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아름품과 꽃바다(華嚴)

소요유/묵은 글 : 2008.12.12 12:45


모사이트에 썼던 글입니다.
댓글에 이를 인용하여야겠기에 이리 올려둡니다.

***

인터넷(internet)을 화두로 몇가지 짧은 생각들의 마디를 이어봅니다.
그렇다 하여도 이곳 아름품에서 제가 두레박질한 의미망을 벗어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전 누구나 어느 시간, 어느 공간 그 특정 접점의 순간에 서서,
우물에서 물을 길어내듯 의.미를 길어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최근 이곳 아름품에서 물동이를 인 처녀들의 아름다운 환영을 봅니다.
새벽녘 정갈한 무명 치마저고리를 입고 이웃에 뒤질새라 우물가로 나서는 그리움들.
똬리 끈을 꽈리인 양 슬쩍 즈려 물고, 물동이를 얹어 이고 삽짝 문을 나섭니다.
삽살이는 덜 깬 잠을 털어내듯 꼬리를 흔들고, 킁킁거리며 뒤를 따릅니다.     
지금은 잊혀진 그 아련한 모습들을 아름품 이곳에서 발견합니다.
문득 그 누나 치맛자락에 매달려 짐짓 어릿광을 펴보고 싶은 충동이 입니다.

(* 저의 앞 글 "야묘소묘"에 댓글 주신 분들에 대한 회신의 말씀을 말미에 삼가 적어두었습니다.
이리 번거로움 끼침에 용서를 구합니다.)

이 글은
 1. internet
 2. indranet-인드라망(因陀羅網)
 3. 양자역학과 아름품
이리 구성되어 있습니다.

1. internet

internet은 inter+net으로 분해해 볼 수 있습니다.
inter는 한자로 짚으면 거의 정확히 간(間)으로 번역됩니다.
net는 한자어로 망(網)이니 그물을 뜻합니다.
inter와 비슷한 글자로 intra가 있습니다.
이는 한자어로 내(內) 또는 중(中) 쯤으로 새길 수 있겠습니다.

inter든, intra든 말미에 net을 붙인 말,
곧 internet, intranet이란 말들이 요즘은 적잖이 쓰입니다.
이 양자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
제 한자 풀이에 기초해서 이 정도로 간단히 생각하시면 됩니다.
intranet은 특정 조직내(內)의 구성원간끼리만 통신이 가능한 그물망(네트워크-網組織).
독립 회사내부에서만 사용하는 네트워크, 뭐 이 정도 생각해 두시면 됩니다.
internet은 자신과 그 바깥 세계 사이(間)와의 통신을 위한 그물망.

internet은 tcp/ip란 규약을 통해 망에 연결된 사람들이 커뮤니케이션을 합니다.
tcp/ip는 효율이 최고는 아니지만 무료이기 때문에 현재는 대세를 장악하여 거의 이 규약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실제 개인이 internet을 하기 위해선 pc상에서 브라우저(browser)란 프로그램을 통해서 하게 됩니다.
우리나라에서 흔히 쓰는 microsoft internet explorer는 microsoft란 회사에서 만든 브라우저로서,
상용(商用) 프로그램 이름일 따름입니다.
최근엔 firefox란 무료 브라우저를 사용하는 사람도 생기고 있듯이
internet을 반드시 microsoft internet explorer만으로 하란 법은 없지요.
여담입니다만 브라우저(browser)에서 browse는
소가 목초지를 거닐며 풀 싹을 사각사각 먹는 것을 말합니다.
그처럼 사람들은 이 거대한 정보망을 섭렵(涉獵)하며 정보를 취하고 있는 것이지요.

탐색기(explorer)를 사용하실 줄은 다 아시지요.
하드디스크에 갈무리된 파일을 찾는 등, 그를 관리, 조직하는데 사용하는 것 말입니다.
인터넷을 잘 하신다고 하면서도 탐색기를 사용하실 줄 모르는 분들을 적지 아니 만납니다.
탐색기는 windows 자체에서 제공하는 것으로 프로그램 이름은 영어로는 그냥 explorer입니다.

