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어둠의 계조(階調)

소요유/묵은 글 : 2008. 2. 15. 15:13


삼라만상은 빛을 받아 외부로 투사(投射) 또는 투과(透過)해냅니다.
이 때 우리 시신경은 이에 반응하여 색감을 지각(知覺)합니다.

물체의 고유 물성(物性)에 따라 빛을 흡수하고 반사하는 정도가 결정되지만,
광원(光源)의 색상과 밝기는 끊임없이 변하므로,
자연계에서 물체의 색깔은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물체의 색깔은 물성이 갖는 고유의 주체성(intrinsic subjectivity)보다
피동성이 상당히 강하다는데 주목합니다.
예컨대, 광원을 없애버리면, 어떤 물체도 자신의 색깔을 드러낼 수 없음만 보아도,
색깔이라는 게 유동적이고, 피상적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눈 앞에 보이는 산 빛도 아침나절이 다르고 저녁나절이 다릅니다.
어제도 다르고 오늘도 다릅니다.
게다가, 관찰자의 심리적 상태에 따라서도 달라집니다.

도시는 빛이 사그러지자마자,
두렵다는듯이 온갖 조명등을 다투어 내다겁니다.
점포들은 부나방 꾀어내듯 네온사인으로 행객을 유인합니다.
홍등가의 불빛은 핑크빛으로 젖어 육욕(肉慾)을 정액처럼 흘립니다.

도시의 삶이란 향일성(向日性) 식물처럼 해바라기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밤이 되면 잃어버린 태양을,
인공적인 조명으로 보상받으려고 모두 분주합니다.
산란계(産卵鷄)로부터 달걀을 많이 뽑아내기 위해서
양계장 주인은 닭장속에 불 밝혀, 밤의 부랄을 발라(剔) 어둠을 쫓아냅니다.
도시 사람들은 스스로 산란계가 되고져,
저마다 손에 손에 불 밝혀, 기꺼이 온 도시를 意志의 닭장으로 만듭니다.
그 때라서야, 욕망의 금화(金貨)가 달걀처럼 하루 꼬박 두 자루씩 불려 쏟아집니다.

어느 날 서라벌에 해가 둘이 나타났습니다.
이에 경덕왕은 월명(月明)을 청합니다.
그가 산화(散花)하며 도솔가를 지어 바치니 괴변이 없어졌다지요.
맙소사, 월명이 서울 바닥에 나타나면 봉변을 당하였으리라.
그로서는 서라벌에 태어난 것이 여간 다행이 아닐손가.
왜 아니 그런가,
저녁에 피어나는 수천 수만의 해를 그인들 어찌 감당하련가 ?

한 밤중, 산에 들면,
삼라만상은 색상(色相)을 여의고,
단지 흑백의 톤(tone)으로만 펼쳐져 있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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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흑백의 gradation을 Aishwarya Rai를 통해 느껴봅시다.)

흑으로부터 백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단계의 명암(明暗)만으로 빚어지는
밤산(夜山)의 풍경은 낮 동안 시달린 감성을 조용히 마중합니다.
이 때 비로소 저 깊숙한 곳에 감추어졌던 본성들이 외려 일깨워집니다.

어둠은 흑백의 계조(階調,gradation)로 그 은밀한 속살을 드러냅니다.
낯의 색상이 갖는 그 현란한 구체성은 외피를 허물어내고
밤의 추상성에 복속됩니다.
낯의 색채를 상실하자마자,
그 보상으로 흑백의 gradient한 세상이 펼쳐지지만,
이는 그저 단순한 흑과 백의 조합이 아닙니다.
구체성을 초월하는, 깊디깊은, 그러나 새로운 세계로의 변신,
그 현현이기에 저는 기꺼이 그리 몸을 던집니다.

