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우(杞憂)
기우의 고사는 너무 널리 알려진 얘기라 새삼 주제거리도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출전인 열자(列子)에서 전하는 이야기 전체가 대중에게
온전히 소개되지 않았기에 조금 오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침, 앞선 제 글 “어둠의 계조”의 ooo님과의 댓글들로 인해 인연이 닿으니,
이에 대하여 간단히 기술해봅니다.
(※ 참고 글 : ☞ 2008/02/15 - [소요유/묵은 글] - 어둠의 계조(階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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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조의 흥망성쇠를 보면, 두가지 형식에 의해 왕조가 교체됩니다.
선양(禪讓)과 방벌(放伐)이 그것입니다.
선양이란 것이 말은 점잖습니다만,
이게 하왕조이후 제대로 기능한 적은 없습니다.
삼국지에 보면 후한에서 위로 선양이 됩니다만,
실인즉 이게 무늬만 그렇지 따지고 보면 방벌에 다름 아닙니다.
선양이 되었든, 방벌이 되었든 멸망한 왕손들은 어떻게 처리되었을까요 ?
아예 씨를 말리는 것은 후대로 내려올수록 심해집니다만,
고대엔 그들에게 조그만 땅을 내주고 조상의 제사를 이어갈 수 있도록
조치해주는게 상례였습니다.
이게 그들이 후덕한 측면도 있습니다만, 그보다는 후환이 두려웠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즉 제사를 받지 못하면, 원령이 재앙을 내릴 것을 꺼려했던 것이지요.
주무왕이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그 마지막 왕 주(紂)의 아들 무경을 내세워
조상을 봉사할 수 있도록 조치합니다.
후에 모반을 일으켜 주살 당하지만, 대신 미자계를 송(宋)나라로 봉하여
그 뒤를 잇게 합니다.
그런데, 이 은(殷)은 실은 국호가 상(商)나라였지요.
우리가 상업(商業)이라고 하는 商은 이로부터 유래가 된 것입니다.
즉 망한 나라 상나라 사람들이 생업을 꿰한 것이 지금 부르는 상업활동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척박한 농토로서는 제대로 살아가기 힘들었기에
상업에 전념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상업이라 이를 때는, 망한 상나라 사람들이 구차스럽게 살아가는 생업의 형태라는
업심여김이 깔려 있는 것입니다.
거슬러 올라가 은나라 역시 앞선 하(夏)를 갈아 치운 것인데,
주나라 때 그 하나라 유민들에게 주어진 나라가 기(杞)였습니다.
지금 애기하려는 기우(杞憂) 역시 대단히 어리석은 사람에 관한 이야기인데,
이 또한 망한 나라 杞를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이리 보았을 때, 망국인을 들어 모두 악역 노릇을 시키고 있는 것이지요.
현대에도 특정 국가, 특정 지역을 합당한 이유없이 폄하하는 억지가 여전하듯이
당시 망국지인의 설움과 한 역시 읽혀지지 않는지요 ?
기우(杞憂),
송양지인(宋襄之仁), 수주대토(守株待兎), 발묘조장(拔苗助長) or 알묘조장(揠苗助長)의 고사에서 보듯이,
그 주인공들이 하나같이 망국지인들이니,
모두 이리 풀잎 쓸리듯 업신여겨지고 있었음이 여실합니다.
자, 이제 비로소 기우 이야기를 살펴봅니다.
기나라에 어떤 사람이 하늘과 땅이 무너질 것을 걱정하여 제 몸을 돌보지 못할 지경이었습니다.
이에 이를 걱정한 한 사람이 그에게 가서 말합니다.
“하늘은 기운이 쌓여 있는 것이니 무너져 떨어질 걱정이 없소.”
“하늘이 과연 기가 쌓인 것이라면, 해와 달과 별들이 떨어지기 마련 아니오 ?”
“그것 역시 기운이 쌓인 것이며, 설혹 떨어진들 맞아서 다칠 일이 없소.”
