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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과 여우

decentralization : 2018. 3. 7. 11:44


어느 날, 채굴 현장에, 

평화로운 마을 어귀에 나타난 까마귀인 양,

시꺼먼 경찰이 출현하자, 

여러 논의가 분분해지고 있다.


도대체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는데, 마치 위법한 짓을 한 양,

경찰이 왜 사적 자치 공간을 기웃거리는가?

여기 분노를 느끼면서도 막상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스스로 생각하여도 딱하다.

그래 글이라도 써본다.


이 자리에서는 논의 주제를 좁혀, 채굴행위가 과연 무엇인가로 좁히고자 한다.


현행법상 딱히 규정할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데 논란이 가중되고 있다.

세법상 세목을 확정할 수 없으니 세금도 부과할 수 없고,

형법이나 행정법상 제재를 가하려 하여도, 

법에서 명시적으로 규율한 죄목에 들지 않는 한,

함부로 전단(專斷)하여 죄를 물을 수 없다.


그렇다면 이는 여간 다행인 노릇이 아닌가?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되고,

국가 권력으로부터 제재를 받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

혹 이런 세상을 꿈꾸지 않았는가?


탈중앙화란, 주지하다시피,

국가 중심 권력으로부터의 이탈, 해방을 지향하는 이념이다.


하지만, 그런 한편 세금을 낼 터이니, 그만 괴롭혀라,

합법적으로 영업하고자 하니 적당한 절목(節目)의 패찰을 목에 걸어다오.

이리 중앙화 권력에 자진하여 요구를 하고 있다.

나는 여기 숨은 불안의식을 엿본다.


또 한편에선, 채굴업이 제조업이니, 장비 대여업, 가공업이니 스스로를 규정하려 애를 쓴다.

세상에 처음 출현 것이니, 기존의 문법으로서는 쉬이 규정하기 어렵다.

대단히 죄송한 말씀이나, 나는 순간 군맹무상(群盲撫象)이란 고사를 떠올린다.

이 말씀은 본래 불경에 나오는 비유의 가르침이다.


其觸牙者,即言象形如蘆菔根;其觸耳者,言象如箕;其觸頭者,言象如石;其觸鼻者,言象如杵;其觸脚者,言象如木臼;其觸脊者,言象如床;其觸腹者,言象如甕;其觸尾者,言象如繩。善男子!如彼眾盲,不說象體,亦非不說。若是眾相,悉非象者,離是之外,更無別象。善男子!王喻如來正遍知也,臣喻方等大涅槃經,象喻佛性,盲喻一切無明眾生。

(大般涅槃經)


왕이 코끼리를 끌어오게 하여 맹인에게 보이며 ‘코끼리를 보느냐’ 하고 묻자,

이들이 제각각 제 의사껏 말하는 장면이다.


도대체가 볼 수 없는 이들을 모아놓고,

보느냐 이리 묻는 심술이란 얼마나 무례한가?

그렇다.

이 물음은,

보지 못하는 그들을 한껏 질타하고자 하는데 그 뜻이 있음이다.

이 부분을 놓치면,

이 경을 비록 아무리 여러번 읽어도 바른 이해에 도달하기엔 부족함이 남게 된다.


(출처 : http://johnlxj.blog.163.com/blog/static/1658655642009102311124918/)


맹인들.

상아를 만진 자는 코끼리를 두고, 무뿌리와 같다 이르고,

귀를 만진 자는 키와 같다,

머리를 만진 자는 돌과 같다,

코를 만진 자는 절굿공이와 같다 ....

등등으로 아뢴다.


汝見象耶?

‘네들은 코끼리를 보는가?’

왕이 뭇 맹인들에게 이리 묻자, 

맹인들은 재주껏 코끼리를 더듬고서는 이리 아뢰고 있는 것이다. 

我已得見。

‘저희들은 이제 그것이 무엇인지 알만 합니다.’


象喻佛性,盲喻一切無明眾生。


경의 끄트머리에선,

코끼리는 불성(佛性)을, 맹인들은 무명중생(無明眾生)을 가리킨다고 말하고 있다.


이제까지의 세상에 나온 기존의 문법으로는 규정할 수 없는 사물을,

그것에 의지하여 규정하려한들 결코 바로 규정할 수 없다.


여기 줄에 묶여둔 강아지 하나가 있다.

어쩌다 풀어놓으면 천지사방 달려 나가 한 동안 뛰어논다.

하지만, 배고 고파지고, 주인이 그리워지면,

녀석은 스스로 말뚝 곁으로 다가와,

주인을 쳐다보면 목줄을 다시 채어주길 바라며 목을 길게 늘인다.

목줄이 채어지면, 더 이상 배를 곯지 않을 수 있으며,

찬바람 맞으며 거친 들판을 헤매지 않아도 된다는 기대가 있다.


시인 김춘수는 이리 노래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내가 이름을 부여하기 전까지는 가능태의 세계이다.

