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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망초(自註)

생명 : 2009. 7. 13. 13:12


저의 '개망초'란 글이 이번에 동물보호잡지 '숨'에 게재되었습니다.
편집과정 중에 원래의 글에 저의 주석이 덧붙여졌습니다.
하여, 여기 새로 그 글을 옮겨 싣습니다.

'숨' 소개
동물보호와 생명권에 대한 내용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잡지 <숨>.
<숨>은 동물보호시민단체 KARA(Korea Animal Rights Advocates, http://www.withanimal.net)에서 ‘더불어숨’이라는 출판사를 만들고 펴낸 무크지입니다. 생명체 간에 올바른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따뜻한 세상 만들기를 소망하는 마음을 담아 출간하게 된 <숨>은 인권을 넘어선 생명권에 대한 인식을 시민사회에 전파하고, 이 세상에 동물들을 위한 당당한 목소리를 내려고 합니다.  http://cafe.naver.com/mzsoom 


***

[주석이 더 재밌는 수필]

개망초

개망초는 사람들이 떠난 자리에서 꽃을 피운다. 사람들의 마음이 떠나버린 땅에서 흐드러지게 꽃을 피운다. 천지를 하얗게 뒤덮은 개망초꽃을 보면서 푸근하지만은 않은 것은 떠난 자리에 피기 때문인가 보다. 올해 온 천지를 하얗게 지천으로 피어난 개망초꽃은 무엇으로 피었을까? 소망일까, 한일까, 원망일까, 절망일까. 아니, 누군가의 절규일까.

- 이병주[각주:1]의 수필 “개망초 꽃 피는 이유” 중에서


제 집 앞뒤로 산이 있습니다. 저는 큰 산을 앞산이라 하고, 작은 산을 뒷산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집을 중심으로 그 앞에 있는 것을 앞산, 뒤에 있는 것을 뒷산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들이 서로 어긋나므로, 제 말 역시 부르는 당시의 기분에 따라 앞산이 뒷산이 되고 뒷산이 앞산이 되는 둥 마구 섞입니다.

뭐 그게 대수겠습니까? 나이조차 잊고 사는 처지에 앞산이든 뒷산이든 튀어나오는 대로 말 할 뿐입니다. 작은 산, 이를 그냥 오늘은 뒷산으로 부르겠습니다. 그 산자락 사이에 접힌 얘기를 하고자 합니다. 그 길에 드는 입구에 피어난 개망초[각주:2]가 지면 제 사연 하마 따라 질까, 가만히 글 자락을 펴봅니다.

산에 버려진 개들과 인연을 지었습니다. 3년래 3마리 그들을 차례로 잃었습니다. 얼마 전 6월초 마지막 한 마리 그 역시 떠나갔습니다. 지난겨울 모진 바람을 이겨낸 그였기에 이번 여름만큼은 무사히 넘기겠지 하였는데, 그는 뭣이 바쁜지 사라졌습니다.

지난겨울 수차 집에 들여 언 몸 녹여 재워 보내곤 하였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온 거실을 한강으로 만들어 놓았지만, 허허 웃으며 얼음 지치듯 걸레 스케이트 질을 씽씽, 낑낑 해대었습니다. 매일 산을 오르며 먹이를 주어왔습니다. 술이 떡이 되어도, 산을 오르며 자빠지고 넘어지더라도 먹이 주기를 거르지는 않았습니다.

겨우내 간벌로 버려진 잣나무 가지를 주어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 집도 지어주었습니다. 올 봄엔 재료를 낑낑거리며 산에 져 날라, 정식으로 의젓한 개집도 보름 걸려 지어 주었습니다. 이젠 아무 걱정도 없을 것 같았습니다.

주변에 흔히 보듯 하루 종일 짧은 줄에 묶여 있는 개들보다는 그래도 그가 행복할 거라는 자위도 해보았습니다. 길 가며, 눈 맞추던 이웃집 커다란 백구, 그리고 그의 아이들이 사라져 버린 날, 이웃 아주머니는 그들이 오토바이 닭장 철망에 갇혀 길을 떠났다고 일러줍니다.