앞의 (ms) internet explorer 든 탐색기이든 모두 explorer입니다.
무엇인가를 탐색, 탐험하는 도구들입니다.

자 이제 준비가 되었으니 제 이야기의 첫번째 주제를 잠깐 보실까요.
이번에도 이야기가 길어지니 부득이 고갱이만 추려야겠습니다.
이런 얘기들은 절을 나누어 연재 형식으로 차근 차근 하여야 합니다만,
제 마음도 바쁘고, 이곳 사랑방 멍석을 이리 차지하는 게 적당한 것인지 조금 걱정도 되어
의미 전달이 훼손되지 않는 한도 내에서 바짝 줄여 처리하고자 합니다.
그 대신 조금 거칠 수 있습니다. 양해가 필요한 구석입니다.

탐색기를 보시면 폴더(folder)가 있습니다.
폴더는 하위 폴더(sub folder)를 가질 수 있는데,
그 계층구조(hierarchy)가 가지치기 식으로 무한정 새끼를 쳐 내려갈 수 있습니다.
이런 자료구조를 tree 구조라 부릅니다.

반면 internet explorer는 http란 문서규약의 제약하에 정보통신이 이루어집니다.
이 규약의 구체적 구현.실천 언어는 흔히 알려진 html(hyper text markup language)입니다.

탐색기와 internet explorer(IE, 이하 IE라 칭함.)
이 양자는 처리해야 할 대상 정보를 대하는 형식이 이렇게 다릅니다.
지금 전 그 형식을 관통하는 기본 사고방식의 차이, 이를 말하려고 합니다.

탐색기는 나무(tree) 구조이기에 뿌리가 있고, 가지가 있습니다.
마치 기업조직처럼 사장, 이사, 중간관리층, 사원 등의 피라밋 수직체계입니다.
최근까지 인간 조직의 역사는 거의 전부 이런 수직적 통제 위주의 질곡에 갇혀 있었습니다.
제가 질곡이란 가치평가적 표현을 쓴 것은 조직의 효율을 도모하기 위해
조직원들의 개성이 적지 아니 몰각된 형편이었음을 두드러지게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반면 IE는 http란 규약 하에 작동됩니다.
http는 hyper text transfer protocol의 약자입니다.
hyper가 초(超)를 뜻하듯이 text의 세계를 초월한 정보통신 규약이란 뜻입니다.
text는 흔히 아는 일반적인 글, 문서 정도로 이해하시면 되는데,
이로부터 문서 자체만으로 완결되는 자족적(自足的)인 독립 형식을 유추하시면 되겠습니다.

hyper text 즉 기존의 text란 닫혀 있는 형식을 뛰어넘는(hyper) 그것.
이게 무엇입니까 ?
자신의 문서(text, document)에 상대의 닷(anchor)을 심어 그를 마중하는 의식(儀式).
그게 바로 인터넷에 거미줄처럼 깔려 있는 LINK라는 것입니다.
이 닷이란 장치를 통해 우리는 자신과 타자 사이에 다리를 놓습니다.
물론 타자(他者)도 필요대로 상대의 닷을 제 밭에 씨앗처럼 뿌려둡니다.
견우와 직녀는 칠석날 단 하루 오작교를 통해 정을 풀지만,
현대 netizen은 internet(LINK)이란 가교를 통해 사시장철 정(情)을 나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상하관계가 아닌 연인 사이의 수평적 교정(交情), 이게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한자어 정(情)은 의(意), 실(實)의 뜻을 아우르고 있으니
곧 신표(信標), 서신, 정보 등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text는 정보 생산자가 소비자에게 정보를 일방(one-way, mono-lateral)으로만 전하는 구조이지만,
hyper text 구조는 본원적으로 쌍방향(bi-lateral) 또는 이를 넘은 다극방향(mutil-lateral) 구조입니다.
탐색기에서 보듯이 그들은 피라밋 구조이기에 관계망은 一對多입니다.
그런즉 一에 多가 복무하는 수직 구조입니다.
반면 internet은 多對多의 평등 관계망입니다.
수미(首尾) 즉 머리와 꼬리가 없는 연환(連環) 또는 망상(網狀) 구조입니다.