그러나 이름을 부르는 순간 그는 현실태로서 내 앞에 현전하는 실존이 된다.

김춘수로 인해 양자역학적 세계가 시로 나투어 그려진다.

이 시가 제법 아름답게 느껴지는가?


그런데 여기서 잠깐 하나 더 생각해 볼 것이 있다.


이름을 얻어 참 존재가 되는가?

양자역학은 가능태와 실현태(현실태)를 분별지어 말한다.

꽃은 이름을 얻어 존재가 된다.

그러나 이 때 꽃은 인간에 구속된다.

인간에겐 가치일런지 몰라도 순간 꽃은 곧 육화되어 죽음이란 달갑지 않는 질곡에 갇힌다.

마치 선악과를 먹은 태초인처럼 영원에서 멀어진다.


현실태가 되는 순간 존재는 한계상황에 놓여지게 되는 것.

그 때이후 생.노.병.사 억겁의 윤회 그 잔인한 수레바퀴에 치이게 된다.

그러한즉 무엇이 되려하는 것은 허망한 것이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Le Petit Prince)에서,

어린왕자와 사막의 여우는 이리 대화를 나눈다.


나는 너랑 놀 수가 없어.. 

나는 길들여지지 않았으니까.. 


그래? 그렇다면 미안해.. 

어린왕자가 말했어..


한동안 생각에 

잠겨있던 왕자가 불쑥 물었어... 

길들여진다는 게 어떤 거냐고... 


여우가 말했어.. 

그건.. 

사이가 좋아진다는 뜻이야 


네게 있어.. 

나는 

10만이나 되는 다른 

여우와 같아 보일 테니까..

그래서 넌 나를 필요로 하지 않아..


하지만.. 네가 나를 길들이면.. 


우리는 서로 

떨어져 지낼 수 없게 되는 거야.. 


너는 내게 있어...

 

이 세상에 단 하나 밖에 없는 

사람이 되는 거고 


나는 너한테.. 


단 하나 뿐인 여우가 되는 거지.. 


어린왕자가 말했어.. 

길들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데..? 


참는 것이 중요해... 


처음에는 나에게서 

조금 떨어진.. 

풀밭에 이렇게 앉아 있는 거야... 


그러면 나는 너를 

곁눈질로 힐끔힐끔 볼 테니까.. 


너는 아무 말도 하지마.. 


말이란 때때로.. 

오해의 원인이 될 수도 있거든..

 

하루하루가 

지나는 동안에.. 


너는 점점 가까운 곳으로 

와 앉게 되는 거야...

 

나 드디어 

너의 옆에까지 오게 됐어.. 


너에게 길들여졌고... 

행복해... 


날 길들인 게 너라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서로에게 

이 세상에... 

단 하나 뿐인 존재...

 

나에게 네가... 

너에게 내가... 

그런 사람이길 바래... 


세상의 단 하나 뿐인... 

그런 사람.. 


이것은 무엇인가?

관계망 속에 서로를 묶는다는 것과 다름없다.

외로운 이는 이리 서로의 손발을 꽃팔찌로 묶는다.

힘든 세상 이리 서로 아끼며 걷는 것.

그럼으로 서로 

"세상의 단 하나 뿐인...

그런 사람.." 이 된다.

이게 무명중생의 삶이다.


그대가 사막의 여우라면,

남에게 길들여 지지 마라.


그대가 꽃이라면 

꽃 이전의 순수태로서의 꽃이어야 한다.

이름을 구하지 마라.


이를 일러 본성 또는 불교에서는 진면목이라 한다.

누구의 부름을 받는 순간 그대는 에덴으로부터 추방될 것이다.

하니 누구의 call(부름, 소명)을 의욕하지 마라.


***


채굴행위를 제조업, 장비 대여업 ...

그 무엇으로 규정하든 그것은 하려한들 저들 관리들이 할 일이다.

만약 나라면, 이름을 저들에게서 구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그게 가능하다면, 

그런 세상에 살기를 꿈꾼다.


외부에서 이름을 부여할 수 없는 존재.

나는 그런 꽃이 되고 싶다.

나는 그런 여우로 남아 있길 원한다.

 

생텍쥐페리가 비행기를 고쳐 사막을 떠날 때,

여우를 데려갈까?

내가 여우라면,

그가 아무리 꼬셔도,

그대로 사막에 남아있을 것이다.


아마 비행기에 실려 갔다면,

여우는,

우리에 갇혀 인간 시장에 내돌리며,

삼백예순닷새 스물네 시간 쉬지도 못하고 공연을 하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암호화폐 역시,

중앙화 권력이 함부로 규정할 수 없는 것으로,

제 삶을 영원히 구가하길 바란다.


심지어, 어떤 암호화폐 하나가,

다른 암호화폐를 규정하지 못하는,

그런 평등 자재한 세상이 오기를 꿈꿔본다.


과연 블록체인은,

이를 실현할,

대원경지(大圓鏡智),

그 구경(究竟)의 지혜 거울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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