그 백구와 둘만이 마주할 때,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여차직 낌새가 이상하면 산으로 냅다 튀어 달아나거라. 그러면 뒷일은 내가 챙겨줄 터이니, 네 새끼까지 데리고 함께 산으로 토껴라... 이 얼마나 허망한 타이름인가? 이 무력한 위선 앞에 나는 내게 분노한다...

도도처처(到到處處) 지옥이다.
인간세는 동물의 지옥이다.

고독지옥 재산간광야수하공중등(孤獨地獄 在山間曠野樹下空中等)...
삶은 섬이다. 홀로 갇힌 지옥. 그래 또한 고독은 철저히 혼자다.

저들은 절대고독(絶對孤獨)을 안다.
어떤 놈이 감히 명상을, 도를 팔겠다고 수작을 부린단 말인가?
산에 버려진 강아지들은 절대고독을 365×24×60분, 온 몸으로 체현하고 있음이다.

무애가를 부르며 저자거리를 누빈 원효가 언제 명상을, 도를 팔았던가?
자루 없는 도끼 빌리자 이내 설총을 까흘려내었음이니[각주:3],
여느 필부필녀와 다름이 없었음이라.

원효는 호리병에 곡차 넣고 그저 세상을 휘저으며 내달았을 뿐이다.
도판승(道販僧)[각주:4]은 호리병박에 금박칠하고,
패셔너블(fashionable)한 판수쿨라(분소의, 糞掃衣)[각주:5] 줄 다려 입고,
세상을 호리고 있음이다.

원래 판수쿨라는 불에 타고, 쥐가 쏠고, 여인들 월경한 천 등으로 만든다.
온갖 더럽고 천(賤)한[각주:6] 것으로 기워 만든 옷.
이리 시체 싸맨 옷 속에서 집착을 여의고 말겠다는 곡진한 영혼의 선언명령인 게다.

절대(絶對)란 무엇인가?
대(對)를 끊어 절벽으로 가르고 있다는 말이다.
소대(所對)를 여윈 능대(能對)[각주:7]. 상대(相對)를 떠난 순수 주관의 자리,
너를 버리고 나를 가는[각주:8] 것.
만약 영원이 있다면, 만약 신이 있다면, 이 때라야 비로소 영원을, 신을 만난다.

나는 이를 절대라고 생각한다.
때문에 고독은 절대고독(絶對孤獨)일 수밖에 없다.

산에 올라 그의 이름을 부르면, 환한 모습으로 제게 달려 나옵니다. 마치 요술쟁이처럼 숲 속에 있다가 펑 하고 튀어나옵니다. 세상에 그 누가 있어, 나를 이리 전폭적으로 신뢰하며 웃음을 던져 주겠습니까? 그가 나를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실은 그가 내겐 지고지순 기쁨의 원천이었습니다.

올 봄 개나리가 그리 아름답다는 것도 그가 저에게 가르쳐주었습니다. 절.대.고.독이 무엇인지도 그가 제게 가르쳐주었습니다. 떠날 때는 말없이 사라져야 한다는 가르침도 그한테 배웠습니다.

그가 다른 개들에게 물려 다리를 절뚝거릴 땐, 제 마음도 덩달아 절룩거렸습니다. 피로 불어터져 팥방울 만해진 진드기가 몸에 붙어 있으면, 같이 놀라며 함께 아파했습니다. 온 몸에 풀씨가 묻어 있는 날, 빗질하며 바람을 그와 나의 마음 밭으로 초대하였습니다.

비오는 산을 보면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아, 이내 산으로 올라가 그를 불러내어 함께 울었습니다. 눈 오고 바람 부는 날엔 보듬어 안고 내려오며 모진 겨울을 함께 아파했습니다.

그는 지금 떠나고 없습니다. 열이틀 지난 오늘도 그의 한없이 선량한 눈이 마음속에서 서성거립니다. 그는 어디에 간 것일까요?

