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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불위(呂不韋) - 기화가거(奇貨可居)

소요유/묵은 글 : 2008. 2. 11. 16:29


(* 이글은 某 사이트에 올린 제 글을 전재(轉載)한 것입니다.
앞의 제 글 범려와 짝을 이루는 글인즉 이리 보태어 매듭을 짓고자 합니다.
글 마디가 가끔 어색함이 있은즉, 그려러니 그냥 지나치시고, 허물 탓하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이곳 ooo 사이트의 마음결에 맞추어 이야기 주제를 이끌려다 보니,
첫 이야기 범려에 이어 여불위가 생각이 났다.
모두 거상이니 이곳에 방문한 분에게 한번 소개해볼 만하다 싶었던 것이다.

범려는 소시적부터 좋아하던 캐릭터의 소유자인지라,
한 때는 그의 호칭에 가탁하여 회사명을 짓고 사업체를 운영하기도 했으니,
그를 첫번째로 소개한 것은 나로서는 당연한 것이기도 하다.

여불위는 본시 상인으로 출신하여, 나중엔 재상으로 입신한 사람이니,
범려가 정치인으로부터 상인으로 전신하여 이름을 남긴 것과는 선후가 거꾸로다.

범려는 정치인으로서의 예리한 사리판단 능력과 세련된 지성을 상인으로 변신한 뒤에도 잃지 않고
주위 사람들에게 덕을 폈음이니, 이로 인해 그 명성이 제법 도탑다.
반면 여불위는 특유의 이해타산의 재빠름을 기초로 장사꾼으로서는
당시 거의 예가 없는 재상에 이르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나아갈줄 만 알았지 거두워 물러남을 몰라 종국엔 자결하게 되는 불운을 겪게 된다.

여불위에 대한 이야기는 범려에 비하여는 제법 널리 알려져 있는 편이다.
때문에 이의 행적에 대하여는 간단히 약술하는 선에서 그치고, 이번에는
경영자 입장에서 혹 참고될 만한 필자 나름대로의 몇가지 단상들을
덧붙이는 식으로 얘기를 진행하고자 한다.

전국(戰國)시대에 활약한 세객(說客)들은 거의 출신이 사(士)라는 신분이다.
요즘 인터넷 상에서 특히 정치에 관련된 글줄이라도 쓰는 사람들은 자칭타칭 논객이라고 이르고들 있다.
세객이란 말뜻에는 상대를 설득하여 외교적인 만족을 얻어내는 사람들이란 의미가 있다.
그런데 이 외교적 만족이란 서비스를 소비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
당시로선 군주이다.
따라서 그들 세객들은 전부 군주를 위해 봉사하고자 하는 것이다.
무엇 때문에 그들은 세치 혀를 놀려 그 잘난 목숨을 담보로 들불처럼 천하를 횡행하였는가 ?
어느 시대인들 다르련만,
그 시절 역시 명문귀족 출신이 아니고서는 출세란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려웠다.
그러니 춘추전국시대엔 이들이 줄 하나 잡기 위하여 필사적으로 일을 꾸미고,
모략을 세워 기회를 만들기에 혈안이 되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요즘들 쓰고 있는 논객이란 말이 적절한지도 의문이지만,
이들은 세객에 비해선 한층 다이나믹성이나 치열성이 떨어진다.
논객중에 진정한 사회변혁을 위한 우국지정의 발로가 있는 반면,
그저 자기 존재 확인에 가까운 주장을 펴는 이도 적지 않은 형편이니,
생존을 위해 절치부심하는 세객들과는 출발 조건부터 다르다.
다만 그들은 자존에 깊은 관심을 기우린다. 자존이 타자로부터 침해되었다고 느낄 때,
그들은 분노한다. 욕설이 난무하고, 주먹질이 난분분하다.
세객들은 절대 흥분하지 않는다. 아니 흥분할 수 없다.
적국에 단기필마로 들어가 명줄 놓고 건곤일척
일을 도모하는 마당에 자존이란 이미 문제의 객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돌아가서 사(士)란 신분은 경, 대부, 사로 이어지는 지배계급의 말단에 위치한 자리다.
사 아래가 서민으로 이제부터는 피지배계급에 속한다.
이 자리에서 대신, 재상까지 오르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런데 그 유일한 예외가 여불위다.
장사꾼에서 일약 대국 진나라의 재상까지 올랐다. 그 뿐인가 태후와 놀아나고,
한 때는 국정을 농단하기까지 하며 한 세상 진탕 휘젓고 놀다간 사나이가 여불위다.

