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치(擁齒)
전일 썼던 제 글이 스스로 실마리가 되어 우러난 단상(短想)을 덧붙여 봅니다.
유방이 항우를 꺾고 천하를 통일한 직후의 이야기입니다.
당시 부하장수들에게 논공행상을 하는데,
공로의 우열 때문에 쉽게 결정을 못내리고 있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유방이 궁전 안에서 정원을 내다보니 일단의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습니다.
유방은 자기 뒤에 서 있던 군사(軍師) 장량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저들은 지금 무슨 이야기를 저리 열심히 하고 있는가 ?"
"모르셨습니까 ? 그들은 지금 반란을 계획하고 있을 것입니다."
장량이 이리 대답하자.
유방은 흠씬 놀랐습니다.
"이제 천하가 완전히 평정되어 통일국가가 완성이 되었는데 왜 반란을 생각하고 있는가 ?"
"폐하가 일개 서민으로 군사를 일으켜 그들로 하여금 싸우게 하여 천하를 손에 넣으셨습니다.
그러나 이번 논공행상에서 은혜를 입은 사람은 측근 일부에 불과하고,
주벌을 받은 사람은 평소에 폐하에 미움을 받던 사람들 뿐입니다.
지금 폐하의 명을 받들어 공적을 논하는 작업중입니다만,
이들에게 봉지를 나누어주려면 천하를 모두 다 써도 부족합니다.
그러니 영지를 받기는 커녕 오히려 누명을 쓰고 벌을 받으런지도 모른다고
저리 전전긍긍하며 모여서 반란을 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좋은가 ?"
"폐하께서 평소 미워하시면서 아직 주벌을 가하지 않은 사람,
폐하가 미워한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는 인물이 있으면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런 인물이라면 옹치(擁齒)가 있소이다.
옹치에게는 옛날부터 원한이 있지만 공이 크기 때문에 지금껏 참고 있소."
"그러면 그 옹치에게 당장 영지를 주고 모든 사람에게 그 사실을 알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폐하의 미움을 사고 있는 옹치가 제후에 봉해졌다면 다른 장수들도 안심하고 기다리게 될 것입니다."
유방이 장량의 진언을 받아들여 옹치에게 영지를 준다고 발표하자 모든 장수들은 일제히 환성을 올리며
"옹치에게까지 영지를 주셨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 안심해도 될 것이다."
그후론 장군의 불만이 가라앉고 악화되어 가던 분위기가 진정되었다고 합니다.
속담에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란 말이 있습니다.
다 자란 성인이 되어도 이 뜻을 아직 잘 모르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미운 놈에게 떡을 주는 것은 미운 놈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미운 놈이 그것 먹고 살 찌라고 주는 게 아닙니다.
(물론 제 본디 품성을 가지런히 고르려는 덕스러움의 발로인 점이 있습니다만.)
밉지 않은 다른 사람들이 미운 놈에게까지 떡을 주는 나를 보라고 주는 것입니다.
물론 미운 놈도 좀 나에 대한 생각이 달라질 터이지만,
문제의 촛점은 실은 그 놈이 아닌 게지요.
미운 놈을 지렛대로 하여, 다른 사람으로부터의 평판을 좋게 이끌어 내려는 기도가 숨어 있습니다.
흔히 노자의 무위 철학도 항간에 잘못 알려진 구석이 많습니다.
장자는 철저히 형이상(形而上)의 세계로 뻗어나갔습니다만,
노자는 노회(老獪)한 목적지향적 처세철학이 곳곳에 배어 있습니다.
이게 한번 재주넘기를 하여 보다 적극적 실천술로서 나툰게
병법(兵法)이지요.
노자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善爲士者不武,善戰者不怒,善勝敵者不與(爭),善用人者爲之下.是謂不爭之德,是謂用人之力,是謂配天,古之極.
..... 잘 싸우는 사람은 다투지 않고, 남을 잘 부리는 사람은 언제나 겸손하다.
이를 일러 부쟁지덕이라 한다. ....