하지만, 자의식은 손목아지를 잠긴 물속위로 내밀며 낚시 찌처럼 깔딱입니다.
잡초처럼 의식의 표면 위로 쏘옥 내민 그 흔적들을 낫으로 자르듯 잘라버리고 싶습니다.
그렇지만, 늘 그렇듯이 잘라버리려고 대들면, 벤 잡초처럼 이내 다시 자라 저를 비웃습니다.
이럴 때는 그저 내버려두며 외면하는 것이 외려 숨을 잠재우는 첩경입니다.
잡초까지 포용할 때, 공생과 평화의 안식이 다가옵니다.

어둠은 빛을 씻어내지만(洗色),
소리는 반대로 거두워 옵니다.
낯에 들리는 소리는 하나 하나 개별적인 저마다의 유의미한 아우성일 터지만,
이들 모두를 뭉뚱그리면 커다란 소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 거대한 화이트노이즈(white noise)의 외피 속에 안감긴 아우성들은
저 홀로 각각은 마냥 처절한 사연들이 있겠지만, 외피 덮고 아우러지면,
모두 부질없이 시간의 강으로 떠내려갑니다.

하지만, 정작 밤이 되면, 낮 동안 그 소음에 가리워졌던 의미있는 소리들이 소생합니다.
거대한 정적(black noise) 한가운데,
神의 소리가 그예 들려옵니다.

계곡물 소리가 그렇고,
바람 소리,
밤부엉이 소리,
이파리끼리 부딪히는 소리,
어둠을 사냥하는 괭이 소리,
풀벌레 소리...
낮 동안 숨어 있던 그 소리들의 정체가 발각됩니다.
가만히 마음을 정려처(靜慮處)에 두면,
조각달 웃음소리도,
때로는 그믐달의 신음도 들립니다.

결국, 본원의 소리는 빛과, 그 빛을 향한 사람들(向日族)이 지우고 있음이 아닐런지요 ?
어둠이 몰려와 사람이 발길이 끊어진 자리에
정작 자연의 소리가 깨어납니다.

춘추시대 晉나라에 사광(師曠)이란 악사가 있었습니다.
음악을 좋아했지만, 전심하지 못하는 자신을 탓합니다.
마음이 여러 곳으로 흩어져 하나로 통일하지 못하는 것은
눈으로 너무 많은 것을 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사광은
급기야 쑥에 불을 붙여 눈을 태웠습니다.

그 후, 맹인이 된 사광은 음악의 달인이 됩니다.
이 역시 빛을 버린 어둠 속에서라야 득음(得音)이 可한 이치입니다.
구약에 나오는 이사야 역시 입술을 숯불에 대어 부정함을 사함 받습니다.
눈이든, 입술이든 오관의 자리를 태워냄으로서,
비로소 청정(淸淨)한 소리가 얻어집니다.

영어를 잘 하기 위해, 혓바닥 인대를 끊어내었단 신화가 바로 엊그제 있었습니다.
그들은 감각을 최대한 쥐어짜내어 욕망에 철저히 복무합니다.
하지만, 사광은 외려 오관을 폐(廢)함으로서
천이통(天耳通) 신통(神通)의 경지에 도달합니다.

그런데, 과연 그렇습니까 ?
눈을 태워야 귀가 열립니까 ?
이들의 성공 공식은 지금도 그 신화, 또는 전설처럼 유효한가요 ?
저는 차라리 저 인대 끊는 어미의 마음을 그저 꼭 안아주고 싶기도 합니다.
사광의 지팡이 노릇을 하고 싶어지는 꼭 그만큼.

눈을 태운 순간 사광은 악성(樂聖)이 되고,
인대를 끊는 순간 어미는 악성(惡聲)이 됩니다.
하지만, 그들이 획득한 것은 실인즉 권위와 명성뿐이 아닐런지요 ?
환언하면, 악성이란 명예 또는 오욕은 그들의 외적 행동 양식에 놀란
외부인들의 값싼 외마디 경악일 뿐, 그게 그들 성취의 사다리는 아니란 생각인 것이지요.
그보다는 확인 의식(儀式)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전 사광은 장님이전에도 이미 악성지종(樂聖之種)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 절설근(絶舌筋)의 무리들 역시 전후 변함없이 돌대가리들일 것입니다.