박상륭은 그의 책 《죽음의 한 연구》(문학과 지성사, 1997)에서 이리 말했지요. 나거든 죽지 말고, 죽거든 태어나지 마라.

둘이 가만히 앉아 있습니다. 눈을 마주치면 둘은 영원 속의 친구가 됩니다. 그에게 나지막이 타일렀습니다. 다음 세상에 절대 다시 태어나지 말거라. 행여, 사람이라 한들 다시는 태어나지 말거라. 나를 믿느냐? 꼭 내 말대로 해야 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지난 봄, 보름이나 걸려 나무로 지어준 짱아의 집 모습입니다. 녀석과 인연이 끊어진 뒤, 공해가 되어버릴 비닐, 포대기 등 쉬 썩지 않는 것들은 모두 제거한 상태입니다. 나뭇가지는 위장용으로 덮어놓았던 것인데, 지금은 흩뜨려져 엉망이 되었네요.)

이젠, 하릴 없이 그가 있던 곳으로 오릅니다. 그 허공중에 뜬 발끝 따라 개망초들이 가슴께까지 자라 환히 맞습니다. 꽃들을 하나하나 가만히 쓰다듬습니다. 그리고 그 강아지 이름을 불러봅니다. 순간 망초는 눈물 속에서 꼬리치며 웃고 있습니다.

나는 허공을 향해 강아지 이름을 외칩니다. 산산이 부서져 버린 그 이름. 저 역시 마음이 허물어지고 맙니다. 개망초는 내겐 물망초(勿忘草 forget-me-not). 개망초 피는 초하(初夏), 강아지 자신을 잊지 말아 달라고, 그는 그리 개망초 피우고 떠나갔습니다.

못내 살피지 못한 죄가 깊어 참회진언을 읊조려봅니다.

옴 살바못자 모지 사다야 사바하
옴 살바못자 모지 사다야 사바하
옴 살바못자 모지 사다야 사바하

야반삼경 막걸리 꿰차고 산에 올랐습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시방삼세제불 부처 명호를 아는 대로 모두 불러내 외며 그를 보내었습니다. 어린아이들 딱지 벌려놓듯이, 아는 대로, 모든 부처의 이름들을 전부 호곡(號哭)하듯 불러내, 허공중에 지전(紙錢) 사르듯 피어 올렸습니다.

못내 아쉬워 아미타불 명호를 거푸 불러대니, 꺽 꺽 젖어버린 밤 물소리를 따라 흘러갑니다.

원왕생 서방극락정토(願往生 西方極樂淨土)
원왕생 서방극락정토(願往生 西方極樂淨土)
원왕생 서방극락정토(願往生 西方極樂淨土)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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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짱아가 떠난 그 산, 다시 ‘삶’의 끈에 묶여있는 저 강아지, 덕순이. 고양이들의 자유가 늘 부럽기만 합니다. 내 등산길에 만나는 친구들... 산기슭 연립주택에 새로 이사 온 여인네는 이들 때문에 냄새가 심하다며, 기어이 신고하고야 말겠답니다. 신고하면 저들은 필시 불행해지고 말 터... 냄새의 원인은 고양이 주인이 만든 채마밭 한쪽 구석에 버려진 쓰레기 때문이건만. 도대체가 사람들은 왜 쓰레기를 버리고, 강아지를 유기하고, 고양이를 저리 방치한단 말입니까? -원고를 넘길 즈음, 커다란 백구의 습격에 덕순이는 끝내 이승을 등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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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비와 금비입니다. 이들에게 먹이를 주던 어느 날, 금비(노랑 고양이)의 한쪽 눈알이 허물텅하게 상해 있었습니다. 이들을 밖으로 내다놓은 주인을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었으나 별무신통. 적절한 치료를 부탁하며 다짐을 구하였으나, 당시 그의 태도는 도통 미덥지 않았습니다. 저는 저대로 하느라 집에 있던 약을 수차 먹인 뒤, 다행히도 거의 정상이 되었습니다. 나중에 확인해 보니, 저와 엇갈려 그 역시 안약을 발라주었다는군요. 게다가 이제는 물그릇을 두고 물도 제 때에 공급하고요. 그의 협조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떠난 길은 이미 길이 아니다.
바르도(bardo)[각주:9]의 길은 그의 길일 뿐,
나도, 그도 나뉘어 길을 걷는다.
지구 위에 수천만억 길이 있다.
기러기 가족은 허공중에 애써 없던 길을 내단다[각주:10].
살아 있는 자는 모두 길을 걷는다.