“땅이 무너지는 것은 어찌 합니까 ?”
“땅이란 흙덩이가 쌓인 것으로, 사방 빈곳에 꽉 차서 없는 곳이 없소. 하니 걱정할 바가 없소”
이 때, 그 사람은 비로소 시원한듯이 크게 기뻐했고,
그를 깨우치려는 사람 역시 크게 기뻐했다 합니다.
보통은 이 정도까지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그 다음 이야기들이 중요합니다.
장려자(長慮子)가 그 이야기를 듣고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무지개, 구름과 안개, 비바람 등은 기(氣)가 쌓여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현상이다.
산, 강, 바다, 쇠와 돌 등은 형체가 모여 땅에서 이루어진 덩어리이다.
기가 모이는 것을 안다면 덩어리가 모인 것을 알 것이니,
세상의 어느 것이 덩어리가 아니겠는가.
천지라는 것은 존재하는 것 중에 가장 큰 것인지라 그 종말을 예측할 수 없다.
무너질 것이라고 걱정한 사람은 너무 먼 미래의 일을 걱정한 것이고,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며 달랬던 사람도 옳은 것은 아니다.
천지가 무너지지 않는 본질을 갖추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결국은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이 무너질 때가 된다면 어찌 걱정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
주인공이 이 장려자의 말을 들었다면,
그는 다시 전전긍긍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이제 열자가 이 말을 듣고는 웃으면서 말합니다.
“하늘과 땅이 무너질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잘못이지만,
하늘과 땅이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역시 잘못이다.
무너질지 무너지지 않을는지는 우리로서는 알 수가 없는 일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저리돼도 한가지요. 이리돼도 한가지인 것이다.
그러므로 출생할 때에는 죽음을 알지 못하고,
죽을 때에는 출생을 알지 못하며, 올 때에는 가는 것을 알지 못하고,
갈 때에는 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무너지고 아니 무너지는 데 대하여 내 어찌 마음을 담아 두겠는가 ?”
이 열자의 태도에 이르러서는 ooo님의 화두인 주,객이 분리되지 않고 있습니다.
즉 열자가 갖는 生.死.去.來를 알지 못하겠노라 하는 회의는 不知를 고백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生.死.去.來로 나눌 수 없다라는 언표로 해석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렇듯, 거기엔 관객과 연출자로 이분되는 질문이 원천적으로 발생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우주를 창조한 신과 피조물간의 대립을 고민할 까닭도 없습니다.
이게 노장철학의 무위자연(無爲自然) 철학의 본질이 아닐런지요 ?
自然, 제 홀로 스스로 생성하고, 변화하는 것일 뿐인 것이지요.
때문에 ooo님이 들고 계신 화두인 “분리의식”은
서양철학적 전통으로서는 잘게 부수어 정밀하게 해석되어질 수는 있겠지만,
새로운 전망을 일구워내기에는 어렵지 않은가 이리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부처 역시, 윤회를 말함으로서 주객을 완전히 피해가지는 않습니다.
부처가 드라비다족 출신이란 설이 유력하지만,
역시 아리안족 또는 그 영향권하에 놓여 있지 않은가 하는 의심을 빗겨가기
어려운 대목 중 하나가 이 부분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즉 윤회를 말하는 순간 윤회의 주체가 누구인가라는 문제에
봉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순간 주, 객은 분리되고 맙니다.
물론 윤회설과 무아설등의 해석과 규명에 대립이 있습니다만,
동양철학의 전통에 비해서는 불교는 서양쪽 냄새가 조금 배어 있지 않은가 싶군요.
노자의 제자이며, 장자의 선배라는 열자의 “기우”를 빌어,
전번 글의 의론들을 조금 더 연장해보았습니다.
사실 오늘의 얘기는 별도로 충분히 다루워야 할 주제이지만,
제가 잘 알지도 못하고, 시간도 충분치 않아 그저 전 글의 가벼운 보충에 그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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