그것이 따라나선 무리들을 위무(慰撫)할런지는 몰라도, 성공을 보장하지는 못합니다.
장님이 된 순간 마음 빛은 여전히 산란되고,
뱀 혓바닥이 된 순간 말더듬짓은 여전한 것을 그 뉘라서 알런가 ?

스님네들은 팔뚝에 연비(燃臂) 자국이 있습니다.
이게 원래 촛불 등으로 팔뚝을 태우는 것이지만,
요즘은 간단히 향불로 따끔 갖다대는 상징의식의 변법으로 흘러버리고 말았습니다.
예전, 달마대사를 찾아 구법한 혜가는 왼쪽 팔을 칼로 잘라 믿음을 표하였습니다만,
지금은 팔뚝을 자르지 않고, 단지 향불로 대신할 정도로 영악해졌습니다.

스님 중엔 손가락을 단지(斷指), 소지(燒指)한 분도 적지 않습니다.
때로는 하나 이상 잘려나간 손을 뵙기도 합니다.
그들 역시 득음을 구한 사광처럼 득도를 간절히 원하고 있음입니다.

마조의 좌선 곁에서 스승 남악회양은 벽돌을 갈며,
깨우침의 벼락을 내립니다.
그렇다면, 저 잘려나간 손가락들은 남악회양 앞에서 무엇이라 변명하여야 할 것인지요 ?
사광의 잃어버린 눈들은 그럼 벽돌이 색경(色鏡)으로 변한 기적이란 말입니까 ?

능엄경에는
“능히 여래의 형상 앞에서
온몸을 등불처럼 태우거나 한 손가락을 태우거나 - (身燃一燈 燒一指節)
이 몸 위에 향심지 하나를 놓고 태우면
내가 말하는 이 사람은
비롯 없는 숙세의 빛을 한순간에 갚아 마치리니”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연비(燃臂)란 벽돌도 색경(色鏡)으로 바꾸는 구극의 비책이란 말씀이 아닐런지요 ?

지금은 이 정도의 의문만 갖고,
다음 이야기를 더 나누어 보도록 합니다.

###

우리가 사는 구체적 현실의 세계는 칼라로 채색되어 있습니다.
반면, 모노크롬(monochrome)의 세계는 충격성과 깊이를 갖습니다.
밤에 다가오는 어둠은, 빛내리는 지상에는 없는 은밀한 유혹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잠드는 사이 그 부재의 틈에 나타났다 사라집니다.
눈의 개폐(開閉)가 아니라,
오직 마음으로 깨어 있는 사람들만이 만나는 아름다운 영혼의 임팩트.

흑백만으로 온 공간을 채운 어둠은 독특한 추상미(抽象美)를 표출합니다.
어둠은 현실을 추상적인 예술의 공간으로 환치합니다.
거미는 밤의 공간 요소요소를 초병처럼 점령합니다.
거기 거미줄 안테나를 세워 생명의 근원 밑바닥에서 날라오는 시그날을 포집합니다.
실체들은 사라지고 그림자가 깊은 음영의 무늬를 드리웁니다.
흑백의 계조(階調)는 심연처럼 깊고 두터운 볼륨을 만들어냅니다.

어둠은 사물들의 일상성을 거세합니다.
이 때 나타난 그림자는 왜곡(distortion), 변형, 확대, 착시(錯視)란 형식을 취하여,
존재들을 애매한 추상성의 나락으로 밀어넣습니다.
해로부터 나온 빛은 달빛으로 되튀고,
사물에 찔끔 묻어 이중으로 추상화됩니다.

칠흑같은 어둠은 한발자국도 더는 나아갈 수없는 철벽입니다.
그 어둠속에 드러난 커다란 바위들은 어렴풋 주변보다 희끄무리 밝아
외려 커다란 동공(洞空)이 됩니다.

