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음을 물을 수 없는 물음
우리가 살아 있는 이상 대개는 욕망에서 벗어날 수 없다.
식욕, 색욕, 명예욕. 이 삼자가 흔히 드는 인생의 세가지 욕망이다.
또는 오욕락(五慾樂:재물욕·색욕·식욕·명예욕·수면욕)을 들기도 한다.
그런데,
여기에 하나 더 보태어 사람들은 물음을 탐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종종 있다.
그들은 왜 묻고 있는가 ?
그들은 모든 것을 물어야 한다고 믿고 있는 것일까 ?
그들은 왜 모든 것은 물어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가 ?
이런 태도를 가진 자는 응당 그런 물음에 적절한 답이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할 게 틀림없다.
물음이 있고, 답이 있는 견고한 구조의 세계.
그런데, 물어질 수 없는 질문은 과연 없는가 ?
또는 묻지 않음으로서 더 절절한 물음이 될 수 있는 경우는 없는가 ?
이런 물음에 적절한 몇가지 예를 우선 소개해본다.
계로(季路)가 귀신 섬기는 일에 대해 물으니 공자(孔子) 왈.
“사람도 제대로 섬기지 못하는데 어찌 귀신을 섬길 수 있겠느냐”.
“감히 여쭙습니다. 죽음은 어떻습니까”
“삶도 아직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
자공(子貢)이 묻기를
"사람은 죽은 뒤에도 감각이 있을까요?"
"죽어보면 안다"
공자는 괴력난신(怪力亂神)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순자(荀子)에 이르러서는 天과 저승 세계에 대한 물음은 아예 확인사살 당한다.
"기우제를 지내서 비가 오는 것은, 기우제를 지내지 않아도 비가 오는 것과 같다"
"별이 떨어지고 나무가 울면 나라 안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 한다. 말한다. 이는 무엇 때문인가? 이는 무엇 때문이 아니고 천지가 바뀌고 음양이 변화한 사물 가운데 드물게 나타나는 일일뿐이다"
하늘(天)이란 존재를 무시하거나 격하시키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하늘을 칭송하지도 않지만, 결코 원망하지도 않는다.
사람들은 이미 이루어져 있는 것을 아는 것일 뿐, 그 무형의 세계는 알지 못한다.
(皆知其所以成 莫知其無形)
순자는 앞 선 이들과는 다르게 천이란 주술로부터의 인간해방을 천명했다.
피비린내 나는 춘추전국시대의 현장에서 건져 올려진 그의 사상은 철저히 현실적이다.
그러나 그만큼 절절히 와 닿기도 한다.
우주의 탄생을 풍선에 비유한 현대 천문학설이 있다.
우리가 풍선을 불면 그것이 계속 팽창하듯, 점점 커지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우주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별도의 시공간 가운데서 팽창하는 것이 아니다.
이 풍선의 크기 자체가 바로 시공간의 크기이고 물질은 이 풍선 속에 있다.
때문에 풍선바깥에는 무엇이 있을까 라는 물음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풍선바깥에 빈 공간이 있는 것이 아니다.
풍선의 바깥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왜냐하면 풍선이 그대로 우주의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우주의 크기가 유한하든 무한하든 우주의 밖이란 없는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우주의 중심이란 것도 질문이 성립하지 않는다.
굳이 중심이 있다면, 시공간 어느 부분이라도 곧 우주의 중심이 될 수 있다.
이는 거꾸로 말하면 우주의 중심은 없다라고 말할 수 있다.
끝으로 하나 더 들어 본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사위국을 유행하실 적에 승림급고독원에 계셨다.
그 때 존자 만동자는 혼자 편안하고 고요한 곳에서 연좌하고 사색하다가 마음으로 이렇게 생각하였다.
"이 세상은 영원한가. 이 세상은 영원하지 않은가. 세상은 끝이 있는가. 세상은 끝이 없는가. 목숨이 곧 몸인가. 목숨과 몸은 다른가. 여래는 마침이 있는가. 여래는 마침이 없는가. 여래는 마침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가. 여래는 마침이 있지도 않고 마침이 없지도 않는가." - (十無記)"
이런 문제에 대해서 부처님께서는 전혀 말씀을 하시지 않으셨다.
만일 이러한 의문에 대해 부처님께서 “세상은 영원하다”고 분명히 말씀해 주신다면 그 분을 따라 범행을 배우리라 결심했다.
그리고는 부처님께 찾아가 이와 같은 내용을 만동자는 물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즉답을 하지 않으시고 독화살에 비유하여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몸에 독화살을 맞았는데 그가 독화살로 말미암아 매우 심한 고통을 받을 때에 그 친족들은 그를 가엾이 여겨 곧 의사를 청하였다. 그런데 독화살을 맞은 사람이 아직 이 화살을 뽑아서는 안 된다. 나는 먼저 화살을 쏜 그 사람이 어떤 성, 어떤 이름, 어떤 신분이며, 키는 큰지 작은지, 살결은 거친지 등의 내용을 알고 난 다음 이 화살을 뽑겠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이미 중간에 목숨을 마치고 마는 것과 같다." - (독전(毒箭)의 비유)
이와 같이 그러한 질문은 아무 이익됨이 없다 하셨다.