그럼 일개 장사꾼이 재상까지 오른 지극히 예외적인 행로의 조건은 무엇일까 ?
필자는 이리 본다.

첫째는 장사로 이룬 기본 재산. 
둘째는 선견성(예견력)
세째는 교섭술
네째는 선전술
다섯째 운

첫째인 기본 재산 축적은 어떠했는가 ?
그는 원래 양택현 출신으로 진나라의 통일 직전 즉 전국시대 말기 사람이다.
물건 보는 감식안이 뛰어나고, 경제감각이 예리했으니
물건값이 쌀 때 거두워 들이고, 비쌀 때 풀어 거만의 부를 이룩했다.
그런데, 이런 공식은 앞선 범려 때도 이미 언급했던 것이다.
필자는 이를 일러 매점매석의 유형이라고 말했지만 실은 모든 장사의 기본 원리이기도 하다.
주식도 쌀 때 사서, 비쌀 때 팔아야 성공한다.
이것을 모르는 장사꾼은 없다.
문제는 언제가 쌀 때고, 언제가 비싼 때이냐를 아는 것이고,
조직적이고, 대대적으로 판을 엮어 어떻게 연출하느냐 하는 것이다.
이 때 필요한 것이 바로 자본, 배짱, 판단력인 것이다.

판을 어떻게 벌이느냐 ?

여불위는
물건을 보고 남다른 감식안으로 그것이 바로 천하에 가장 싼 물건임을 알아 보았고,
전 재산을 기울여 이를 과감히 사들였고,
제 때에 운을 만나 이를 되팔아 거금을 쥐었다.

자 그 과정을 바람난 계집 치마갈기 거머쥐고 앞 개울 덤벙덤벙 건너 홀애비 만날 일념이듯이 바삐 흝자.
여불위가 장사로 조나라 수도인 한단으로 간 적이 있었다.
그곳에서 어떤 인물에 대한 소문을 듣는다.
그 인물이란 진나라가 조나라에 보낸 볼모로서 진나라의 왕자라는 것이다.
그런데 대국의 왕자답지 않게 궁색하게 지내고 있는 것이다.
사정은 이러했다.
당시 진나라는 소왕의 만년으로 차남인 안국군이 태자로 책봉된 상태였다.
안국군에게는 20여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모두 서출이고 왕후인 화양부인에게는 소생이 없었다.
조나라에 가 있는 이 역시 서출이고 이름은 자초라고 했다.
그 많은 서출중에서 하필 자초가 조나라에 볼모로 가게 된 것은
그의 생모인 하희(夏姬)가 천한 신분이었고,
당시 안국군의 총애가 없었기 때문이리라.
그러니 본국으로부터의 뒷바라지도 시원치 않고,
조나라에서도 냉대가 심하니 고초가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전국책에 의하면 여불위는 이런 사정을 알고는 기화가거(奇貨可居)라 중얼거렸다고 한다.
집으로 급히 귀가해서는 부친에게 이리 물었다고 한다.

"논밭을 갈면 벌이가 어느 정도 될까요 ?"
"한 10배 정도 되겠지"
"보석을 매매하면요 ?"
"대략 100배 정도 될까"
"그럼 일국의 왕을 등에 업고 나가면 어떻게 될까요 ?"
"음 그건 어림짐작도 못하겠구나."

여불위는 장사꾼 특유의 후각으로 이게 물건이 될 것으로 생각했다.
더우기 물건 치고는 상당히 싸다 아마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

자초에 접근한 여불위는 이리 제안한다.
“만사는 제게 맡겨 주십시오. 반드시 왕자의 앞길을 열어 드리겠습니다.”
“뜻은 고맙소만 그러나 그보다는 당신의 일이나 걱정하는 것이 어떻소”
“제 말뜻을 모르시겠습니까 ? 왕자의 앞날을 열어 드리는 것이 저의 성공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자초는 비로서 여불위의 뜻을 알아 차리고 깊은 방으로 안내하고 좌우를 물리쳤다.