어둠이 두려움이 되는 순간,
그 바위들은 유일한 탈출구로 다가옵니다.
마치 풀잎 스치는 뱀 소리를 듣고는 연못으로 급히 뛰어들어가는 청개구리처럼
머리부터 그 뿌연 빛무리 속으로 쓩 자맥질이라도 하고 싶은 충동이 듭니다.

존재의 심연, 어둠은 왜 두려움을 유발하는 것입니까 ?
거기엔 욕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삶의 욕망, 돈에 대한 집착, 그 무엇에 대한 갈구가 무장해제됩니다.
이는 곧 죽음을 의미합니다.
살아 있는 모든 존재는 죽음을 무작정 꺼려합니다.
삶이란 맹목적 의지, 욕망의 지향인 까닭이 아닐런지요 ?
이제 닥친 그 죽음으로부터 도피하여야 합니다.
삶이란 엔진은 달음박질 칠 추동력을 두려움이란 연료를 태워
어둠으로부터 36계 둔주(遁走)합니다.

하지만, 그 죽음, 욕망의 부재,
곧 어둠과의 해후(邂逅)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 몸 안의 세포 하나하나 역시 수시로 바꿔쳐지고 있듯이,
따지고 보면, 죽음은 일상적인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둠과의 해후는 축제처럼 맞이하여야 합니다.
삶은 새벽녘에 다시 회수될 것이 예정되어 있듯이,
아니 저녁녘엔 다시 유보되는 것인즉,
오늘, 어둠과의 조우(遭遇) 역시 영원 가운데의 일상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가지 유의하여야 할 것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현실은 채색강(彩色江) 이편에 속해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저편 흑백강(黑白江)으로 뛰어들어야 한다는 가르침이 제법 그럴듯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
하루종일 태양에 노출된 중생은 달빛 속살을 헤집고 영혼을 뉘입니다.
그 존재의 근원으로서 자궁같은 달빛은 大母인 어둠의 젖꼭지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어둠을 두려워하는만큼 또한 경배합니다.

- 어느 날, 만나뵌 노인 어른이 말씀하십니다.
“작물이 다 자라면, 잡초는 뽑을 게 아니라, 대만 꺽어버려도 족하다.”
“왜 그렇습니까 ? ”
“밤 이슬을 받지 못하면, 기가 쇠하여 절로 힘을 못 쓴다.”
밤 이슬은 어머니의 자애로운 눈물인 것입니다.
밤 이슬은 바로 달의 젖(月乳), 달의 눈물(月淚)이자,
니련선하 강 부처에게 드린 수자타의 낙죽(酪粥)이 아닐런가 싶습니다 -

하지만, 그것만이 답일까요 ?
만약 우리의 현실이 흑백강(黑白江) 이편이라면,
저편 채색강(彩色江)이야말로 우리가 자맥질하여 깊이 뛰어들 세계가 왜 아니 되는지요 ?
그 때라면 애매모호한 어둠을 탈출하여 저 찬란한 광명의 구체성으로 뛰어들어야 할 것입니다.
태양신은 그 때 숭배됩니다.

그러하니, 태양신이든 태음신이든 어느 하나가 최선이라는 질문은 온당치 않습니다.
해도, 달도, 별도 우리는 경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빛 또는 어둠과 일체가 되지 아니한 限에 있어서.

###

마하카라(maha-kala,大時) !
마하카라, 大黑天이라고도 이르는 이 神이 불현듯 생각납니다.
시간의 신. 파괴의 신입니다.
이 신에 기도하려는 사람은 발가벗고 본존을 대하여야 하며, 해골로 탈을 만들어 쓰고,
인골로 단주(單珠)를 만들어 들고, 인육을 태우며, 사람의 피를 이겨서 향을 만들고,
머리를 풀고 임해야 한다고 합니다.

만물의 생명을 뺏는 것은 인도에서는 시(時)라고 합니다.
時앞에서 모든 생명이 사멸한다고 해서 마하카라는 만물.생명의 파괴자라고 합니다.
그런데, 파괴 뒤엔 반드시 생성이 있습니다.
분노 뒤에 생성시복이 있다는 사고방식이 마하카라에도 이어내려
서로 상반되는 면이 있는 신입니다.

