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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불망보(施不望報)

소요유 : 2008. 9. 2. 13:24


시불망보(施不望報)

이런 뜻의 말은 불경에도 자주 등장한다.
‘베풀되 갚음을 바라지 않는다.’라는 뜻이겠으니,
금강경의 핵심사상인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는
보시를 하되 어디 머무른 바 태(態)없이 하라 이르고 있음이다.
마치 기러기가 호숫가를 나르되 그 자취가 남음이 있는가?

이는 은혜를 베푸는 이의 입장에서 그러하나,
반대로 은혜를 입은 사람은 어떠해야 하나?

흔히 은혜를 모르는 사람은 인간사회에서 아주 몹쓸 사람으로 치부된다.
하니, 은혜를 입은 자는, 이를 뼈에 새겨 되갚아야
사람 노릇을 제대로 하였다 가르쳐지곤 한다.

과연 그런가?

만약 어떤 이가 있어, 남에게 은혜를 베풀었다 하자.
그가 이를 들어 시도 때도 없이 상대에게 부담을 준다면,
이게 이제는 거래로 전락하게 된다.
나아가 교묘한 기획 연출 또는 모종의 꾀하는 바, 기도(企圖)였다는 의심을 받아도 도리가 없다.

반대로 은혜를 입고도,
바로 잊어버리거나, 고마운 것을 모르고 오히려 제 이해를 도모하는데 이용한다면,
이 또한 여간 배은망덕(背恩忘德)한 노릇이 아니겠다.

불교에서 말하는 무주상보시는 대가없이 무조건적인 보시를 행하는 것인즉,
당연 상대로부터의 갚음을 기대하지 않는다.
흔히 말하는 삼공(三空)이란 무엇인가?
보시하는 주체, 보시 받는 객체, 보시하는 물건의 세 가지 모두 공(空)함을 말하고 있음이 아닌가?
그러한데, 보시가 그 행으로 끝나지 않고, 그 후를 예정하고 있다면, 어떨까?
가령, 보시의 후과(後果), 즉 그 공덕을 얘기함은 이 또한 얼마나 어줍지 않은가 말이다.

예컨대, 유상보시는 과수에 거름을 땅위에 흩어 주는 것과 같고
무상 보시는 거름을 한 후에 묻어 주는 것 같다는 혹자의 풀이는 또한 얼마나 공허한 노릇인가?
유상, 무상을 거름에 비유하여 나눌 수 있을까?
거름이라고 의식하는 한에 있어서 이내 모두 유상(有相)이 되버리고 만다.
흙 속에 묻혀 있다고 무상(無相)이라 할 수는 없다.
무상이라 불릴진대, 어찌 거름이란 흔적을 남길 수 있으리오.
하니, 사뭇 구차한 풀이라 하겠다.

여기 옛 이야기를 소개한다.
사뭇 긴 이야기이지만, 내친 김에 이리 새겨둔다.
하지만, 내겐 아주 중요한 이야기들이다.

***

진(晉)나라의 양설직(羊舌職)의 정실부인 소생으로 양설적(羊舌赤), 양설힐(羊舌肹) 형제가 있었다.
그 부인이 데리고 있던 노비와 양설직이 상관하여 낳은 또 다른 서출이 있었으니,
이자가 양설호(羊舌虎)이다.

후에, 양설호는 난영(栾盈) 일당과 함께 반역죄에 몰려 사로잡힌 몸이 되었다.
이에, 양설적, 양설힐은 그와 형제라는 이유만으로 죄인이 되어 붙들려 왔다.

이 때 대부 낙왕부(樂王鮒)는 진평공(晉平公)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
낙왕부는 평소부터 양설적, 양설힐 형제가 어진 사람이란 걸 알고서 서로 사귈 뜻을 가지고 있었으나,
아직 그런 기회를 얻지 못했었다.
그러던 중 낙왕부는 양설적, 양설힐 형제가 죄인으로 붙들렸다는 소문을 듣고 즉시 조문(朝門)으로 갔다.

낙왕부가 양설힐 앞에 가서 읍하고 위로한다.

“그대는 근심 마오.
내 상감께 가서 그대가 풀려나오도록 힘껏 주선하겠소.”

“.......................”

그러나 양설힐은 전혀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이에 낙왕부는 도리어 무안해서 얼굴을 붉히고 궁으로 들어갔다.

양설적은 곁에서 동생이 낙왕부의 호의를 싹 무시하는 걸 보고서 꾸짖었다.