이 http 규약을 통해, 이제 비로소 누천년 인간을 주술처럼
주박(呪縛)하던 피라밋의 강고한 사슬을 끊은 것이지요.
그것이 비록 가상공간내 소통의 현장에 한(限)한 것이지만 그 파급 영향은 자못 큽니다.
물론 지금의 인터넷 환경 이전에도 hyper text 형식은 있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게 사전의 단어 탐색, 조직 형식이지요.
사전에서 어떤 단어 뜻을 찾아 들어 갔는데, 그 풀이 문자 중에 모르는 단어를 또 발견 합니다.
이럴 땐 다시 그 단어를 미궁인 양, 이어 찾어 들어갑니다.
이런 식으로 무한 검색을 해 나갈 수 있습니다.
이 경우 그 행위 순간의 자리에서 구태어 머리와 꼬리를 따진다는 것이 무의미합니다.
어느 순간이라도 도상(途上-길 위에)에 있을 뿐인 게지요.
물론 이 경우는 사전을 손으로 일일이 찾아야 하기에 몹시 번거럽지요.
그런데 인터넷의 경우 얼마전 다른 글에서 얘기한 놀라운 computing 기술을
하부구조에 깔고 있기 때문에 간단히 마우스 클릭만으로 이런 물리적 제한을 극복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 비로소 만인평등의 개벽(開闢)이 도래한 것입니다.
전 주저없이 이를 개벽이라고 말합니다.
유사이래 전 세계적인 차원에서 수평 사회 구조를 구현한 것은 이것이 최초입니다.
비록 가상공간(cyber space)에서 이루어진 것이지만 그 파급력은 번개치듯 빠르고 벼락치듯 강력합니다.
물론 internet 하부의 물적 토대, 기술적 진보 등의 역할을 과소 평가할 수 없겠지만,
hyper text 구조는 이의 가장 중요한 핵심 요소이기에 이를 앞세워 풀어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 가상공간(cyber space)도 선점적(preemptive) 잇점을 노린
상업적 침탈 등 마냥  평화롭지는 않습니다.
그렇다 하여도 internet의 본질적 평등구조 자체는 변함이 없습니다.
더우기 xml 기반기술로의 진화, 자아선언을 기치로 한 blog란 새로운 형식의 시도 등
끊임없는  자유항해(自由航海)를 향한 열정이 뜨겁게 불타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internet상의 소통 형식이 만인평등의 수평적인 구조라는 것을 확인해 보았습니다.
이어 그 형식체계의 의미구조를 살펴봅니다.

2. indranet-인드라망(因陀羅網)

인드라망(因陀羅網)이라고 들어 보셨습니까 ?
불교에 의하면 우리가 사는 이 땅은 수미산 남쪽 남섬부주에 속합니다.
사실 불교의 우주관은 인도 고유의 종교 힌두교를 차용한 것이 많습니다.
여기서 얘기 할 제석천(帝釋天)은 힌두교의 인드라의 습합(襲合) 결과입니다.
(* 오늘 인드라망을 설명하자면 도리없이 수미산을 얘기하여야겠기에 불교를 듭니다만,
혹 종교를 달리하시는 분이 계시더라도 종교적 편견을 드러내려는 의도는 전혀 없으니,
널리 양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특정 종교의 이야기로서가 아니라 그냥 인도 문화, 철학 일반이라 여겨 주시기 바랍니다.
실제로도 제가 앞으로 얘기 하려는 내용은 불교 자체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영혼의 땅 인도대륙에서 피어난 저 아득 웅혼(雄渾)한 아름다운 이야기일 뿐입니다.)

수미산 꼭대기에 도리천이 있고 그곳에는 궁궐 격인 선견성(善見城)이 있습니다.
이곳의 주인(임금)인 제석천(帝釋天)이 그 궁궐에 사십니다.
이 제석천은 사방(四方)에 있는  三十二天과 수미산 중턱에 사는
사천왕을 거느리고 불(佛)과 불법(佛法)을 수호합니다.
인드라망은 본디 이 제석천이 사용하는 무기로서, 수많은 보배 구슬이 그물코마다 달려 있습니다.
이 보배 그물을 흔들면 서로 빛을 발하게 되고 이것으로 아수라 군사를 정벌합니다.

