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령(妙齡)
묘령이란 말은 홀로 쓰이지 않고,
‘묘령의 某某’ 따위로 그 뒤에 수식을 받는 말이 달려 붙는 형식으로,
그 쓰임이 거의 굳어져 있다.
예컨대, 일상에서 우리는 ‘묘령의 여인’과 같은 용례를 흔히 접한다.
묘(妙)를 대함에 대개는 ‘교묘하다’, ‘기묘하다’는 뜻을 떠올리곤 하나,
훌륭하다, 좋다라는 뜻을 갖고 있기도 하다.
그러하다면, 령(齡)이 나이를 가리키니,
묘령이라 함은 곧 묘한 나이를 가리킴인가?
무엇인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미묘(美妙)하고, 신기한 구석을 감춘 나이를 말함인가?
나는 생각한다.
그저 ‘좋은 나이’, ‘좋을 때’로 보면 족하지 않은가 하고 말이다.
우리가 젊고 풋풋한 소녀, 소년을 보고는,
“거 참 좋은 시절이다.”라고 말하곤 한다.
바로 그런 정도의 의미로 우선은 봐주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야릇한 뜻을 지레짐작으로 길어 올리려 하기 전에 말이다.
예전 책을 보면, ‘좋다’는 뜻을 표할 때,
그 흔한 ‘좋을 호’ 그 ‘好’자를 그리 사용하지 않았다.
이는 ‘好’란 말이 구어(口語)에선 스스럼없이 사용되었지만,
문어(文語)에선 구어를 하시(下視)하여 꺼리는 까닭이다.
대신, 妙, 奇, 奇妙, 宜, 善 등의 글자가 많이 등장한다.
예컨대,
선재(善哉)!란 말은,
‘착하도다!’ 이리 새겨서 좋을 때도 있지만,
‘좋구나! 라고 단순히 새김 하여 그 뿐일 경우가 외려 많다.
이 말은 불경에도 자주 등장하는데,
哉는 어조사(語助辭)인고로 그저 감탄의 느낌을 보태고 있을 뿐이다.
이런 것을 ‘호재(好哉)!’라고 하지 않았음은,
역시나 이를 사뭇 속되게 여겼기 때문이리라.
묘령 곁에 방년(芳年)이란 말도 놓치지 말고 새겨 두어야 하리라,
이 역시 묘령과 같이 한참 때인 20세 전후의 꽃다운 나이를 가리킨다.
그런데, 이들 말들은 요즘엔 여자만을 상대로 쓰인다.
방년이라 할 때는 꽃에 비겼으니 그럴 만하지만,
묘령의 경우에는 원래 남녀 구별 없이 사용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묘령의 사내 녀석’이란 요즘 감각으로는 사뭇 어색하다.
대신 이런 표현법이 있으니 여기 적어두고 음미해 두고자 한다.
妙人 : 年少風流的男子
妙年 : 少壯之年
妙身 : 幼年之身
나는 앞에서 묘령이란 말을 그저 ‘좋은 나이’ 정도로만 새겨 두자고,
짐짓 세태(世態)를 거슬러 경계의 말을 하고 있는 셈인데, 그렇다한들,
예컨대, ‘묘령의 처자’라고 지칭할 때,
거기 풍겨 오는 감각은 그저 좋다라는 정도로 그치기에는,
사뭇 아쉬움을 느끼는 이가 적지 않을까 싶다.
하여, 말을 조금 더 보태본다.
지난 주말,
이웃 밭에 홀연히 나타난 처자를 두고,
나중에 이웃과 함께 자리를 나누어 앉은 시각,
‘묘령의 여인’이라고 지칭하였음이라.
그 여인을 미리 알고 있든 아니든 간에,
그 순간,
‘묘령의 여인’이란 그 말 자체가 주는 어감에 끌려,
분홍빛 설렘이 뭇 사내 가슴을 은은히 지나고 있었을까나?
알 수 없는 기대와 비밀스런 흥분이 혈관을 자르르 흔들고 지나기라도 하였음인가?
노자의 글,
常無欲以觀其妙.
왕필은 여기 妙자를 풀어 이리 주석했다.
“妙者, 微之極也。”
그 풀이인즉,
묘(妙)자란 지극히 작고 작은 것을 일컫는다 하였음이니,
이는 곧 그가 사물의 궁극에 이르른 미묘한 도리, 극미의 이치를 이야기 하고 있음이다.