날갯죽지 부러져 논두렁에 버려진 새는 허공중에 새길 길조차 없다.
하지만, 그도 죽자마자 길을 낸다.
바르도의 길은 오색이라지만, 남아 있는 자에겐 까만 멍.
먹물보다 더 진한 어둠속에서 나는 그리움을 긷는다.
그리움 현(絃) 울려 그와 나는 함께 떤다.
 

* 이 글은 지난 2007년 6월, 뒷산 강아지와의 인연을 마지막으로 다하며 적은 글입니다.


***
 

개망초꽃

- 백창우  

그대 떠나간 빈 들녘에
개망초 고운 꽃들이 하얗게 피었네.
내 삶의 어디쯤에서
그댈 다시 만날까?

그 맑은 가슴을 마주할 수 있을까?
그대 두고 간 노래 몇 개
들꽃처럼 가난한 숨결 한 묶음.

둥근 산 위로 첫별이 뜨면
그대가 밝히는 촛불인 줄 알겠네.   

개망초 무덤에 소나기 쏟아지면
그대가 들려주는 詩인 줄 알겠네.

그대 떠나간 빈 들판에
이름 낮은 꽃들이 하얗게 피었네.


* 백창우 | 작사가, 작곡가, 가수. 《백창우 시를 노래하다》, 《노래야, 너도 잠을 깨렴》 외. 44회 한국백상출판문화상 어린이, 청소년 부문 수상.


 