어둠과 광명 역시 양면적이 아닌가 싶은 것입니다.

어둠을 명상하는 것만큼,
아파트 딱지 세는 것도 벅찬 과업이니, 이게 곧 명상이 아닌가 싶은 것입니다.

명상을 어둠 속에서만 하겠다고 작정하는 것만큼 우둔한 게 없다는 생각입니다.
만약, 이게 진실로 우매한 것이라면,
마찬가지로, 점포 네온사인이란 우물물 속에서 돈다발을 두레박질하는 명상 역시
우매한 것은 매한가지가 아닐런지요 ?

그러하니, 현명한 사람은 주야에 매이지 않습니다.
행주좌와 어묵동정(行住坐臥 語默動靜)
일월성신(日月星辰) 그 어디에고 구애될 까닭이 없습니다.
어둠의 명상이 있다면, 밝음의 명상 왜 아니 나쁠 텐가요 ?

제가 사는 주변에 사찰도 많고 교회당도 제법 많습니다.
특히 사찰에 대하여는 자연 아는 게 많아졌습니다.
언제 이들에 대하여 쓰고 싶기도 합니다만,
그들에게 폐가 되겠거니 하여, 본격적인 글짓기는 삼가고 있습니다.

다만, 지금 이 자리에서는 한 가지 의문이 있습니다.
새우젓을 먹는 스님네를 어떻게 헤아려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명상하면서, 도 팔면서 아파트 딱지 헤아리는 것 하고,
스님네들이 새우젓 먹는 것.
이 삐리들의 꼭두질을 어찌 독해하여야 할런지요 ?

계율로서의 채식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또 하나의 비린 집착입니다.
물론 저의 경우 채식은 채식 그 자체가 아닌 넘어 겨냥하길 작금의 동물의 고통에 가닿아 있습니다만,
이 역시 언제가 동물들이 인간들의 탐욕스런 착취와 고통에 해방되는 날,
저의 유보된 육식이 다시 행해지길 기원(?)합니다.
원시불교를 보면 부처가 살생을 금하긴 하였어도 무조건 육식을 금하지는 않았습니다.

채식이 비린 집착이라면,
야반삼경에 어둠을 벗합네 하면서 산에 오르면서,
일상에선 버럭버럭 화도 잘 내는 저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

명상이란 것이 있다면,
안온한 마음 자리 하나면 족한 것입니다.
여기서 심오한 무엇을 찾으려는 것만치 명상답지 않은 것은 없습니다.

제 야반삼경 어둠 자리는 그저 단순하게,
달 보고,
물소리 듣고,
바람을 느끼고,
고요히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합니다.
만약 명상을 배우고자 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주야불문하고 이처럼 행복을 느끼는 그 자리외에 더 찾을 일이 없다는 생각입니다.

명상이든 道든 그것을 배워야 한다든가,
특별히 별다른 것이라고 대상화(objectification) 하는 순간,
이미 그것은 명상이 아닙니다.
이 짧은 세상, 외물에 눈을 앗기지 말고
그저 자신에게 집중(concentration)하는 게 저는 더 남는 장사라고 생각합니다.
명상이 곧 집중이라고요 ?
올커니, 그렇다면, 이제 새삼 명상할 필요가 있겠는지요 ?
그러하니 저는 아파트 딱지를 헤아리는 게 남는 장사라고 타이르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소지공양한 후 방광(放光)의 영험스러움을 보이셨다지요.
또 어떤 분은 기도가 익어 치유은사를 입으셨다고 하시더군요.
전 이런 현상들을 믿지도, 믿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만,
다만, 여기 빠지지(溺) 않습니다.
누군가는 스키장 전체를 전세내어 즐겼다고 합니다만,
스키를 즐기지 않는 사람에게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지요 ?