아마도 그러하기에 ‘계집 녀’ 변에 ‘적을 소’를 보태 글자를 만들었으리라.
계집(女)은 곡신(谷神) 곧 우주만물을 포태하고 생성하는 바를 상징하고 있다.
거기 보탠 少란 극미의 세계,
즉 비밀스런 깊고 깊은 오의(奧義)를 함장(含藏)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이를 묘하다고 이르는 것이다.
때문에 ‘묘령’을 20세 전후의 계집을 두고 이른다면,
일견 그럴 듯 하기도 하다.
춘색(春色) 어린 계집이란 얼마나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있음인가 말이다.
생명을 잉태하고, 온갖 인간 세상을 지어낼 재주를 지니고 있으니,
그 어린 계집의 품덕(品德)을 어찌 묘하다 하지 않을 손가?
반면 늙은 여자란,
늙은 사내도 마찬가지지만,
뭣이 새롭고 기이하겠음인가?
분홍 부끄러움도 다 져버리고,
푸른 염치도 모조리 팽개치고,
그저 한참 잿빛으로 시들어가는 몸뚱이 하나 아껴,
시뻘건 욕심이 하늘가로 사무치는 추한 몰골들하고 어찌 비교인들 할 수 있으랴.
그런데,
妙자를 두고,
그리 미묘하다고 놀라 경탄하는 것도 탓할 바 없다 하겠으나,
그저 ‘좋다’라고 담백하니 말하는 나의 뜻은 또 어찌 나쁠 게 있으랴.
놀라기만 하면 대수랴,
태연하지 않고서야 어찌 그윽하니 그 밑바닥에 숨은 비밀에 이르를 수 있으랴.
그러하니, 妙란 놀라움(驚異)과 함께 그저 담담(淡淡)함을 함께 아우르고 있음이다.
운문(雲門) 스님의 일일호시일(日日是好日)에서 뜻하는 바,
호일(好日)도 역시 하루하루의 경이로움과 평범함을 두루 포섭(包攝)하고 있다.
노태우 정권 당시,
‘보통 사람’論이란 얼마나 가소롭고 우스운가 말이다.
그저 평범하니 장삼이사를 뜻하는 보통 사람이란 아무런 매력이 없다.
사람은 개개(箇箇)가 모두 특별한 것임이라,
그러하기에 낱낱이 귀하고 중한 것이지,
모두 하나같이 보통 수준이라면 무엇이 귀하고 무거우랴.
모두들 妙해야 하고, 그리 대접받는 세상이 귀하다.
나는 그런 세상을 감히 꿈꾸어 본다.
이 때라야 정히 妙하다 할 수 있음이다.
노태우의 ‘보통 사람’론이란 그래서 엉터리, 가짜, 혹세무민,
그리고 천박한 선전술에 다름 아닌 것임을 알아야 한다.
운문(雲門)은 바로 이런 경지를 노래하였음이다.
즉, 호일(好日)의 특별함과 일일(日日)의 평범함을 한데 아울렀음이다.
그러한 것을 그저 일일(日日)에 눈을 옭아 매어두면,
바로 염라지옥에 떨어지고 만다.
노태우처럼 ‘보통 사람’을 위한다는 선전술은,
곧 그가 국민을 보통 사람으로 대하겠다는 속셈에 다름 아니다.
그가 진정 국민을 아낀다면,
‘특별 사람’론을 펴야 옳았다.
모든 사람들이 특별한 사람인 그런 세상이어야,
비로소 일일호시일(日日是好日)인 경계로 들어간다.
매일 매일 특별하기에 호일(好日), 즉 묘일(妙日)인 것이지,
범상(凡常)한 것을 기려 호일(好日)이라 하였겠는가?
운문이 그러할 이도 없지만, 만에 하나 그러하였다면,
내게 귀싸대기 삼방(三棒)을 맞고도 모자람이 있으리라.
이것은 그러하니 이젠 그만 놔두고,
다시 돌아가 글을 맺자.
옛 글에 이리 하였음이다.
含精于內,外無飾姿。
정(精)은 곧 정수(精髓)이니,
이를 안에 머금고,
밖으로는 아무런 꾸밈이 없어야,
비로소 마땅히 묘인(妙人)이라 이를 수 있음이다.
그러하니,
어찌 묘령을 굳이 20세 전후에 한정할 까닭이 있으랴,
八十 노인이라 한들 묘인(妙人)이 없으랴.
‘좋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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