이게 무엇이냐 하면, 싸움을 단순히 피하여 덕스럽다는 것이 아닙니다.
노하지 않는 양, 다투지 않는 양 그리 외견상 비추도록 해야 한다고 주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그로서는 남에게 주문할 필요는 없을 터이니, 주장하는 것일까요 ?
함곡관 관리 윤희(尹喜)의 청대로 책을 남겼다고 하니
그 역시 자신의 無名, 有名에 대한 고려가 있었을까요 ?)
그러면 상대가 나를 믿고, 평판이 좋아지며, 나아가 나에 대한 경계심을 늦춘다.
이 때 상대를 공격하면 善勝敵者 즉 잘 싸우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게 황노(黃老)의 술(術)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은폐된 지시어입니다.
이것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놓고 발전 시킨 것이 병가입니다.
(※ 혹자는 거꾸로 병가로부터 노자가 영향을 받았다고 보기도 합니다.)
실제 손자병법의 시계편을 보면,
兵者, 詭道也. 故能而示之不能, 用而示之不用, 近而視之遠, 遠而示之近.
전쟁이란, 속이는 것이다.
고로,
능력이 있으면서도 능력이 없는 것처럼
군사를 일으킬 작정이면서 않는 것처럼 보이게 하고,
가까운 곳을 보려면 먼 곳을 보는 것처럼
먼 곳을 보려면 가까운 곳을 보는 것처럼 ... 속인다.
병가에 이르러 이젠 드러내놓고 속여야 이긴다고 말하는 것이지요.
만약 세상이 싸움터라면, 속여야 선승적자가 된다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병가는 참으로 솔직(?)한 집단입니다.
반면 노자는 속심을 교묘히 숨기니 참으로 노회(老獪)하지요.
사기의 공자세가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노자가 공자 보고 이른 말입니다.
"총명하고 통찰력이 풍부하면서도 항상 죽음의 위험을 안고 있는 것은
남을 지나치고 비판하기 때문입니다.
말을 잘하고 박식하면서 언제나 그 몸을 위태롭게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은 그가 남의 잘못을 폭로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과 관계를 가지고 사는 사람은 자기 주장을 삼가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런 태도는 對사회적으로는 비판적 성찰을 기대하기 힘듭니다.
엄격하게 따지면 사회적 책임의식을 엿볼 수 없는 태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공자는 참으로 대단한 위인입니다.
유가의 성실성엔 그저 고개가 절로 수그러듭니다.
상갓집 개란 소리까지 들어가며 풍찬노숙하며 천하에 예를 펴려 갈심진력하는 공자.
천명을 자각하며 이 어지러운 세상 쓰러져 가는 인의의 푯대를
꿋꿋히 지켜낸 그를 사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利를 취하는 것이 제일의적 목표라 할 수 있는 상인들, 전사들,
종교강매인들의 입장에선 차라리 순자, 한비자에서 직접적으로 취할 것이 많을 듯 싶습니다.
하지만, 예를 잃으면 근본을 허무는 것인즉 간단히 외면할 수 없을 노릇입니다.
저는 종교강매인들 아니 고상하게 일컬어 도를 파는 이들을 보면
利를 이악스럽게 탐하는 상인들이 의식에 중첩되곤 합니다.
다시 이어 말씀드립니다.
자신의 보신책, 처세술로는 기능할런지 몰라도.
이렇듯 노자철학을 무위의 출세간적 철학으로 단순히 평가할 수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시장 일선에서 장사를 하는, 利를 구하는 상인(商人)들에겐
노자의 지금 윗 말은 음미할 만한 구석이 있다 여겨집니다.
그래 이리 소개하는 것입니다.
말이 나온 김에 하나 더 소개하겠습니다.
공자가 노자를 찾아가 예를 묻자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고
사기 노장신한열전(老莊申韓列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신이 말하고 있는 요순(堯舜)같은 성현의 "예"라는 것은
그것을 말했던 사람의 뼈는 이미 썩어 없어졌고, 오직 그들의 말만 남아있을 뿐입니다.