  1. 이병주 | 1921~1992년. 언론인, 소설가. 호는 나림(那林). 《지리산》, 《산하》, 《그해 5월》 등 현대사를 소재로 한 선 굵은 역사 소설을 즐겨 썼다. [본문으로]
  2. 개망초 | 왜풀·넓은잎잔꽃풀·개망풀이라고도 불리는 국화과의 두해살이풀. 높이는 30∼100cm. 6∼9월에 흰색 또는 연한 자줏빛 꽃이 핀다. 북아메리카가 원산지로 20세기 초에 우리 산야에 들어온 귀화식물인데, 그때 우리나라가 망해서 망국초라 불리기도 하고, 계란프라이 같이 생겼다고 계란꽃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북한에서는 돌이나 길가에서 자라며 잔가지가 많은 꽃이라 해서 돌잔꽃이라고 부른다. 뽑아도 뽑아도 밭에서 또 자라나 농부들의 속을 썩이는 풀이라 하여 개같이(?) 망할 놈의 풀, 개망초라 불리게 되었다고 하는데, 반면 농촌에서 꽃이 많이 피면 풍년이 든다 하여 풍년초라고도 불린다. 꽃말은 화해. 봄에 연한 잎을 삶아 쌈을 싸 먹거나 된장국을 끓여 먹고, 퇴비로도 쓴다. 한방에서는 감기·학질·림프선염·전염성간염·위염·장염·설사 등에 처방한다. [본문으로]
  3. 까흘려내다 | 까다 + 흘려내다. 새끼를 까서 밖으로 흘려내 놓다. 원효가 요석과 합궁하여 설총을 낳았으니, 중이 곧 파계한 모습인 즉, 저는 이를 짐짓 희화화(戱畵化)하여 심통스럽게 까발린 것입니다. 만약 원효 스님이 환생하여 이를 보았으면 저에게 호통을 치셨을까요? 아니면 고놈 재롱 피우는 것이 귀엽다고 하셨을까요? [본문으로]
  4. 도판승(道販僧) | 제가 지어낸 말입니다. ‘도 팔아요’ 하는 사람이 있지요. 명상이 어떻고, 도가 어떻고 이리 짐짓 조촐한 듯 조(操)빼는 인사들이 있습니다. 단 하나의 실천행도 없이 입만 살아 있는 이들에 대한 저의 준엄한 조롱의 말입니다. 예컨대, 불교야말로 실천의 종교며, 생명에 대한 자비를 펴는 종교가 아닙니까? 그런데, 현실에선 어떠했습니까? 촛불집회에도 뒤늦게 등장하지 않았습니까? 병든 소를 먹고 아니 먹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 이면에 비참하게 유린당하고 있는 소가 있다는 사실을 가장 예민하게 받아들여야 할 집단이 불교 아닐까요? 생명사랑에 대한 종지(宗旨)는 지금 도대체 어디에 버려졌기에, 이리 무심할 수 있단 말입니까? 더욱이, 불교의 일부 종파들은 생명을 해할 위험이 농후한 일, 황우석 연구에도 거교적(擧敎的)으로 나서 국가에서 듬뿍 지원해야 한다고 나대었습니다. 저는 생명+공학=생명공학이라는 말 자체도 성립이 아니 된다고 생각합니다. 감히 누가 생명에 공학이란 차가운 쇳덩이 비수를 들이댈 수 있단 말입니까? 그것은 외양 활인술(活人術)로 포장되고 있습니다만, 실은 생명을 제 욕심에 부역시켜 교묘히 괴롭히고 유린하며, 종국엔 괴물을 만들어내고야 말 흉악한 사술(邪術)에 다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허갈진 욕망, 천박한 질주에 사천왕의 부릅뜬 눈으로 경책(警責)하고 응징하지는 못할망정, 앞장서서 마름 노릇을 하고 있는 저들 따위를 저는 도판승(道販僧)이라 이름하여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으로]
  5. 판수쿨라(분소의, 糞掃衣) | 불교 용어. 더러운 곳에 내버려진 누더기들을 주워 모아 만든 옷으로 수행의 방편으로 중들이 입기도 한다. [본문으로]
  6. 천(賤)한 | 분소의를 입은 스님들을 가끔 만납니다. 온갖 누더기 천조각으로 기워 만든 옷 말입니다. 천한 옷을 입어 더 이상 천할 것이 없으니, 이제 비로소 모든 것을 여의고 부처님에게 귀의하신 것일 터, 하니 이 때 천하다 할 것조차 없어지겠지요? 그러하다면 제가 분소의의 재료를 천한 것이라 이른 것이야말로 천한 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월경 자체가 사뭇 귀한 것이니, 월경한 천인들 어찌 더럽다 하리오. 결국 ‘천(賤)하다’ 또는 ‘상(常)되다’는 말로 이르는 것이 나쁜 것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아니할 수도 있음이니, 중의적(重意的)으로 해석될 수 있는 말이라 하겠습니다. [본문으로]