“노쇠한 지금의 진왕이 세상을 뜨고 안국군이 왕에 오르게 되면 곧 후계자를 정하여야 합니다.
안국군이 화양부인을 총애하고 있지만 생산이 없습니다.
만약 태자를 정할 날이 오게 되면 20여명의 형제분중 큰 형님이나 곁에서 왕을 모시고 있던
다른 왕자들이 훨씬 유리한 위치에 있게 됩니다.”
“옳은 말이오 그래 무슨 좋은 수가 있단 말이오”
“지금 왕자님은 여유가 없으신데다가 볼모의 신분입니다.
이래서는 아버님께 선물도 보내 드릴 수도 없고,
빈객들과의 교제도 여의치 않습니다.
저도 형편이 썩 좋은 것은 아니나,
기왕에 나선 김이니 진나라로 가서 전 재산을 기울여
화양부인과 안국군이 왕자를 후계자로 삼으시도록 공작을 하고 오겠습니다.”
“아무쪼록 잘 부탁드리오. 일이 잘되면 진의 절반을 당신에게 주겠오.”

여불위는 전재산 가운데 오백금을 자초에게 교제비로 주고,
나머지 오백금으로는 진귀한 물건을 사들여 진나라로 향했다.
이리하여 자초 주변엔 이젠 기름이 돌고 형편이 폈다.
진나라 왕자답게 그럴싸한 집을 장만하고 교제를 넓혀가니 아연 평판이 좋아지게 되었다.

어떤 상인이 자신의 전 재산을 걸어 승부를 걸텐가 ?
투자를 하는 것도 어렵지만, 투자를 할 자리인가 아닌가 그 자리를 고르는 것도 쉽지 않다.
선 자리는 늘 부족하고, 앞으로의 일은 가능태로만 존재하니 불확실하기 짝이 없다.
예리한 판단능력도 중요하지만, 이를 기초로 결단을 내림도 범인은 따라오지 못한다.
자본, 배짱, 판단력의 삼자가 아우러지지 않는다면 기회는 없다.

진나라로 온 여불위는 기화 자초를 선전하는데 어떤 계책을 썼을까 ?
화양부인은 정실이지만 소생이 없다.
화양부인의 언니를 끌어들려 화양부인을 만나는데 일단 성공한다.
여불위는 갖은 선물을 선사하며 화양부인을 이리 설득했다.
자초는 총명하고, 지기가 많아 평판도 좋습니다. “나는 화양부인을 진심으로 경모하고 있다.
아버님이나 부인을 생각하면 절로 눈물이 난다.”고 늘 입버릇처럼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자란 늙고 자색이 쇠하면 바깥양반으로부터의 사랑도 식습니다.
지금 안국군으로부터 총애를 받고 계시지만 유감스럽게도 소생이 없습니다.
서출이 많으니 그중 효성이 두터운 이를 양자로 삼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
그렇게 되면 태자의 생전은 물론 만일의 일이 있어도 양자께서 왕위에 오르시니
부인도 나중에 신세가 고단해지지 않게 됩니다.”
화양부인의 마음은 크게 흔들렸다.
화양부인은 자초를 기회있을 때마다 효성이 지극한 인물로 그리고 총명하며,
그와 교제하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자초를 칭찬하고 있는가를 안국군의 귀에 불어넣었다.
어느날 화양부인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하소연했다.
“나는 다행스럽게 당신의 사랑을 받고 있지만 소생이 없습니다. 제발 부탁입니다.
자초를 양자로 삼아 나의 장래를 의탁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총애하는 부인의 소원이니 안군군으로서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여인네는 눈물로 말한다.
사내는 땀방울로 말한다.

땀방울이 귀하다고 여긴다면 함부로 그에 눈물을 섞지 마라.
땀방울에 눈물이 섞이는 순간 농도가 떨어지고 말리.
그러니 눈물은 섞는 것이 아니라 다만 닦아주는데 그쳐야 할 노릇이다.

