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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구 사면(Nolle Prosequi)

소요유 : 2024. 9. 26. 15:49


영구 사면(Nolle Prosequi)

유시민이 윤석열에 대한 영구 사면(Nolle Prosequi)을 제기한 소식을,
어제 처음 접하였다.

순간 주저 없이 욕이 튀어나왔다.
썩을 것들.

내처 문재인이 떠올랐다.
박근혜 탄핵 당시 초기 그는,
자진 하야(下野)하면 편리 봐주겠다는 식으로 말했다.
예의 그 특유의 習以爲常대로 어정쩡하니 눈치를 살피던 그는,
광장의 열기가 뜨거워지고, 세가 부풀자,
말을 바꿔 ‘스스로 하야 하더라도 탄핵절차는 계속돼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 변신을 거듭하다가,
대통령이 되자 옥에 갇힌 박근혜를 사면까지 해주었다.

어쩌면 이리도 양자의 태도가 유사한지?
이 인간 행태란 도대체가.

정치인들은 자신의 정치적 유불리를 따져 가며,
왕법(枉法)이라 법을 구부려 더럽히는 짓을 예사로 한다.

본디 Nolle Prosequi는 왕권이 통하던 시대의 유물이다.
민주시민 사회가 확립되고 나서,
이런 따위의 권력자에 의해 베풀어지는 은정 따위는 극히 제한되어야 했다.
하지만, 미국의 경우 영국의 유물이 법체계 안으로 들어왔다.
오늘날 한국만 하더라도 대통령의 사면권이,
정권의 자의적 판단에 의해 함부로 행사되고 있다.
이는 헌정질서와 법치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암종이다.

보통 대통령이 정치인을 사면하게 되면,
국민 통합 운운의 판에 박힌 말을 뱉어낼 뿐이다.

유시민이 윤석열 영구사면을 제기한 이유는 너무도 자의적이고 궁색하다.
그는 한마디로 지지하던 대통령의 몰락을 경험한 이들이,
상대 대통령을 향한 단죄로 한을 풀 듯 되풀이 하는 고리를 끊자는 것이다.

그 고리를 끊고자 한다면,
죄악을 저지른 자를 사면하는 것으로부터 찾을 것이 아니라,
그 죄에 대한 벌을 제대로 가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과연 유시민은 무엇이라 대꾸할 것인가?

현대 범죄학에선 응보가 아니라, 예방을 목표로 하여야 한다고 하지만,
응보가 처벌의 목적이 아니라면,
도대체 처벌의 목적은 무엇인가 말이다.
예방을 목적으로 한 처벌이 그럼 소기의 효과를 내었는가?

예방이론은 얼핏 그럴싸하지만,
따지고 보면 이는 처벌의 대상이 되는 인간을 수단화하고 있다.
사회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한 인간을 표본실의 청개구리인 양,
죄인의 법정 형량을 작량감경하며,
형법의 기초를 위태롭게 시험한다.

게다가 그 개구리는 죄악으로 이미 더럽혀져 그 인격을 온전히 믿을 수도 없다.
최소 일반인보다 더 미더운 존재라 할 수 없다.

하지만 응벌, 응보론은 미래를 예상하거나 특별한 기대조건화하지 않는다.
다만 죄에 대한 응징을 목표로 할 뿐이다.
얼마나 드라이한가?
거창한 사회의 안정화나 범죄 예방이란 그럴싸한 목표에 의지하지 않는다.
응보를 통해 피해를 보상받고, 억울함을 푸는데 일차적 목표가 있다.
이게 재발을 방지하는 기제로 작동하는가는 부차적 문제이다.
아니 관심의 적的이 아니다.

유시민 따위의 죄와 벌에 대한 무원칙한 편의적인 태도는,
罪刑相當原則을 위배하고 있다.
죄에 대한 벌은 등가성을 가져야 정의에 부합한다.
아울러 보편성을 띄어야 만민이 수긍하고 따르게 된다.
유시민은 정무적인 잣대로 사람에 따라, 상황에 따라,
죄벌을 고무줄처럼 늘렸다 줄였다 하고 만다.

사회적 안전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죄벌을 임의로 조정 가감하면,
거꾸로 피해자 보상이나, 보복의 기대를 해치고 만다.
만족을 얻지 못하는 이가 늘어나면, 사적 처벌이 정당화되고,
종내는 법적 안정성, 사회적 신뢰 토대를 해치게 된다.

