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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秋收)와 추수(秋袖)

소요유/묵은 글 : 2008. 8. 17. 11:39


가을은 어느덧 길 모퉁이를 돌아 성큼 앞서 가고 있습니다.
춘하추동 어느 게나 모두 바뀌는 게로되,
(그로서 상실의 아픔을 겪지 않는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이 계절은 우리를 아프게 합니다.
가을 숲에 서서히 침몰하며, 슬프면서도 아름다운 감상에 젖어들 때면,
문득 달콤하기조차 합니다.

마음에 번지는 이 복선적인 감정의 선율은 도대체 어디서 연원(淵源)하는 것일까 ?
그것은 아마도 저편 넘어 히끗 비치는 죽음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여름내 치성(熾盛)하던 풀들이 모두 씨앗을 맺고 누렇게 시들고 있습니다.
가을을 조락(凋落)의 계절이라고 합니다만,
바로 그말대로 여실히 초록의 빛이 이제 시들어, 바래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언덕 위 밭에 서서
풀씨들을 보면 정말 경이롭습니다.
소리없는 아우성들이 온 들을 가로질러 손짓하듯
바람에 일렁거리고 있습니다.
저들의 역사 현장에 서서,
저 역시 한줄기 바람이 되버리고 맙니다.

맹목적 생의 의지로 독해하든,
희망의 푯대 끝에 달린 깃발로 추상(抽象)하든...
저들 풀씨들은 시드는 줄기의 대극(對克)으로서
반짝거리며, 촤르르 지상으로 빛을 되쏴내며
내년 봄의 찬란한 영광을 예비하고 있습니다.

한편, 누런 줄기는 이미 말라 바스락거립니다.
저 웅크린 비명소리들이라니,
가슴이 저르르 아파옵니다.

저들이 돌아갈 저 뒤편 휘장자락 그늘에 숨어 있는 죽음을 순간 엿보게 됩니다.
창끝처럼 매달린 풀씨 밑자루엔 죽음이 웅성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니, 가을은 못내 아프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름다운 풀씨의 영광만큼, 딱 그만큼 슬픔이 천칭 접시위에 담겨져 있습니다.
아름다움이란 슬픔과 함께
동가(同價)의 무게일 때라야 아슬아슬한 정조(情操)의 물결을 지어냅니다.
마치 곡예사의 익살 뒤에 동량(同量)의 애환이 숨어 있을 때라야
비로소 우리의 환희(歡喜)가 곧 환희(幻戱)속에 있음을 깨닫게 되는 것과 매한가지입니다.
이 때 곡예사와 관중은 가를 수 없는 하나의 운명이 됩니다.

이 균형이 깨져 저울추가 한쪽으로 기울게 되면,
거기엔 희극 또는 비극적인 정서만이 일편으로 흥건히 쏟아져 흐르게 됩니다.

언덕위에 서서
풀과 하나가 된 순간
우리는 전율하며,
슬프면서도 아름다운 複線의 선율이 흐르는
그 가을 바다에 잠겨듭니다.

***

단풍은 그 다음에 오는 잔치입니다.
한바탕 질러질러 불질러 마지막까지 생을 연소시키는 것.
하기에, 거기엔 죽음을 의식하지 않는 오연한 생의 투지가 있고,
조물주를 향한 애뜻한 항변의 몸짓도 보입니다.
어떤 때는 운명에 감자바위를 먹이고 있는
단말마의 비명소리가 환청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화려하게 공중을 향해 쏘아지는 불꽃들.
불꽃들이 만드는 만화경.

그 잔치의 주인공은
단풍과 함께
정작은 우리들입니다.

때문에 저는 ooo님이 필경은 무심코 읊조리신 것일테지만, “단풍놀이”란 말 앞에서,
무대공연에서 놀이의 주체, 객체로 분리되는 그런 놀이가 연상돼 잠깐 주춤거립니다.
단풍을 대상으로 즐기는 순간
우리는 단풍의 마음을 행여 모르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스쳐지나갔습니다.

모두가 하나가 되는 “단풍잔치”, “가을잔치”...
주객이 따로 나뉜 것이 아닌...
단풍과 내가 마음 안에서 하나가 되는..
그런 말을 찾아 짐짓 “잔치”로 바꾸어보았습니다.
하지만 이 역시 여전히 흡족치 않군요.

무엇이 적당할까 ?