(*src : 한글대장경:전유경(箭喩經))
물론 이들과는 반대로 묻고 답함에 보다 적극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곳도 적지 않다.
동중서의 천인감응설이 그렇고, 기독교가 그렇다.
그런데, 정작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 양자의 이동(異同)를 따지자는 게 아니다.
내가 어느 곳에서 전에 얘기했듯이,
각자는 각기 자기 길을 갈 뿐이다.
상대가 부당한 일을 하지 않는 이상 남의 길을 묻는 것은 무의미한 것.
난 이리 배웠다.
나는 이러이러한 일을 하는데, 당신은 왜 이런 일을 하지 않느냐 ?
나는 이러이러한 것을 아는데, 당신은 왜 이런 것을 알지 못하느냐 ?
나는 이러이러한 길을 가는데, 당신은 왜 이런 길을 가지 않느냐 ?
자기 일 또는 남의 일의 총량을 제 기준으로 평가하고 비교고량(比較考量)하는 태도도 바람직하지 않다.
그 사람을 알지 못하는 한 옳지 않다.
설혹 안다고 하여도 마지막까지 알지는 못할 터.
그러니 그 길은 그의 몫인 것.
그래서 남의 길은 내겐 없다.
질그릇을 굽는 사람은 그 일을 하도록 그냥 놔두어야 한다.
내 유리잔을 채우기 위해 남을 동원하는 것은 철없는 어.리.광.짓에 불과하다.
그대가 보기엔 저이의 그릇이 질그릇이지만,
그는 어디에 매이지 않는 그의 그릇을 빚고 있을 따름인 것을.
내가 알지 못하는 그 사람의 사정이 있다.
그것을 제약조건(constraint)이라고 불러도 좋고, 물리학의 경계조건(boundary condition) 또는 실존의 한계상황(限界狀況 boundary situation)이라고 해도 좋을 테지만 어쨌건 그 존재가 놓여 있는 그의 특수상황을 존중해야 한다.
때문에 우리는 남의 길을 물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그러하니, 자신의 질문법으로 남을 물어서는 안 된다고 나는 생각하는 것이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자신이 옳다고 한들,
상대에겐 무가치하거나, 그를 들을 입장이 아닐 수도 있다라는 것을
묻는 이는 한번 쯤 자신에게 되 묻기를 권해 보는 게다.
오늘 유서 깊은 정릉 경국사 앞을 지났다.
지금 경국사 진입도로가 한창 포장공사 중이다.
수년전 사월 초파일 나는 그곳을 (구경꾼의 입장으로) 방문했었다.
그런데, 넓지도 않은 좁은 길 건너 맞은 편 일단의 사람들이 경국사쪽을 향해 찬송가를 부르고 있었다.
저마다 피켓같은 것을 들고 예수 믿으면 천당 간다는 등의 그들 나름대로의 전도활동을 하고 있었다.
아연 놀라운 정경이었다.
경국사를 방문하는 이들중엔 당연 신도들도 많을 터인데, 그들의 내심은 모르겠으나, 전부들 무심한 표정들이다.
남의 생일 집 앞에 와서,
축하는 하지 못할망정, 훼방을 놓고 있는 짝이니, 정말 어처구니 없는 노릇이었다.
내가 사는 곳은 절집이 상당히 많다.
산쪽으로 더 가면 절, 기도원, 신부사택이 삼각형을 이루며 맞댄 골목이 있다.
난 이곳을 말하길 정감록에 나오는 대환란시 피난할 명당 즉, ‘십승지(十勝地)’에 비유해 이곳이 바로 그곳이다 라고 농을 하곤 한다.
이곳은 그나마 천변 한쪽에 한줄로 늘어선 민가가 끝나는 언덕배기 산뿌리쪽인즉 인적이 드물고, 더욱 야간에는 나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다.
3년전 기도원 주인이 바뀌면서 아랫 동네에서 교회를 운영하는 목사분이 이사를 왔다.
얼마 있지 않아, 높다란 철탑을 기도원 주변에 두 개씩이나 세웠다.
철갑을 두른 채, 축대 위에 세워졌으니 위용(?)은 대단하나,
주변환경 속에서 분출해내는 이질감 역시 범상치 않았다.
야간엔 빨간 십자가 네온이 그 주변을 사뭇 압도한다.
또한 그 집이 세워진 높다란 축대 주변을 온통 기도원 선전하는 간판으로 도배를 하다시피 하여 뺑 둘러쳤다.
축대에 단순히 장판 붙이듯 눕혀 붙여진 것이 아니라, 측면만 아슬아슬하게 대어 있고 밖으로 손을 내밀듯 넓은 쪽이 돌출되어 곡예를 하고 있는 모습이라니.
난 별 기구 장치도 없이 축대에 설치한 그 신묘한 기술에 경탄하며, 한동안 유심히 관찰하며 그 기법의 기기묘묘한 공학적 연출에 놀라와 했다.