###

소쩍새 우는 밤
온냉자지(溫冷自知) - (* 뜨겁고 차가움을 절로 안다.)
그 울음 앞에,
저의 어둠 속 궤좌(跪坐) 자리에
제 어리석음과 욕망으로 인해, 새우젓 비릿한 냄새가 흐를 때가 있습니다.
그 때엔 부끄러움에 떠밀려 바로 작폐코 하산하여야 합니다.

비릿한 욕망에 쫓겨 하산하여 동네 길로 접어들면,
온축(蘊蓄-마음속에 깊이 쌓아 둠)된 빛,
시뻘건 십자가가 곧장 달려와 저를 열렬히 밤마중합니다.

시뻘건 십자가는 하늘을 향해 곧추 서 있습니다만,
실인즉 지상의 사람들을 겨냥하고 있습니다.
원색의 붉음은 그래서 신성스러움과 동시에 세속적입니다.

개인적으로는 한국 교회들의 십자가 색들이 좀 다양해졌으면 합니다.
이게 예수의 보혈을 의미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都市 밤하늘을 점령하는 그 충혈된 긴장감이,
오색으로 수놓는 사랑의 형식으로 해방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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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모음

bongta :

저는 아인시타인의 상대성원리에서 가장 못 마땅한 것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인고 하니, 빛의 속도가 일정하다는 것이지요.
예컨대 달리는 기차 안에서 밖으로 공을 던지면,
그 공의 속도는 기차 속도 더하기 공의 속도가 됩니다만, 빛의 속도는 가법적이지 않지요.
상대성 원리라고 떡하니 말하고 있지만, 광속만큼은 절대적인 것이지요.
광속이 reference로 요청되고 있는 이상 제겐 이 이론에 붙어 있는 상대성이란
타이틀이 몹시도 불편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명상법식 앞에 붙어 있는 각종 수식어들이 역시 어색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려면 버스를 타든, 기차를 타든 무엇인가를 타고 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게 저는 육체를 가진 자들의 행법(行法)이자, 한계라고 생각합니다.

불립문자라고 하면서도 禪書가 존재하고,
성철스님은 자신은 만권을 읽었으면서도 남 보고는 책을 보지 말라고 이릅니다.
그가 열반송에서 평생 남녀의 무리를 속이길 수미산을 넘는 죄업을 지었다고 하는 고백은
얼마나 처절하도록 솔직하며, 자애가 넘치는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

이 소식을 꿰뚫어야 하겠지만,
우중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한 곳을 신주단지 모시듯 섬겨 이내 익사하고 맙니다.
그러하기에 저는 매도한(賣道漢)을 도적, 사기꾼보다 더 혐오합니다.

상대성이론에서 광속에 의존하지 않으려면, 神仙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중력에 속박되지 않고 구름을 부리며 하늘을 나는 경지에 도달하여야겠지요.

자연이든 신이든 관계를 맺어감으로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한다는 말씀하셨는데,
그 신조차 인간이 창조한 것이라면 그 때 맺어지는 세계라는 것은 새롭다기보다는
중중무진의 인드라망, 만다라의 세계 같은 게 아닐까 싶습니다.

하지만, 신이 진짜 있다면 말씀대로 신이 인간에게 의존적이어야 할 까닭은 없지 않을까요 ?
다만, 의존적이라고 해석할 수 있으려면, 신의 일방적인 선택의지(인간을 향한)이거나,
인간의 소망(向神所求的)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이 신도 기독교의 유일무이의 절대신이 아닌 힌두교의 다양한 신격들이라면,
그들 신까지 포함하여 만다라에 포섭되고 맙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주객의식을 여위고, 그저 그 만다라 속을 여행하는 客이자,
그냥 그것으로 유유자적할 따름입니다.

ooo님이 말씀하신 내용들이 참으로 가슴에 와 닿습니다.
이에 마침 생각나는 기우(杞憂)에 대한 고사가 생각납니다.
이게 列子에 나오는 얘기인데, 지금 이 자리의 소론들에 참고가 될까 싶습니다.
며칠 안에 정식으로 글을 하나 지어 올려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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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요유/묵은 글 : 2008. 2. 15. 15: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