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위, 볕 그리고 바람
20년 남짓 되는,
꽤나 오래 전 일이다.
인적도 없는 소로를 따라 산에 오르는데 고양이가 죽어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목에는 줄이 매어져 있었는데 한쪽 끝이 키 낮은 관목에 감겨져 있다.
이러니 꼼짝없이 그곳에 묶여 있을 수밖에.
이미 낙신(落神)이 되고 몸뚱이는 비쩍 말라가고 있는 중이었다.
며칠 후 나는 집에서 가위를 가져와 ‘목’에 걸린 끈을 잘라주고는 땅을 파서 묻어주었다.
차마 ‘목’에 줄이 매인 채 떠나보낼 수는 없었다.
이게 인연이 되어서 그 이후 지금까지 버려진 강아지, 고양이 등의 사체를 수습해왔다.
이들은 산속에 특히 많은 데, 도로가에도 가끔 쓰러진 것을 볼 수 있다.
떠돌이 녀석들이 병사(病死)한 것으로 보이는 경우도 있지만,
사람들이 갖다 버린 것으로 추측되는 것도 간간히 보인다.
개중엔 여러 사정 때문에 여의치 않아 묻어주지 못하고,
그저 안전한 곳으로 옮겨주는데 그친 적도 있지만,
나는 될 수 있는 한 땅에 묻어주었다.
언젠가는 문정동 쪽으로 일이 있어 길을 걷는데,
도로 갓길 변 널찍한 빈 공터에 얼핏 커다란 강아지가 버려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며칠 후 야전삽을 챙겨 가지고 가서 부리나케 땅을 파고는 그 녀석을 묻어 주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강아지가 아니고 고양이였는데,
덩치가 크고 하얀 색이어서 멀리서 보고 착각을 일으킨 것이다.
사람들이 보기 전에 일을 마쳐야 하기 때문에, 이런 일을 할 때는 바삐 서둘러야 한다.
동물 사체를 유기하거나, 불법 매장하는 것으로 오인받기 십상이다.
까닥 잘못하다가는 혐의를 벗지 못하고 죄를 뒤집어 쓸 우려도 있는 것이다.
가끔은 힐끗힐끗 의심스런 눈초리로 쳐다보며 지나는 이를 만날 때도 있다.
한 여름 땀은 쏟아지는데 땅에 돌이 많거나 굳기라도 하면 여간 낭패가 아니다.
그러함에도, 저 녀석들이 이 땅에 왔다가 험한 한 생을 겪고는,
마지막 가는 길에서도 저리 처참하게 버려진 채,
스러지는 게 나로서는 은연 측은하게 보이는 것이다.
당대, 그리고 이 땅에서 함께 숨 쉬고 살던 인연인데,
살아생전 그리 사람들이 박대하더니만,
가는 순간까지 저리 모질게 갈라져, 쓸쓸하니 홀로 갈 수 있음인가?
나는 한 줌, 한 줌 흙을 떠내면서,
저들의 명도(冥途)에 한줄기 등(燈)을 밝히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는 한 줌, 한 줌 다시 이불 덮듯 저들을 구천(九泉)으로 전송(餞送)한다.
로드킬.
로드킬을 당한 동물을 치울 때도 마찬가지다.
최대한 안전을 도모하며 접근하여야 하지만,
마침 부근 주인의 눈에 띄면 가해자로 오인을 받아 공연한 시비에 휘말리게 된다.
몇 주 전에도 강아지 하나를 치워준 적이 있지만,
사실 동행이 있을 때는 여러 사정상 마음을 접고 그냥 지나친 경우도 있다.
사고를 일으킨 당사자가 뒷마무리를 잘해 주었으면 좋을 텐데,
로드킬이 적지 아니 목격되는 것은 이들이 일을 저지르고는
대개는 그냥 내빼버리는 탓이리라.
2주전에는 밭일을 마치고 귀가 길,
저녁에 차를 몰고 있는데 바로 전면에 강아지가 나타났다.
서서히 속도를 줄이며 뒷 차량을 막아 내고 있는데,
이 녀석이 6차선 도로 반대 차선으로 달려가 버린다.
나는 차창 밖으로 손을 흔들며 맞은 편 차선을 타고 달리는 차량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하지만 차량들은 쏜살같이 달려들었고 강아지는 치이고 말았다.
‘깨갱’
저것을 처리해주어야 하는데,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 그냥 지나치고 말았다.
차마, 어찌하리?
돌아와 며칠 ‘깨갱’ 거리는 소리가 환청처럼 들린다.
이곳 부근엔 가끔 강아지가 저리 나타나곤 한다.
수개월 전에도 어린 강아지가 그 도로 위를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 때는 위험한 가운데나마 대낮인지라,
차도 가운데에 차를 세워놓고 강아지를 인도께로 에스코트하였지만,
어째서 6차선 대로 가에 강아지를 함부로 풀어놓는지?
이곳 사람들의 동물에 대한 무심함은 정말 쥐어박고 싶을 정도로 딱하다.
아닌 게 아니라 그 다음 주에 근처를 가는데,
도로에 죽은 고양이가 나뒹구는 것을 또 한 번 보게 되었다.