그런데 그 그물 코에 달려 있는 보주(寶珠)의 하나 하나 마다에
각각 다른 낱낱 보주의 영상(影像)을 나타내고,
그 한 보주 안에 나타나는 일체 보주의 영상마다
또 다른  일체 보주의 영상이 나타나서 중중무진(重重無盡)하게 됩니다.
(* 중중무진(重重無盡) - 거듭 비추길 다 함이 없다. 즉 한없이 되 비춘다란 뜻.)

화엄(경)에서는 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를 논하며
이것을 一과 多가 상즉상입(相卽相入)하였다고 말할 때, 전례로서 들고 있는 것입니다.
현대물리학의 상대성이론내지는 양자역학과 이 인드라망 사이의 상사(相似, analogy)를 들어
불교인들이 자존을 건져 올리기도 합니다만,
불교적 우주관이 온전(穩全)히 과학을 포용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불교는 철저히 마음자리를 참구하며 진여(眞如)의 세계를 탐험(explorer)합니다만,
물리 또는 과학이란 철저히 경험의 세계를 가설, 실험을 통해 입증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물론 소승(小乘) 소의(所衣) 경전인 구사론(俱舍論)의 정치(精緻)한 원자론은
희랍의 원자론보다 몇배 더 훌륭하며, 현대 물리학의 보어의 원자구조 못지 않게 지극정밀합니다.
그외 유식(唯識), 화엄(華嚴)등의 세계도 실제 현대 물리학의 상상력을 자극하여
가설체계로 차용되기도 하는 등 충분히 놀랍고도 재미있습니다.
칼융의 무의식 연구도 이에 기(基)하고 있음이니 마냥 경계하는 것도 능사는 아닙니다.

internet에서 url의 앞에 붙여 쓰는 www(world wide web)에 web이 거미집 아닙니까.
그 거미집 실이 교차하는 하나 하나마다
개별 site 내지는 이를 이용하는 사용자가 처(處)하여 있는 셈이니,
이들은 곧 인드라망의 보주(寶珠)와 다를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 개별 사용자들이 LINK로 중중무진 서로 상하종횡(上下縱橫)으로 연결되어
가상공간(cyber space)이란 소통(疏通)의 장(場, field)을 창출하는 것이지요.

제가 이전에 "선생님과 님"이란 주제로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선생님이란 어의(語義)에는 상대에 대한 존경심이 품안겨 있습니다.
한편 ooo씨라 할 때, 씨는 아랫 사람에게 쓸 수는 있지만 웃사람에겐 쓸 수 없습니다.
대체로 이 말은 그리 품위 있는 말거래씨는 아닙니다.
"님"은 시에 등장하듯이 사랑하는 연인의 호칭으로 쓰이곤 합니다.
"님"은 인터넷 용어로는 제법 무난하다고 생각합니다.
인터넷에 참여한 사람들은 남녀노소부귀귀천 불문하고 하나의 단독자(單獨者)로 임(臨)합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신 앞에선 주체적 자아"를 단독자라 불렀습니다만,
저는 인터넷 상에서 네티즌은 신이 아닌, 스스로에게 책임지는 주체적 자아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단독자들이 스스로에게 책임을 지고 타자(他者)와 소통할 때라야
투명하게 비추고, 비추이는 인드라망을 만들어낸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인터넷은 종교, 철학, 사상, 인종 등 일체의 차별적 장애를 초월하여
마.주.하.는.유.사.이.래.최.초.의.평.등.공.간이란 생각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다소 무기미(無氣味)한 "님"이 적절해 보이는 것이지요.
님이란 말은 원래는 사랑하는 상대에 대한 애틋한 정을 상기시킵니다만,
인터넷 상에서 쓰이는 님은 이젠 그런 정은 거세(去勢)된 느낌입니다.
공식적인 존재 인식외에 별다른 인간적인 깊은 정감을 자아내지는 않습니다.
인드라망 그물코에 꿰인 그 보주와 같은 단독자를 보주라 부르면 어떨까 ?
ooo보주 ?
좀 어울리지 않는군요.
그러나 상대를 보주(寶珠)처럼 대할 만은 하다는 생각입니다.
함께 인드라망을 만들어 가는 귀한 존재들이니까요.