여불위는 화양부인의 약점을 지렛대로 바윗돌을 들어 올려 언덕 아래로 굴러 내리는데 성공했다.
이제 꾸민 일은 제 스스로의 추동력을 갖고 세를 불리며 나아가게 되는 것.
이렇게 하여 공작을 일단 발진 시킨 후 여불위는 다시 조나라로 돌아왔다.
당시 진나라는 범수의 원교근공정책을 채택하여 적극적으로 동방경략에 나서고 있었다.
기원전 257년 진나라가 조나라의 한단을 포위한 사건이 일어났다.
갑자기 처지가 급박해진 자초는 여불위와 상의하여
감시역에게 황금 6백금을 뿌리고 조나라를 탈출하여 진나라로 도망쳤다.
그로부터 6년후 진의 소왕이 세상을 떠났다.
이어 태자인 안국군이 즉위하여 효문왕이 되었고 화양부인은 왕후가 되고 자초는 태자로 책봉되었다.
여기서 여불위가 재수가 좋았던 것은 효문왕이 즉위한지 불과 사흘만에 죽은 것이다.
그 뒤를 이은 것은 말할 것도 없이 태자인 자초다.

이를 장양왕이라 한다.
즉위하자마자 장양왕은 여불위를 승상에 임명하고 문신후로 봉한 다음 낙양 10만호를 영지로 주었다.
10년전 한단에서 우연히 찾아낸 기화(奇貨)가 지금 비싼 값이 매겨진 것이다.
그런데 이 장양왕도 불과 3년만에 죽고 아직 어린 태자인 정(政)이 즉위했다.
행운이 짝으로 찾아 온 것이다.
이가 후일 시황제이다. 정은 여불위를 승상 위에 상국이란 벼슬을 만들어 그 자리에 앉도록 했다.
바야흐로 여불위는 신하로서는 최고의 지위에 오르게 된 것이다.

운도 실력이라고 누가 말하였는가 ?
그런가 ?
기회를 만들어내는 것은 실력이지만,
운까지 제 짝으로 굽혀 오게 하는 것은 스스로는 어쩔 수 없는 천명이다.

그런데 진왕 정과 여불위는 부자간이라고 사기는 시사하고 있다.
사연은 이렇다.
여불위가 한단에서 자초의 후견인으로 자처할 때,
한단의 무희중에서 용모가 단정하고 춤 잘 추는 여자를 낙적시켜 함께 살고 있었다.
여자는 여불위의 아이를 잉태하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날 여불위는 자초를 위한 연회를 베풀었다. 자초는 한눈에 이 여자에게 반했다.
자초는 여불위에게 이 여자를 양보해달라고 부탁한다. 천하의 여불위지만 울컥 화가 솟는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니 전 재산을 던져 일생을 자초에게 건 처지가 아닌가,
큰일을 앞 두고 소사를 돌볼 수는 없는 것.
마음을 돌려 여불위는 그 여자를 자초에게 양보한다.
여자가 잉태한 사실을 감추고 자초에게로 가서 정을 낳았다.
그리고 후에 그 여자가 자초의 정부인이 되었다.
사기의 이 기술이 사실이라면 정 즉 시황제는 실인즉 여불위의 아들이라는 얘기다.

진왕 정은 즉위했을 때 13세에 불과했다.
그러니 상국인 여불위가 권력을 제 멋대로 휘두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정이 자기의 친 아들이라면 더욱 거칠 것이 없었을 것이다.
집안에 부리는 하인이 만명, 식객이 3천을 헤아렸다 한다.

권세가 하늘을 넘보았지만 여불위가 제대로 된 정치적 실적을 낸 것은 없는 것같다.
다만 도교와 신선술에 깊이 빠졌던 여불위가 문화적으로는 한가지 업적을 남겼다.
여씨춘추(呂氏春秋)라는 잡학전서의 편찬이다.
3천을 헤아린다는 식객을 시켜 각자가 견문한 바를 적게 한 것이라 하는데,
사마천도 제법 평가를 한 수작(秀作)이다.

이 책이 완성되었을 때,
“이 책의 내용에 대해 한 자라도 정정할 수 있는 사람에겐 천금을 증정한다.”
라고 포상금을 걸었다 한다.
있는 권세를 다 부려 만든 책이니 그리 녹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하자가 있은들 그 권세에 대항하여 누구인들 잘못을 지적하리.
일자천금(一字千金)은 커녕 잘못하다가는 하나밖에 없는 목이 달아날지도 모른다.

자초가 죽자 미망인이 된, 즉 예전 한단의 그 미희와 여불위는 관계를 맺고 밀통을 거듭한다.
정이 어릴 적에는 그래도 괜찮았다. 장성해도 태후의 음란은 그칠 줄을 몰랐다.
이문 계산의 달인 여불위는 안절부절했다. 태후와의 관계가 탄로나면 일신의 안위가 염려스럽다.
그래서 대물 소유인 노애(嫪毐)라는 이를 자기 대신 추천하였다.