짐작컨대, 그 목사에겐 그 간판을 볼 사람이 거의 없다라는 효용의 문제가 아니라,
주변 상대들에게 위용을 과시하려는 게 더욱 중요하였으리라.
현재 십자가는 여전하지만, 언젠가부터는 그 간판의 공학적 연출만은 종영된 상태다.
난, 야간 등행을 가끔 하는 편이다.
야간에 그리 가면 빨간 십자가가 사뭇 심상치 않아 보인다.
동장군 바람이 을씨년스럽게 부는 겨울 밤에 더욱 처절하다.
빨갛게 달군 불인두가 곧추서서 하늘 꽁무니를 찌르고 있는 듯,
내 가슴이 외려 아프곤 했다.
하늘은 꽁무니가 얼마나 아플까 ?
저 아랫녁이 아닌 산중에선 사물이 살아나, 곧 잘 의인화된다.
때문에 이곳에서 느끼는 산, 하늘은 내겐 무정물이 아니라 살아 있는 생명체다.
왜 아무도 없는 이 산중에 저 십자가는 저리 핏빛 절규를 토하며,
찬바람을 가르며 수직(守職)을 서는가 ?
한동안 내겐 이게 석연치 않은 의문였다.
그런데, 그 의문의 단서가 조금씩 풀렸다.
바로 위에서 언급한 양자의 태도로부터 난 이해를 하기 시작했다.
절 집에선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붙잡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다.
오고 감에 매어 있지 않는 태도는 필경 석존이 말한 독전의 비유에서 보듯이,
하늘을 대(對)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
각자는 스스로 능(能 ≒주체,subject)의 존재인 것이다.
이것을 일찍이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고 갈파한 것도 그다.
반면 동중서처럼 천과 인이 상호 감응한다면, 천을 무시할 수 없다.
아니 무시한다면 불충이요, 역적으로 몰릴 가능성이 다분히 있다.
“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은 하늘과 사람이 모두 음양의 조화로 이뤄졌으므로 서로 통한다는 것인데, 이게 한번 재주를 넘으면 이는 곧 사람은 하늘의 뜻에 복종해야 한다는 논리로 변전된다.
그런데, 하늘을 황제로 환치하면, 실인즉, 황제에게 복종하면 바로 하늘에 복종하는 게 돼버린다.
황제는 천자(天子)이니 아주 썩 잘 부합되는 정치이론이 되는 것이다.
실제 한무제가 새로 건국한 나라의 통치이념을 위해 동중서가 천인감응설을 창출하여 재빠르게 부역한 것이다.
여기서 동중서의 정치적 장치를 논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다만 이와 같이 천-인이란 구조하에서는 필연적으로 물음이 유발된다는 점을 얘기하고 싶었던 게다.
만약 물음을 외면한다면, 천.인 구조하에서는 이단이 되고, 나아가 규탄을 받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말이다.
천을 묻는데, 이 물음에 답하지 않는 순간 그는 곧 역적이 되고 마는 것.
기독교에서는 곧 사탄이, 마귀가 되고 만다.
때문에 단군 목이 잘리고,
사찰이 불 질러지고 (실제 우리 동네에서 있었던 일)
십자가 주칠(朱漆)로 마애상이 수난을 당하며,
부산녘에 있는 모든 사찰이 무너져 내리라는 기도가 혈우(血雨)처럼 내린다.
반대로 저쪽 편이 이쪽 편에 이런 위해를 가한 사례가 있는가 ?
지금 나는 고발을 하고 있는 게 아니다.
이 양자의 속성에서 유발되는 현실적 사정들을 이리 짚어보는 것이다.
이런 수직적 견고한 결속 구조하에서는 묻는 이가 권력을 온전히 장악한다.
이 물음에 답하는 순간, 답하는 이는 그 구조에 흡수되고, 평강(?)을 얻게 된다.
반면 그는 천에 복속하는 존재로 만족해야 한다.
여기서 천을 황제로 바꿔도 좋고, 직장 상사, 권력자, 재력자로 바꾸어도 무방하리라.
문제는 이런 문제가 현실 영역이라면, 나름대로의 처세관, 가치관에 따라 어떠한 것일지라도 자기 길을 택하는 것을 나무랄 까닭이 없다.
그러나, 저 멀리 종교, 진리의 문제라면 우리는 혹 답을 하거나, 혹 답할 위치에 있지 않음을 각자 확인해야 하는 게다.
이쯤에 이르러 난 그들이 다른 이를 궁박하여 묻는 물음의 정당성은 인정할 수는 없어도,
그들의 사정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앞에서 거론한 경국사前 기독신자들의 달뜬 목소리가 충분히 이해되고,
한 때, 울컥 가졌던 분노가 식었다.
오히려, 그들의 창백한 얼굴들을 이젠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다.
저들의 사무치는 간절한 사랑 방식을 사랑이란 형식을 통하지 않고 어찌 구원할 수 있으리오.
그러나 바라건데,
그들도 상대의 사정을 살펴,
때로는 그냥 놔두는 포용력과 지혜와 사랑을 갖게 되기를 바래본다.
각자는 모두 자신의 길을 가고 있음인 것을.
누가 그 길을 감히 참견할 수 있으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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