우리가 광화문 네거리에서 촛불집회를 할 때, 바로 인드라망의 체현을 볼 수 있습니다.
내가 든 촛불꽃이 함께 모인 군중들 낱낱 상대의 눈에 어리고,
그 눈을 마주한 눈들은 각각의 눈에 물든 촛불꽃을 중중무진 이어 비추게 됩니다.

사실은 인드라망 자체가 구속이기도 합니다.
그 그물망을 찢고 절대자유의 세계로 나아가는 해탈의 세계,
그리고 web 이란 그물에 걸려 파닥이는 나비와 같은 현대인들....
실은 전번에 말씀드린 동산양개(洞山良价)의 화두가 겨냥하는 과녁은
이쯤에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중생을 펼쳐놓고 가두고 조이며 궁박(窮迫)하는 이 잔인한 그물 구도(構圖).
이게 정작 실상입니다만, 오늘의 주제와는 궤를 달리 하기에
이런 측면에 대한 말씀, 지금은 거르기로 합니다.

(* 불교의 경우 화엄경을 통해 웅장한 스케일로 펼쳐지는 우주관을 접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성경외 존 번연(John Bunyan)의 천로역정, 단테의 신곡 등이 참조할 만합니다. )

3. 양자역학과 아름품

제 개인적인 얘기라 죄송합니다만, 이곳에 이르러 옛날을 상기합니다.
저는 인도철학을 예전에 훔쳐서 배웠습니다.
동국대학교에 계시던 김oo 교수님이 저희 학교에 오셔서 하시는 강의를
전학기 도강(盜講)하였음을 고백합니다.
당시의 제 전공보다 더 열심히 경청하였습니다만 그 경건한 수업 분위기를 아직도 잊지 못합니다.
김oo 교수님은 물리학에도 조예가 깊으셔서
불교, 인도철학, 물리학을 아우르면서  새로운 세계를 전망해주셨습니다.
지금이야 불교와 물리학에 대한 비교 논문이 적지 아니 나오고 있지만
당시로는 김oo 교수님이 거의 독보적으로 연구를 많이 하셨지요.
제 정신적 자양분의 원형질은 실로 그로부터 배태(胚胎)되었음이니, 새삼 옛 일이 상기되는군요.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물리학은 (고전)역학, 파동학, 전자기학, 양자역학, 통계역학 등의 카테고리가 있는데,
현대 물리학의 두가지 중요 주제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quantum mechanics)입니다.
아인슈타인은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라며
통일장 이론을 구축하려 하였지만, 완결하지 못합니다.
결국 양자역학의 전개를 보면서 그도 서서히 이를 수용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양자역학(量子力學)은 플랑크, 슈뢰딩거, 디락 등에 의해서 구축된 이론입니다만,
1927년 하이젠베르그의 불확정성 원리를 도입하여 확립됩니다.
양자 역학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이렇습니다.
어느 입자의 운동량과 위치를 동시에 측정하는 데에는 필연적인 오차가 수반되며,
각 물리량 측정의 불확정성의 곱이 h(플랑크 상수)에 구속된다는 것입니다.
(정확한 식은 →)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를 풀어 설명하면 어느 입자의 위치를 정확히 알려는 순간, 그 속도를 그 만큼 제대로 알 수 없고,
반대로 입자의 속도를 정확히 알려는 순간, 그 위치를 그 정도만큼 제대로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인간이 전자의 움직임을 파악하려고 한다고 합시다.
전자의 움직임을 빛을 통해서 파악하게 되는데,
관찰하는 순간 빛 입자가 전자에 부딪혀 전자의 위치를 교란하게 됩니다.
즉 관찰자의 개입을 수반한 전자의 움직임밖에 확보할 수 없는 게지요.
전자 고유의 움직임은 관찰자가 관찰을 하지 않아야 얻을 수 있는데,
관찰을 하지 않고는 정보를 얻을 수 없는즉 필연적으로
측정에는 측정오차가 내재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전자의 위치를 확률적으로 파악하는 것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이런 확률의 세계인즉 극단적으로 얘기하면
물이 100도뿐이 아니라 0도에서도 끓을 수 있는 확률이 있을 수 있는 것이지요.
다만 0도에서 끓을 수 있는 확률이 지극히 적을 뿐인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중요한 깨달음을 얻습니다.
존재는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가능태(可能態)에 놓여 있으나, 현실태(現實態)로 고정될 때,
그 가능태 중 하나로 발현되는 것이지요.