“까딱 잘못하면 우리 형제는 이곳에서 다 죽는다.
그러면 우리 양설씨(羊舌氏)는 자손이 끊어지고 만다.
지금 대부 낙왕부는 상감의 총애를 받는 처지며 그의 말이면 상감도 다 들어주시는 판이다.
이럴 때,
낙왕부의 호의에 감사하고 그의 힘을 입어 우리가 살아나야만 조상의 대나마 이을 수 있지 않나뇨.
그런데, 너는 어째서 낙왕부의 고마운 호의를 그렇게도 싹 무시해버렸느냐.”

그제야 양설힐이 웃고 대답한다.

“형님! 사느냐 죽느냐는 것은 천명(天命)입니다.
만일 하늘이 우리 형제를 도우신다면 노대부 기해(老大夫 祁奚)께서 힘써 주실 것입니다.
그까짓 소인(小人)놈 낙왕부 따위에게 부탁해서 뭣합니까!”

양설적이 불평한다.

“그래도 낙왕부는 날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상감 곁을 모시는 사람이다.
너는 노대부 기해를 믿는 모양이지만 그 어른은 이미 벼슬을 내놓고 한가히 계시는 몸이다.
그러니 어느 쪽이 더 우리의 힘이 되어 줄 수 있겠니?
난 네가 말하는 뜻을 알 수 없구나!”

양설힐이 설명한다.

“낙왕부는 상감에게 아첨하는 것만 압니다.
임금이 옳다고 하시면 그는 무조건 옳다고 합니다.
임금이 부정하시면 그도 무조건 부정하는 그런 위인(爲人)입니다.
그래서, 그는 임금의 총애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노대부 기해는 옳다고 생각하면 모든 사람과 원수 간이 될지라도
자기 소신(所信)을 굽히지 않으며, 또 옳지 못하다고 생각할 때엔 평소에
아무리 친한 사람일지라도 자기의 신념을 위해서 사정(私情)을 두지 않습니다.
그렇게 강직하신 노대부 기해께서
어찌 우리 양설씨가 멸족(滅族)하는 것을 내버려 두실 리 있습니까?”

한편 궁내(宮內)에선 진평공이 조회(朝會)에 나왔다.
진평공이 낙왕부에게 묻는다.

“양설호가 난영의 일당이라는 건 익히 들었다마는 그의 형 양설적과 양설힐도 난영과 한 패였단 말인가?
혹 그대는 증거가 될 만한 그런 사실이라도 들은 일이 있는지!”

이 때, 낙왕부는 조금 전에 무안당한 것을 잊지 않았다.

“이 세상에 제일 친한 것은 형제간입니다.
동생이 그런 짓을 했는데 어찌 그 형이 모를 리 있겠습니까?”

마침내 진평공은 잡아 온 자를 다 옥에 가두게 하고 사구(司寇)에게
“일일이 그들의 죄를 다스려라.” 하고 분부했다.

이 때 노대부 기해는 이미 벼슬을 내놓고 기(祁) 땅에서 한가히 늙은 몸을 조섭하고 있었다.
한편, 기해의 아들 기오(祁午)는 궁에서 벼슬을 살고 있었기 때문에
양설적과 동료 간이어서 서로 절친한 터였다.
기오는 급히 사람을 기읍(祁邑) 땅으로 보내어 그 아버지 기해에게 양설적 형제를 구출해 달라고 청했다.

아들 기오의 서신을 다 읽고 기해는 크게 놀랐다.
기해는 수레를 타고 밤길을 달려 강주성으로 향했다.
기해는 도성에 당도하는 즉시로 범개를 찾아갔다.
범개가 기해를 황망히 영접하며 묻는다.

“연만하신 노대부께서 먼 길을 이렇듯 왕림하셨으니 무슨 교도(敎導)하실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기해가 대답한다.

“노부는 우리 진(晉)나라 사직의 존망(存亡)을 위해서 왔소.”

범개가 크게 놀라 묻는다.

“사직에 관한 일이라니 무슨 일입니까?”

“원래 어진 신하는 바로 사직의 주석(柱石)이오.
양설직은 살아생전에 우리 진나라를 위해 많은 공로를 세웠소.
지금 그 아들 양설적과 양설힐은 능히 그 아버지의 훌륭한 점을 이어 받은 어진 신하들이오.
이번에 서자인 양설호가 불초(不肖)한 짓을 했기로서니 그 집안을 모조리 죽인다면 어찌 아깝지 않으리요.
옛날에 극예(郤芮)는 역신(逆臣)이었지만 그 아들 극결(郤缺)은 궁에서 대관(大官)을 지냈소.
아비의 죄도 자식에게 미치지 않거늘 항차 형제간 사이의 일이야 더 말할 것 있으리요.
그대가 사적(私的) 원한으로 무고한 사람을 많이 죽이면 이는 옥과 돌을 동시에 태워버리는 짓이오.
어찌 이 나라 사직이 위태롭지 않겠소?”