罪則罰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 한다.
(외려 그 특별한 위치를 고려하면 가벌하는 게 마땅할 수도 있다.
이 더러운 세상을 보며,
술 한잔을 기울일 때면,
적극 검토하여야 한다는 욕망이 일기도 한다.)
죄형의 이 대원칙을 말빨, 글빨 부스러기로 허물어뜨리는 자가 있다면,
그에 합당한 벌을 반드시 물어야 한다고 믿는다.

사법부는 명박이의 경우 형법에 의율하여 17년 구속에 당하는 벌을 가하였다.
그런데, 그놈의 썩어빠질 대통령 사면권을 빙자하여,
고작 2년 마친데 불과한데, 풀어주었고,
박근혜는 22년 형벌을 4년여로 퉁치고 옥을 나왔다.
게다가 복권(復權)까지 덤으로 선사받았다.
수십억 벌금도 내지 않아도 될 판이다.

그들은 옥에 있으면서도 특별면회로 시간을 눅이고,
병을 핑계로 장기간 병원 신세를 지기도 하였다.

법이 이리 대통령 소맷자락 흔들 듯 자의로 개폐되고,
형벌 집행이 우물 속 뒤웅박처럼 뒤집히기 일쑤라면,
도대체 법의 위령이 서겠음이며, 사람들의 믿음을 살 수 있겠는가?

선고의 효력을 일시에 상실시키고, 형의 집행을 면제시킨다면,
도대체 사법권의 위엄을 어디에서 구할 수 있으랴?

묵자는 나라에 일곱 가지 우환이 있다 하였다. - 칠환(七患)
그중 일곱 번째의 말씀이 여기에 있다.

賞賜不能喜,誅罰不能威,七患也。
(墨子)

‘상을 주어도 사람들을 기뻐하게 할 수 없고,
벌을 가하여도 사람들이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일곱 번째의 우환이다.’

상이란 공적(功績)에 주어지는 것인데,
아무런 이룬 바 없는데도 상이 내려지니,
그 무슨 기대 가치 역할을 할 수 있으랴?
책벌을 가하는 것은 사람들이 주벌을 무서워하며 경계케 하는 데 그 뜻이 있음인데,
죄를 묻고 벌이 가해지지 않았는데도,
면죄부를 주고 멀쩡하니 세탁해주고, 
그리고 며칠 밤만 옥에 들어가 시늉만 하면 이내 풀어질 것이 예견된다면,
도대체 그 누가 있어 형벌을 두려워 하랴?

​게다가 이런 짓거리들이, 
정상모리배들 지들끼리만 주고받는 놀이에 그치고,
일반 서민들에겐 미치지 못할 것인즉,
그 원망이 어찌 먹장구름처럼 두텁지 않을 수 있으랴?

慶賞賜與,民之所喜也,君自行之。殺戮誅罰,民之所惡也,臣請當之。
(韓非子)

‘축하하여 상을 주면 백성이 기뻐하는 바라, 군주는 이를 행하고,
죽이고 벌하는 것은 백성이 꺼리는 바라,
신은 마땅히 이를 청하는 바입니다.’

한비자 사상 역시 마찬가지로 상과 벌이 제대로 이뤄져야 할 것임을 견지하고 있다.
법을 지키고, 선량한 풍속을 길러야 할 위치에 있는 위정자가,
앞장서서 이리 법을 유린하고 있다면, 
그리고 곁에 서서 이를 부추기는 자가 있다면,
이들을 어찌 민의를 대표하는 이라 이를 수 있으랴?
마땅히 믿음을 거두고, 자리를 물러나게 하여야 하리라.
아울러 다시는 민주시민 사회의 광장에 나오지 못하도록,
영구 금족(禁足)시켜야 하리라.
이러고서야 천하가 태평해지리라.

민주사회에서 고대 왕의 은사권(恩赦權)을 이어받은 사면권은 구질스럽기 짝이 없는 장치다.
더구나 고대 은사권은 공이 큰 자에게 왕이 내리는 일종의 포상(褒賞)의 성격이 짙다.
가령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이 발한 건국의 공신에 대한 단서철권이 그 예다.
하지만, 교토사주구팽(狡兔死走狗烹)이라고, 
본디 권력의 속성인즉, 본질적으로 남과 더불어 빵을 나눠 먹을 수 없는 법.
그런즉 후에 이들을 다 잡아 죽여 축출하고 말았다.
(※ 참고 글 : ☞ 단서철권丹書鐵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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