노(嫪) : 사모할 노, 시기할 노
애(毐) : 음란할 애

자의가 이러하니 아무래도 노애란 진짜 이름은 아닌 것같다.
태후는 이 자에 흠뻑 빠져 그의 아이를 잉태하게 되었다.
이쯤되면 탄로가 나는 것은 시간 문제다. 결국 밀고하는 자가 나타났다.
정은 노애 일가족을 몰살시키고, 태후가 나은 두자식도 죽여 버렸다.
태후는 옛도읍인 옹으로 옮겨졌다.

정은 애초에 여불위도 죽이려고 하였으나,
선군에 대한 공적이 큰데다 주위의 빈객, 세객들이 대부분 그를 변호했기 때문에
미루다가 이듬해 상국의 직에서 해임하고 영지인 낙양에 칩거하도록 명령했다.

지금 세태와 그다지 다르지 않다.
죄를 지어도, 그동안 경제발전에 지대한 공이 있다라든가,
죄를 사하고 경제발전에 매진하게 하도록 하는 것이 그들을 진정 속죄하게 하는 것이라는 등.
그동안 그로부터 단물 빨아먹던 치들이 변죽을 올리며 거들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일부에서 이를 두고 논하길,
변호하는 이들의 다수를 거론하며 그의 명성이 그리 허황된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반드시 옳다고만 할 수 없다.

이렇게 1년이 흘렀으나 여불위의 명성은 여전히 식을 줄을 몰랐다.
제후의 빈객이나 사자는 그를 만나려고 길에서 장사진을 치는 형편이었다.
여불위의 반란을 두려워 한 정은 다음과 같은 친서를 보냈다.

“다시 조사를 시켰본즉 그대는 진나라에 아무런 공적이 없음이 밝혀졌다.
즉시 일족을 거느리고 촉으로 옮겨가 살도록 하라.”

여불위는 이제는 끝장이 왔다고 생각하고 망설임없이 짐독(鴆毒)을 마시고 죽었다 한다.
당시 촉은 오지 중에 오지로, 이리 간다는 것은 유배와 다름이 없다.
유배의 끝은 ?
결국은 시간이 지나면 또 다른 구실로 더 비참한 죽임을 당할 것은 불문가지다.
여불위로서는 자결하는 것이 차라리 현명하였을런지도 모른다.
마지막에 이르러서도 그의 결단은 빠르다.

태사공은 공자(孔子)가 말한 바 있는
‘명성만 있고 실속이 없는 자’가 바로 여불위였던가?‘라고 말하고 있다.
진 천하통일의 당사자 정, 곧 시황제의 부친일지도 모르며,
시황제의 아버지 곧 자초를 자갈밭에서 건져 올려 천하를 안겨준 결정적인 공로자인 여불위.
그 자는 과연 명성만 얻고 실속은 없었는가 ?
명성만 있고 실속이 없는 자가 아니라 필자가 생각하기엔 비록 말년 태후와의 밀통으로 체면은 깎였지만,
천하를 건 건곤일척의 승부를 멋지게 성공시키고,
일생을 호의호식하면 살았으니 실인즉 실속은 있는대로 챙긴게 아닌가 ?
한편 이리 생각해 볼수도 있지 않은가 싶다.

본시 주판은 닳아 없어질 때까지 장궤(掌櫃-점주)의 손을 떠나지 않는다.
이게 무엇인가 ?
상인은 이를 다투는데 그침이 없다라는 말이다.
여불위가 조금 더 현명하였다면, 영화가 최고에 이르렀을 때 주판을 손에서 내려 놓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역시 장궤의 본 성품을 여의지 못했다.
이게 그의 말년 비극의 단초가 되었다.

정치의 자리에 이르러서도 변신을 하지 못하고 상인 시절의 주판을 끼고 살다
결국은 비참한 최후를 자초했다.
반면 범려는 변신을 거듭할 때마다, 자신을 덜어냈다.
덜어낼 때마다 처신은 가벼워지고 덕은 도타와진다.

노자에
'훌륭하게 행동하는 사함은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善行者無轍跡)'
'훌륭하게 싸우는 사람은 승리하여도 이름이 알려지지 않으며,
자신의 공훈도 말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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