범개가 일어나 자리를 피하며 대답한다.

“참으로 노대부의 말씀은 지당합니다.
그러나, 아직 상감의 진노(震怒)가 풀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노대부와 함께 상감께 가서 이 일을 아뢰는 것이 유리하리라고 생각합니다.”

두 사람은 함께 수레를 타고 궁(宮)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진평공에게 아뢴다.

“양설직 형제는 결코 그들의 서제(庶弟)인 양설호와는 인품부터가 다릅니다.
양설적과 양설힐 두 형제만은 난씨 일당에 관여한 사실이 없습니다.
또 양설씨가 이 나라에 끼친 공로와 장차 이 나라에 끼칠 수 있는 공로를 생각하셔야 합니다.”

진평공은 그제야 크게 깨닫고 즉시 양설적과 그 동생 양설힐을 석방하게 하고
그들에게 다시 지난날의 벼슬을 줬다.

양설적과 양설힐은 풀려 나오자 바로 궁에 가서 진평공에게 사은(謝恩)했다.
궁에서 물러나오며 양설적이 그 동생 양설힐에게 말한다.

“우리가 이번에 살아 난 것은 다 노대부 기해 덕분이다.
그러니 그 어른께도 인사를 가자.”

양설힐이 대답한다.

“노대부 기해를 찾아가 뵈올 것 없습니다.
우리 형제를 위해서 애쓰진 않았습니다.
그러니 가서 무엇을 감사한단 말입니까?”

말을 마치자 양설힐은 혼자서 수레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래도 양설적은 양심상 그럴 수 없어서 기해를 뵈오려고 기오의 집으로 갔다.
기오가 양설적에게 말한다.

“우리 아버지는 상감을 뵈온 뒤 즉시 기읍(祁邑) 땅으로 돌아가셨지요.
내 집엔 들르시지도 않았소.”

양설적은 집으로 돌아가면서 길이 탄식했다.

“기해는 남에게 은혜를 베풀되 보답을 바라지 않는 분이다.
나는 내 동생 힐의 높은 식견만 못하구나!”

이쯤 되면, 기해가 베푼 것은 은혜가 아니다.
그것은 그저 정의(正義)일 뿐이다.
양설적, 양설힐 형제이기 때문에 구명운동을 벌인 것이 아니라,
옳은 일이기 때문에 그리 한 것이다.
그러하니, 양씨 형제에게 은혜를 베푼 것이 아니다.
마땅히 할 일을 하였을 뿐인 게다.
마찬가지로, 양설힐 역시 기해의 덕을 보았다고 여길 까닭이 없는 것이다.
당연히 그리 될 일을 누군가 행하였을 뿐, 그게 마침 기해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하니, 기해에게 새삼 사은(謝恩) 치사(致謝)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인정(人情) 거래(去來)가 아니라는, 두 사람 간에 이 암묵적인 동의(同意)가
청죽(靑竹)처럼 굳고 푸르니 사뭇 아연(啞然)하니 놀랍다.

그런데, 한편 생각해 보자니,
고장난명(孤掌難鳴)이라 양설힐이 아무리 강심장이라 한들,
기해라는 인물의 존재를 믿지 않았다면, 낙왕부의 호의를 쉽사리 외면할 수 있었을까?
아지 못할세라.
만약 기해라는 인물이 없었더라도, 양설힐의 기개(氣槪)가 그리 짙게 푸르렀을까?

기해가 있음으로서, 양설힐의 믿음이 빛을 발하고,
오상고절(傲霜孤節) 꿋꿋하니 미덥다.
하지만, 만약 기해가 없었다면, 양설힐이 과연 살아남을 수 있었겠는가?
혹여 이리 되어 그가 허망하게 죽어버렸다면, 이때에 이르러,
그 누군가 양설힐의 기개를 한낱 철없는 배짱이라고 기롱(譏弄)하며 놀리지나 않았을까?

***

그런데, 여기 조금 다른 이야기 한편이 또 있다.
자 이런 이야기는 앞의 이야기와 어떻게 다른가?