인드라망의 각 보주(寶珠)들은 만상(萬象 또는 萬相)을 다 보지(保持)하나
각자는 개별적인 개성을 갖는 존재인 것이지요.
이 때 만상으로서의 그것이 가능태, 개별적 존재가 현실태로 배대(配對)되는 것입니다.

자 이러니,
그 무엇을 주(主)와 객(客)으로 나누어 본다는 것이
사물의 본질을 볼 수 없게 하는 원인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지요.
즉 이런 이분(二分)의 조건하에선 주(主)가 객(客)을 인식할 때,
필연적으로 양자역학적 인식교란이 발생하고 이는 정확한 인식을 근원적으로 차단합니다.
그러니 주(主)와 객(客)이 하나가 되기 전에는 온전한 인식(認識)이 불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일심(一心)을 유일의 실재로 보는 대승기신론의 입장과도 맥을 닿고 있는 것입니다.
또는 연기론(緣起論)의 묘한 물리학적 단서를 발견하게 됩니다.

시인 김춘수는 이리 노래합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내가 이름을 부여하기 전까지는 가능태의 세계입니다.
그러나 이름을 부르는 순간 그는 현실태로서 내 앞에 현전하는 실존이 됩니다.
김춘수로 인해 양자역학이 이젠 시가 됩니다.

일각에선 사유 또는 언어적 비유의 세계관을 경험 실재의 세계관에 대입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날선 비판도 있습니다.
현전하는 실제의 세계만이 유일의 것이지
cyber space, 인드라망의 세계란 가상의 세계에 탐닉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경계의 목소리도 있습니다.

물론입니다.
그러나 지금 cyber space란 이제 단순히 가상의 세계만으로 치부할 수만도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실제의 세계와 유리된 별도의 세계가 아니라 속속 실제의 세계에 편입되고 있습니다. 
비근한 예로 옥션 등의 online 소비활동 척도,
즉 사용인구, 매출액 등의 통계 수치는 년년세세 높아만 가며,
일부 품목의 경우 offline의 판매총량을 넘어 서기까지 하고 있습니다.
사태가 이 지경인즉, 이 cyber space를 글자 그대로 가상의 세계라 강박하는 것이야말로
비현실적인 태도가 돼버리고 말았습니다.

아름품 소개란에 아름품 이름에 대한 안내 글이 이리 나옵니다.

 
 아름품은 <동물을 위한 아름다운 마음, 따뜻한 품>의 줄임말입니다.
 

이 글을 보자 전 짜릿한 화엄의 세계를 보는 듯 싶었습니다.
모두들 인간 중심으로 판 짜 돌아가는 이 남섬부주의 한 귀퉁이,
그것도 사이버 스페이스 일우(一隅)에 불과한 이곳에 외연을 넓혀 타자(他者)를 향한 등불을
그 누가 들 수 있으리라 감히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
인간끼리도 치열한 다툼, 전쟁이 일어나는 형국에
항차 다른 종(種)을 향한 아름다운 마음을 어느 누구한테 어찌 기대할 수 있겠는가 말입니다.
더우기 " 따뜻한 품"이란 말에 전 주목합니다.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다 한들 생각에 그친다면 무삼 소용이 닿겠습니까 ?
품으로 그들을 끌어 안는 구체적인 행동이 따를 때라야 그 마음은 실답게 영그는 것.

이야말로 보주(寶珠)로서 상즉상입(相卽相入)하는 경계(境界)를 드러내는 바이니
바로 이곳 아름품이야말로 인드라망의 실천적 체현장(體現場)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지요.