나는 차를 도로 한 켠에 세웠다.
목장갑을 끼고서는 고양이를 인도 옆 풀밭으로 옮겨 놓는다.
지나가던 할머니 한 분이 말씀 하신다.
“왜들 저렇게 사는지 몰라?”
아침나절 차도 별로 많지 않은 데,
치우지 않고 도망간 이를 탓하는 말씀이시다.
골편(骨片)이 이리저리 도로가에 흩어지고 있다.
마침 부러진 이빨인 듯 날카로운 조각 하나가 빛살을 먹는다.
이내 반짝 튕기며 푸른 비수(匕首)가 되어,
허공을 가르며 내 심장에 들어와 박힌다.
산속으로 들어가면,
사람들이 개고기를 먹다가 버린 뼈다귀, 해골을 적지 아니 만난다.
여러 사람들이 나다니는 등산길엔 그런 일이 적지만,
나처럼 ‘길 아닌 길’을 걷는
내가 스스로 이르노니 탐로지객(探路之客)인 경우 이런 정경을 쉬이 본다.
아마도 으슥한 곳으로 여럿이 몰려와서는 개고기를 게걸스럽게 탐식하는 것이리라.
먹고 나서는 대개는 나머지를 함부로 버린 채 가버린다.
아귀(餓鬼)는 목구멍이 바늘구멍만 하지만,
쉼 없이 허갈져 먹을 것을 탐한다.
옛 사람들이 이러하지 않던가?
貪心動則津生, 悲心動則泪生, 愧心動則汗生, 恐心動則溺生
(貪心動則津生, 哀心動則瓷生, 楚心動則汗生, 欲心動則精生)
(※ 哀心動則瓷生은 출처가 相書인데 이를 哀心動則淚生로 보면 좋겠다. 淚=泪)
탐내는 마음이 움직이면 침이 고이며,
슬픈 마음이 생기면 눈물이 흐르고,
부끄러운 마음이 일면 땀이 흐르며,
두려운 마음이 솟으면 오줌을 싸게 된다.
늘 입으로 침을 흘리는 저들이야말로,
욕심꾸러기, 허갈진 미망들이다.
기어이 황혼녘엔 제 죄지은 바로 말미암아,
온 몸에 되(升)들이 땀을, 이부자리엔 말(斗)들이 오줌을 싸게 되리라.
고약하니 어리석고, 허갈진 아귀 같은 인생들이다.
후미진 계곡 변에다 버린 것은 차라리 양반이다.
길가에다 그냥 버린 경우도 있고,
심술 사납게 널따란 바위 위에다가 떡하니 강아지 해골을 얹어 둔 경우도 보았다.
여태껏 습골(拾骨)하듯 저들을 거두어 땅에 묻어주곤 하였는데,
요즘은 좀 다른 생각이 들고는 한다.
양지 바른 바윗가 위에,
양명(陽明)하니 볕 쐬며, 바람 따라 서서히 풍화되는 것도 퍽이나 괜찮은 일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사람이야 살아생전 양택(陽宅)에서 실컷 저 잘났다고 뽐내며 살았으니,
죽어서 음택(陰宅)으로 돌아간들 아쉬울 것이 없다.
저들 한 많은 동물들은 죽어서도 누군가 거두어,
음택(陰宅)은커녕 냉한 음지(陰地)로도 바로 돌아갈 곳이 없는 신세이기도 하지만,
살아생전 양택(陽宅)이나마 제대로 누린 바 없다.
한즉, 아무도 없는 호젓한 숲속,
너럭바위 위에 누워,
자유롭게,
빛 누리며,
바람맞이하며,
꽃가루처럼 산화(散華)되는 것도 괜찮을 성 싶다.
하지만,
여기 이 땅,
사람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 어디에 있으랴.
가만히 누워 있자 한들,
흉한 놈한테 걸리면 깡통 차듯,
들입다 발길질을 당하지나 않을까 싶기도 하다.
동물들에게 있어,
어찌,
사람처럼 강퍅하고 모진 게 그예 또 어디에 있으랴.
호젓한 숲길
바위, 볕 그리고 바람이 들자.
4년 전 겨울,
남은 생을 가까스로 지피어내던 강아지와 함께,
너럭바위 위에서 눈꽃 맞던 기억이 뭉긋 솟는다.
(※ 참고 글 : ☞ 2008/02/29 - [소요유] - 야반삼경(夜半三更) 문빗장 - 주반칠흑(晝半漆黑))
또한 길변 바위 위에 떡하니 버려져,
차갑게 식은 흰빛을 발하던 강아지 해골은 또 어찌 생각키우는가?
지금은 사라진 이들,
모두 음습하니 잿빛 감도는 명도(冥途)길이 아니라,
빛살 내리는 양명(陽明)한 천상(天上)에서 아기 천사가 되어있으라.
시인의 말처럼,
‘바람은 제 자신의 첫 페이지를 열고,
허공중에 새 길을 낸다.’
저들 가여운 동물들은 과연 바람을 본받아 새 길을 내었을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