제(齊)나라에 월석보(越石父)라는
  (※  - 父는 통상 존칭, 애칭의 뜻으로, 사람 이름에 쓰여 보로 발음함.)
품행이 단정하고 재주가 뛰어난 인물이 있었다.
그가 한번은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가 감옥으로 끌려가던 도중에 마침 안영(晏婴)이 나들이 나왔다가 그를 발견했다.
안영은 삼두마차의 왼쪽 말 한 필을 풀어 속죄금으로 주고 풀려나게 한 후,
그를 마차에 태워 집으로 데려온다.
평소 내색하지 않는 성격인 안영은 월석보에게 아무런 말도 없이 안채로 들어가 버렸다.

얼마 후 하인에 의해 한 장의 문서가 안영에게 올려졌는데,
펼쳐보니 월석보가 보낸 서신이었다.
그 내용을 읽어보니 절교장이었다.
깜짝 놀란 안영이 의관을 바로 잡은 뒤 황급히 객실로 나아가 월석보에게 물어 말하였다.

“어디 화라도 나셨습니까?”

월석보는 대답하였다.

“그렇습니다.”

평소 월석보를 존경하고 있던 안영이 크게 놀라 말하였다.

“비록 신이 어질지는 못하지만 선생을 재앙에서 구해 드렸습니다.
그런데도 선생께선 이토록 급하게 절교를 선언하시다니요.”

“그렇지가 않습니다.
군자란 대개 자기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에게는 굴복하지만
자기를 이해해주는 자에게는 믿고 자기의 뜻을 나타낸다고 들었습니다.”

월석보의 비난에 안영이 공손하게 물었다.

“신이 선생을 이해하지 못한 점이라도 있었습니까?”

그러자 월석보는 대답하였다.

“들어보십시오.
내가 죄수들 사이에 있을 때에는,
그들 옥리들이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굴복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나를 이해하는 바가 있어,
타고 있던 말 한 필을 풀어 속죄금으로 내고 나를 풀어준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방법이 틀렸습니다.”

월석보는 안영을 정면으로 쳐다보면서 말을 이었다.

“당신은 모른 척 예를 무시하면서 곧바로 당신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결국은 나를 이해해주지 못한 것이 돼버렸습니다.
나를 알아주면서도 예의를 무시하신다면 나는 차라리 죄수들 속에 있는 것이 낫습니다.”

이 말을 들은 안영은 크게 뉘우치면서 말하였다.

“결례를 용서하십시오.
신이 거기까지는 생각이 못 미쳤습니다.
앞으로 선생을 상객(上客)으로 모시겠습니다.”

은혜를 베풀었으면서도 초탈한 안영,
그러나 禮를 지킴이 또한 요긴하다는 월석보.

***

안영이 만약 기해가 되어, 월석보의 양설적다움을 나무란다면,
문득 월석보가 이를 깨닫고 양설힐이 되었을까?

아니면, 양설적이 월석보가 되어, 기해를 나무라며 절연장을 보냈다면,
기해가 문득 안영이 되어 크게 뉘우쳤을까나?

다만, 은혜를 베푼 이가 상대에게 그 보갚음을 기대하지 않았음은
이 두 가지 이야기에서 공통된다.
하지만, 은혜를 받은 이의 사은(謝恩) 여부는 두 이야기의 서술 구조가 상이하다.

이 상반된 이야기들의 이동(異同)이 그리 거슬리지 않는 까닭은,
시불망보(施不望報)라,
즉 베푼 이가 모두 하나 같이 그 공덕(功德)을 내세우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하니 이런 토대 위에서
시혜를 받은 이가, 혹 의(義)를 내세우거나, 또는 예(禮)에 의지하며, 상호 다른 태도를 견지했다한들,
그 아름다운 뜻이 결코 훼손되지 않기 때문이리라.

***

시불망보(施不望報)

내 개인적으로도 이 말이 가슴에 깊이 와 닿는다.

푸르르던 지난 날 나는 대학 입학금을 지원 받았으니,
당시 일금 20만원이라,
하지만, 두고두고 이를 빌미로 시달림을 받았다.
하여, 중도에 되갚고 인연을 정리한 적이 있다.

베풀었은즉, 이내 그 사실 조차 잊어야 한다.
그 날 이후 이는 나의 깨달음이자,
내가 평생 행(行)의 준칙(準則)처럼 좇는 바라.

그게 아니라면, 이는 거래에 불과한 것,
결코, 은혜, 우정, 사랑이란 이름으로 그 자리를 장식하지 말아야 한다.
그럴 양이면, 차라리 정식으로 채권채무계약을 체결하는 것이 곱절은 고결하다.

시불망보(施不望報)!
삼공(三空)인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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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요유 : 2008. 9. 2. 13: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