  7. 능대(能對), 소대(所對) | 불교 용어. 능동적으로 작용을 하는 주체를 능대라 하고, 그 작용을 받는 객체를 소대라 이릅니다. 제가 본문에서 절대(絶對)란 ‘소대(所對)를 여윈 능대(能對)’라 했지요. 즉 짝이 없는 상태라는 말이지요. 하지만, 짝이 없다는 것은 각 개체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각각의 상대는 스스로 독존(獨尊)하니 개개물물이 모두 최상(最上), 최귀(最貴)라는 뜻입니다. 이는 곧 인간은 물론 동물도, 나아가 무정물에 이르기까지 모두 절대적인 존재들이라는 말이 됩니다. 이러한 절대들이 모여 상대의 세계를 이루는 것, 이게 불교의 가르침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저는 불교도도, 예수교도도 아니기에 제 이해가 바르지 않을 수도 있겠군요. 하지만, 아니든 기든 저는 이리 생각을 트고 있는 것입니다. 부처의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란 말도 홀로 잘 났다는 것이 아니라, 모두 자존(自尊)의 존재임을 선언하고 있음이 아니겠습니까? ‘두두물물(頭頭物物, 있는 그대로의 것) 모두가 절대’인 상대(짝)들의 모임이 세계임을 인류가 자각한다면, 지금과 같이 동물을 고통 속에 몰아넣고 유린하는 흉악한 세상이 바로 끝장날 것입니다. [본문으로]
  8. 나를 가다 | 내가 나를 짊어지고 가다. 다른 사람을 좇아서는 아니 됩니다. 나는 나의 길을 가야합니다. 석존의 천상천하유아독존과 결국 같은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일으키는 고질 병통은 모두 내 길을 가지 않고, 남의 길을 기웃거리기 때문이 아닐까요? 남들이 모두 경제, 경제 하니까 덜컹 이명박씨 찍어대고는, 이리 진고생들 하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바로 나를 가지(go) 못했기 때문이 아니겠는지요? 이명박이 부자지만, 이명박 찍는다고 자신이 이내 부자라도 된단 말입니까? 옳은 길, 이게 결국은 나의 길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옳지 않은 길은 남의 길이거니와, 내가 갈 길도 아닙니다. 내 안으로 내 길을 내는 것, 이게 인생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본문으로]
  9. 바르도(bardo) | 티벳불교에서 말하는 사후세계. 중음(中陰)이나 중유(中有)라고 한다. 죽은 후 다시 환생할 때까지의 49일간의 여로(旅路). 사람이 죽으면 49재를 지내는데, 49재란 바로 이 기간을 지난 망자를 천도하는 의식이다. [본문으로]
  10. 내달다 | 내다 + 달다. 예전에 청계천변 양안(兩岸)에 하꼬방이라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변소간을 개천변으로 쭉 빼내어, 똥이 바로 개천 바닥으로 떨어지도록 만들었지요. 겨울철이 되면 개천바닥으로 떨어진 똥들이 얼어붙어 고드름, 석순처럼 죽죽 일으켜 세워져 기둥을 방불케 합니다. 이게 제법 장관이었습니다. 이때의, 밖으로 돌출한 변소간들을 ‘내달았다’고 표현하지요. ‘내’는 밖으로 내놓다, 나오다(出)라는 의미이고, ‘달다’는 허공중에 매달리게 한다는 뜻입니다.   기러기 가족들은 길도 없는 허공중에 길을 만들면서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 길은 마치 미리내(은하수)처럼 허공중에 걸려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꼬방 주인들이 청계천으로 내달은 똥뒷간들은 무엇이겠습니까? 거기서 저 떨어지는 똥들은 갖은 시름, 애환이 썩어문드러진 것들이라, 신산고초(辛酸苦楚) 땀, 눈물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차라리 슬퍼서 아름다운, 저들 서러운 똥구슬... 하늘에 별들이 매달린 미리내가 있다면, 지상엔 똥구슬을 만들기 위해 내달린 똥뒷간이 있다. 이게 그리 어처구니없는 상상력일까요?   제가 주말마다 달려가는 밭이 전곡에 있습니다. 한탄강이 아주 가까운 곳에 있지요. 거기서 지난겨울 기러기들을 떨리는 마음으로 많이 보았습니다. 하나가 앞장서고 시옷자로 꺾어 어디론가 날아가는 그 장렬한 모습에, 너무 가슴이 시려 한참을 지켜보았지요. 은하수가 허공중에 매달려 하늘을 장엄(莊嚴)하지만, 기러기 가족들은 금 하나 새겨 있지 않은 허공중에 애써 길을 내어 시름과 애환을 한 점 한 점 우수수 털어내며 날아갑니다. 저들은 빈한한 살림들이기에, 임자 없는 허공중에 길을 내달아 냅니다. 마치 청계천변 하꼬방 똥뒷간처럼 별님의 길을 예비합니다. 하기에 세상의 모든 가난한 이들은 허공중에 무엇인가를 ‘내달아’ 냅니다. 내달은 것은 그러하기에 슬픈 만큼 아름답습니다. 마치 미리내처럼 말입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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