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을 뱉다
춘추오패(春秋五覇)라지만, 그중에서도
제환공(齊桓公)과 진문공(晉文公)은 단연 뛰어나다.
진문공(晉文公)은 19년간 외국으로 망명하여 전전하다,
진목공(秦穆公)의 후원에 힘입어 뒤늦게 62세 때에 왕이 된다.
그리고도 천하를 장악하고 패자(覇者)가 된다.
그는 어느 눈 오는 날 죽었다하니, 퍽이나 낭만적이다.
그게 68세라 한다.
진문공이 죽자 그의 아들이 위를 계승하니, 이가 곧 진양공(晉襄公)이다.
정(鄭)나라 역시 당시 상중(喪中)이었다.
진(秦)은 앞서 진문공(晉文公)이 패자가 되어 천하를 호령할 때,
소외된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있던 차,
이번 정(鄭)과 진(晉) 양 나라가 상중인 어수선 한 틈을 타서, 일을 꾸몄다.
진목공(秦穆公)은 맹명(孟明), 백을병(白乙丙)을 장수로 삼아 정나라를 치도록 한다.
맹명(孟明), 백을병(白乙丙)은 각기 백리해(百里奚)와 건숙(蹇叔)의 아들들이다.
(※. 참고 글 : ☞ 2008/07/28 - [소요유] - 건숙(蹇叔))
하지만, 정나라의 현고(弦高)라는 소(牛)장사의 기지(機智)에 의해 진(秦)의 기습이 탄로 난다.
진(秦)은 부득이 작전계획을 변경하여 인접국인 소국(小國) 활(滑)나라를 치는 것으로 대신한다.
애매하게 활나라는 망하고 말았지만, 진(秦) 역시 본래 뜻 한 바를 이루지는 못한다.
문제는 진(秦)의 병사들이 귀국하는 일이다.
진(晉)이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이들을 여지없이 무찌르고 만다.
맹명(孟明), 백을병(白乙丙), 서걸술(西乞術)등 진나라 장수들은 진(晉)에게 크게 패하고,
자신들은 사로잡힌다.
이제야 비로소 내가 이야기 하고자 하는 장면에 이르렀다.
진양공(晉襄公)의 모부인(母夫人) 영씨(嬴氏)는 원래 진목공(秦穆公)의 딸이다.
진목공(秦穆公)이 망명중인 진문공(晉文公)을 아껴 딸을 내주었으니,
진(秦)과 진(晉)은 사돈지간인 것이다.
모부인인 영씨(嬴氏)가 진양공에게 넌지시 말한다.
“들은즉 우리나라 군사가 크게 이겨 맹명 등 적의 장수를 사로잡아왔다하니,
이는 사직의 복이로다. 알 수 없어라.
그 동안에 세 적장은 죽었는지?”
진양공이 아뢴다.
“아직 죽이지 않고 있습니다.”
영씨가 말한다.
“원래 진(秦)나라와 우리 진(晉)나라는 대대로 혼인한 사이어서 극친(極親)한 터이라,
그런데 맹명 등 몇 놈들이 공명과 벼슬을 탐하고
망령스레 칼과 창을 휘둘러 마침내 우리 두 나라의 극친한 정을 원한으로 바꿔 놨구나.
내 생각하건대 진(秦)나라의 임금은 깊이 그 세 놈을 원망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세 놈을 진(秦)나라로 돌려보내어 진(秦)나라 임금의 손으로
그놈들을 죽이게 함으로써 우리 진(晉)과 진(秦) 두 나라 사이의
원망을 풀면 이 아니 아름다우리오.”
진양공은 영씨의 간절한 설득에 넘어가,
진(秦)나라 장수들을 석방한다.
이 때 진(晉)의 원수(元帥) 선진(先軫)은 마침 자기 집에서 식사 중이었다.
그는 진양공이 진(秦)나라 장수 셋을 다 석방해 줬다는 말을 듣고 크게 놀랐다.
그는 씹던 음식을 뱉고 일어섰다.
그 길로 즉시 진양공에게 갔다.
선진이 노기등등하여 진양공에게 묻는다.
“진(秦)나라 죄수들은 어느 곳에다 가두어 뒀습니까?”
진양공이 대답한다.