아름품이 시.공간에 소맷자락으로 흩뿌려 펼치는 꽃바다 화엄(華嚴)의 의미공간이야말로
저 아수라의 침공을 막아내는 제석천 무기로서의 인드라망, 그 변전태(變轉態)가 아닌가 싶은 것입니다.
남섬부주 특히 한국 땅에 사는 인간의 동물관이란 실로 아수라보다 못한 지경인즉
아름품이 섬섬옥수로 휘젓는 인드라망에 포획되지 않을 수 없으리라 기대해 보는 것입니다.

저의 앞 선 글 "야묘소묘 (野猫素描)"의 말미에서
(※ 참고 글 : ☞ 2008/02/21 - [산] - 야묘소묘(野猫素描))
저는 이리 말씀 드렸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나름의 방식으로 지옥을 살아 가고 있을 따름입니다.
 그 길을 뚜벅뚜벅 걷습니다.
 물론 같은 길을 걷는 이들이 무리를 짓기도 합니다.
 이것이 단(團)이지요. 이름처럼 달 둥근 그것.
 

단(團)을 짓는 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단원(團員)은 서로 마.주.쳐.다.보.며 격려하고 이끌며 같은 꿈을 지향합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둘이 서로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같은 방향을 쳐다보는 것임을 우리는 경험으로 안다.  
『A. 생떽쥐베리 - 인간의 대지』
 

그렇습니다.
서로 마주 보는 이들이 있는 반면,
멀리, 같은 곳을 쳐다 보는 이들도 있는 것입니다.
사랑의 자리는 이리도 넓습니다.

이제 생떽쥐베리 말을 이리 앞세우며, 제 말씀을 드리지요.
저는 지금 아름품의 사랑채에 든 뜨내기 과객에 불과합니다.
비를 긋고자 여염집 대문을 기웃 거리다,
묘향(妙香)에 취해 염치 버리고, 사랑채에 틈입(闖入)한 과객.
며칠 눌러 붙어 허기를 끄고, 길을 떠날 길손인 게지요.
그 길손을 어여삐 여겨 국밥 내주시고, 미주(美酒)를 더해주시니
축객(逐客)이나 당하지 않으면 행으로 여길 처지엔 분에 넘치는 호사지요.
비록 스쳐 지나는 인연일지언정 어차피 인드라망에 갇혀 있음이니
빛 돌려 비추어(返照) 늘 마음은 함께 하리란 위안을 갖습니다.
내내 사랑과 행운이 그득하기를 비옵니다.

혹 그리움 이끌려 들리더라도 그냥 새로 든 길손인 양 여겨 주십사.
마지막으로 제가 가끔 읆조려 보는 시를 함께 하고자 합니다.

처세간여허공(處世間如虛空)
여연화불착수(如蓮華不着水)

세상 살이를 허공과 같이 하라.
저 연꽃이 물 속에 피어나
그에 염착(染着-물들지)되지 않음과 같이...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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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12.12 19:48 PERM. MOD/DEL REPLY

    비밀댓글입니다

  2. 2008.12.18 18:09 PERM. MOD/DEL REPLY

    비밀댓글입니다

    아프냐 2008.12.12 23:33 PERM MOD/DEL

    우연히 처음 여기에 왔을때 실험당하는 생명들을 보고서 참담함으로 새벽을 맞았던 기억입니다 아프냐...나도 아프다 유행했던 사극의 대사이기도 합니다 그렇잖아도 반말투로 던지듯해서 싸가지가 없어보이나? 했는데 친절하신 권유에 생각이 갑니다. 부처의 印 궁금하여 기다리겠습니다

    bongta 2008.12.18 18:10 PERM MOD/DEL

    아 그렇군요.
    저는 TV를 보질 않아서 그런 것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아프다라는 게, 통상의 뜻이 아니라,
    유마거사의 아픔,
    실험 동물을 보고 느끼는 아프냐님의 그런 아픔이라면,
    그것은 대자대비의 발현이니,
    그 또한 충분하겠군요.

    아름다움이란 실로 이런 마음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관대,
    저의 기우가 오늘 하루의 오해로 그치고,
    외려 더욱 저들 아픈 중생들을 향한 자비로 회향될
    아름다운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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