나선의 파문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 하나가 미소지으며 말합니다.
“알 수 없어요.”
당신이 내가 되기 전에는 결코.

***

춘하추동
계절(季節)이라 할 때, 節이 “마디절”임을 생각해봅니다.
시간의 굴렁쇠가 굴러감에 이음새가 어디 있으련만,
사람들은 굳이 매듭을 지어 춘하추동 4계절로 나눠 셈합니다.

태초이래
산가지(算木) 놓아가며 점을 치든, 술을 먹든
사람들은 기어히 셈을 하기로 작정합니다.
시간 역시 카운팅(算)하게 됩니다.
지지(地支), 절기 등으로 시간이란 순결(純潔)에 이성의 칼집을 내어 금을 긋습니다.
이 때 필경 전체(fullness)가 우르르 부서져, 깨진 기왓장처럼 놔뒹굽니다.

이 以來로 인간은 다시 흩어진 조각을 맞추려고 분주해집니다.
그 분주한 모습의 이력을 우리는 문명의 역사라 부르곤 합니다.
역사는 그래서 때로는 남루한 기록이기도 합니다.

계절의 길목,
특히나 가을 앞에 서니 생각의 파편들이 별똥별처럼 마구 떨어져내리는군요.

추수(秋收)
동장(冬臧)

글자 그대로 가을은 거두고, 겨울은 감춘다라는 뜻쯤 됩니다.
동장에서 장을 보관한다고 풀이를 하기도 합니다만,
저는 보관하다라는 말이 너무 벽에 몰린 궁벽한 표현으로 보여
애써 감춘다라고 말하기를 고집합니다.
감춘다는 것이 제것을 남에게 주기 싫어 쩨쩨하게 숨긴다는 것이 아니라,
제 본령이 겉으로 드러나 확연히 보여지지 않는 상태를 이르는 것입니다.
명년 봄 무엇으로 나투어질지 모르는 존재의 비밀,
생명은 그리 비밀스럽게 겨울을 감춤으로서
화사한 봄을 틔워냅니다.

추수(秋收)
역시 가을걷이로 풀이됩니다만, 내심으로는 이게 그리 썩 달갑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여기엔 추수 주체의 선택행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뿌렸으니 내가 거둔다는 보상 프로세스가 암묵적으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추수란 행위의 영광은 추수 주체가 온전히 누리게 됩니다.

풀대(草幹)는 시들어 스러집니다만 풀씨는 남아 다음의 빛을 예비합니다.
자연세계에서는 이처럼 추수의 주인공은 씨앗입니다.
추수의 객체에 그 영광의 빛이 대가없이(無償) 이전되어 있습니다.
아니 거기엔 애시당초 추수란 인간의 화법이 부재합니다.

하지만 인간세상에선 뿌린 자가 결실(結實)을 보상으로 거두어갑니다.
하니 추수에서의 收엔 이미 결실 그 존재 자체에 대한 조명이 거두워져 있습니다.
단지 목적 수단으로서 전락하여 거기엔 생명이 거세되고 싸늘한 냉기만 남아 있습니다.
이듬해 다시 씨 뿌려졌을 지라도,
그들은 노예로서 주인에게 가을까지 다시 복무할 뿐입니다.

그러하니 주인에게 거두워진다라고 새겨지는 수(收)라는 것이
자연에서의 씨앗에겐 사뭇 거북살스러운 표현이 아니겠는가 하는 것이지요.

때문에 저는 마음이 넉넉해지는 이번 가을만큼이라도
저 추수라는 인간위주의 주술적 화법을 풀어버리고,
저들을 위한 축복의 말을 따사로운 햇살처럼 넌지시 전하고 싶습니다.

추수(秋袖) - 가을소매(autumn sleeves)

이렇게 말입니다.

장수선무(長袖善舞)라고 소매가 길면 춤을 잘 춘다고 했습니다.
풀대들은 소매자락 흔들며 씨앗들을 하늘로 날리고 있습니다.
가을바람에 실려 한껏 나래짓하는 저들 풀씨들을 함께 축복해주고 싶습니다.

언덕 위에 서서
바람 맞으면 우리들의 소매도 덩달아 펄럭이며,
절로 경건해집니다.

언덕 위에 서면,
흔들리는 소매 끝자락 따라 풀씨들이 남실남실 춤을 추며 꿈나라 떠납니다.
그리 가을은 비밀스럽게 영글어 갑니다.

(2007.10.15 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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