“모부인이 하 청하시기에 그 말씀을 좇아 그들을 이미 석방했소.”
순간 선진은 진양공의 얼굴에 침을 탁 뱉었다.
“일을 이렇게 모르다니 참 어리석은 사람이로다!
장수들이 천신만고해서 겨우 잡아온 죄수를 그래 한 부인의 말만 듣고 놓아 줄 수 있는가?
범을 놓아 산으로 돌려보냈으니 다음 날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리오.”
신하가 아무리 격분했을지라도 임금 얼굴에 침을 뱉는 일은 전무후무한 사건이었다.
곁에 있던 신하들은 이 너무나 해괴한 사실을 목격하고 놀랐다.
그러나 진양공은 선진의 말에 비로소 크게 깨달은 바가 있었다.
진양공은 소매를 들어 얼굴에 묻은 침을 조용히 닦았다.
“과인의 잘못이로다.”
하고 좌중을 돌려 보며.
“누가 즉시 진(秦)나라 장수를 뒤쫓아 가서 그들을 잡아 올꼬?”
이후의 자세한 하회는 생략하거니와,
결과만 말하자면, 진(秦)나라 장수는 모두 놓쳐버리고 말았으며,
후에 선진은 진충보국(盡忠報國)하다,
전쟁터에 나가 자진하여, 적진에 단신 투신, 목숨을 내던져,
임금을 모욕한 죄를 갚았다.
불고이타(不顧而唾)의 고사(故事)를 이리 먼저 새겨두며,
이야기의 실마리를 풀어본다.
***
군대문화라는 것이 그리 고급이라 할 수 없다.
하지만, 내가 군대에서 배운 것 중 하나는 이런 것이다.
“책임진 자리에 임하여 어떠한 경우라도 변명하지 않는 것.”
설혹 자기가 잘못한 것이 아니라도,
상급자는 작전 임무 현장에 임한 자에게 책임을 묻는다.
이 때 수임자(受任者)가 이의 온당치 못함을 호소한들, 이미 적에게 패한 마당인즉,
무슨 도움이 되리.
하니, 임무를 맡은 자는 그 책임을 다 짊어질 수밖에 없다.
이 때라야 비로소 전쟁터에 나선 이들의 엄중한 책무가 또렷이 부각된다.
각자는 자기가 선 자리에서 자신의 책임을 다 짊어지는 것.
이런 이치를 깨닫게 되면,
외부에 자신을 변호하기 위한 변명이 곧 부끄러움에 다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
내 개인적인 경험으로 미루어 보건대,
대개의 보통 사람들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잘못을 지적당하게 되면,
이내 적당한 구실을 들어 변명하고, 항변하며, 나아가 역으로 상대를 공격까지 하곤 한다.
나는 이런 현장을 목도하게 되면,
이를 이리 규정한다.
“어리광”
“희석효과(Dilution Effect)”
전자는 아직 성인이 되지 않았음을 이르는 말이요,
후자는 자기 책임을 희석하여 죄의 현장을 은폐하려는 비겁함을 지적하는 말이다.
이 때, 나는 진양공을 떠올린다.
내가 선진을 사모하여 상대에게 침을 뱉기로 한다면,
내 침이 사뭇 걸쭉하니 그만 못할 손가?
하지만, 상대가 진양공일 행운은 감히 기대할 수 없으니,
그만 참을 수밖에 없음이다.
아무나 붙잡고 거래를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말이다.
거래를 하려도 상대가 그에 걸맞지 않으면,
욕만 더하는 노릇일 터.
잘못하다가는 봉변을 당하고 만다.
선진은 이미 진양공의 그릇을 알고 있음이라,
과히 그 임금에 그 신하라 할 터,
고장난명(孤掌難鳴)이니,
외손뼉만으로 어찌 소리가 날 수 있으런가?
선진은 참으로 행운아인 게다.
마음껏 침을 뱉어 임금을 사랑하였으며,
자진하여 목숨을 버려 충성을 보였음이라.
천하의 대장부(大丈夫)라 할사.
진양공은 또 어떠한가?
이런 인자(仁者), 인자(忍者)라니,
과연 그를 위해 목숨을 버려도 아깝지 않겠고뇨.
무릇 사내대장부의 거래(去來)가 이러함이라.
삼가 살필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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