군자는 나아갈 때가 되면 벼슬길로 나서지만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면 물러날 뿐이오.
훌륭한 장사꾼은 좋은 물건을 감추고 없는 것처럼 합니다. - (良賈 深藏若虛),
진실한 군자는 훌륭한 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남들에겐 허술하게 보입니다(보이도록). - (君子盛德, 容貌若愚)
당신은 교만하고, 야심만만한 근성, 거만한 태도, 방자한 마음을 버려야 하오.
이것들은 모두 당신의 신상에 이롭지 못하오. 내가 당신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이것뿐이오."
良賈 深藏若虛
요즘처럼 선전, 광고에 목 말라 있는 세상엔 제 물건을 깊게 감추기만 한다면
양고(良賈)는 커녕 악고(惡賈)가 되기 십상일 터.
(* 賈는 장사꾼을 뜻합니다.)
허나 생각하기 나름입니다.
"믿기만 하면 천국행."
이 얼마나 직설적 유혹입니까 ?
우리가 노자를 읽을 때, 주의하여야 할 것은 바로 이 지점입니다.
深藏若虛에서
深藏, 깊게 감춤은 널리 꺼내 알리고자 함이요.
若虛, 허술한 척 함은 실은 남을 방심하게 하는 효용을 기대하는 것이지요.
이 숨겨진 code를 잘 찾아 제대로 decode 하여야 합니다.
(* 노정권 code정치의 문제도 code 자체가 아니라, decode의 부재에 있습니다만,
이에 대해서는 지금 말을 아낍니다.
다만 우리는 symbolization, coding으로 세상을 재단하고,
이들 창(window)을 통해 삼라만상을 해체하여 인식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주역도, 컴퓨터의 2진체계도, 제갈공명의 팔진도도 모두 이 code-decode의 변용으로 봅니다.)
하기에 노자의 술이 병가에 들어가면 대단한 위력을 발휘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컨대, 허허실실의 전법이 바로 그것이지요.
겉으로는 허술한 척 상대를 속이며, 상대를 나의 강한 쪽으로 유인하는 것.
이게 실인즉 노자의 처세술에 숨어 있는 핵심 키워드입니다.
노파심에서 덧붙이면, 노자가 이런 처세술로 일관되었다고 하는 주장하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다만 무위.자연의 사상에 가리워진 점을 특별히 드러내고 싶었을 따름입니다.
언제 기회 있으면 명심보감에 대하여도 소개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이것도 흔히 알려진대로 그냥 도덕책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여기에는 유불선이 다 녹아 있습니다만,
노자의 철학에 맥을 대놓고 있는 처세술이 적지 않습니다.
거칠게 말하자면, 순진한 사람 완전히 속여 먹는 책입니다.
- 제가 "악마의 사전" 문법을 빌려 이런 류의 책들을 평하곤 하는 말입니다.
이런 책들이 순진한 사람들 손에 들어가면,
악인들은 더욱 활동공간이 넓어 지는 것이지요.
그들을 도덕에 계박시켜놓고, 경계를 넘어 맘껏 요리할 수 있을 여지가 더욱 많아지는 것이지요.
명심보감은 항간에 알려진대로 그저 덕만 닦자는 수신서가 아닙니다.
실인즉, 패가망신하지 않고 오래 가문의 명예와 보신을 지키는 실천적 처세술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우리네 선비들도 겉으로는 공맹을 논하며 점잔을 떨며,
한편 노장을 폄하하곤 하였습니다만,
그들도 대궐을 퇴궐하거나, 관청을 퇴청하여서는
열심히 남 몰래 탐독한게 바로 노장이고,
손자, 오자, 육도(六韜)삼략(三略) 등의 병법서, 한비자, 춘추좌씨전들인 것입니다.
세상이 그리 녹녹한게 아니거든요.
뒷 구멍으로는 그들도 열심히 음모, 모략에 대비하고,
나아가 상대를 칠 계책을 이들 서책을 우물 삼아 두레박 던져 건져 올렸던 것입니다.
이 글은 다음 글과 뜻을 함께 한즉,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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