인 뿐인 것임을.
이를 깨달을 때, 그대는 노예의 차꼬를 벗어버리고,
대자유인으로 거듭난 참주인이 된다.
노예는 언제나 수동적으로 세상을 해석한다.
그러므로 주인은 채찍으로 몰고,
한 조각 당근으로 그대를 부리는데 어려움이 없다.
그대는 여기 묶이고, 갇혀,
저들에게 조롱당하는 말(馬)이런가?
어찌 조그마한 일에 그리 쉽게 흥분하는가?
노예처럼.
하지만, 참다운 주인은,
주도적으로, 창조적으로 세상을, 자기 자신을 극복해간다.
나는 블록체인을 통해 모든 이들이 주인이 되는 미래를 엿본다.
설혹,
동학운동처럼,
무참히 지상으로 떨어지는 봄꽃인 양,
총칼의 폭력에 무너질지언정,
그 정신만은 여여(如如)히
오늘을 성성(惺惺)히 지켜,
유린 당하는 역사를 뜨겁게 증언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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