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수불가여동군(鳥獸不可與同羣)
한 나라의 왕으로서 백성보다 동물을 더 귀히 여긴 자로서,
나는 주(周)나라의 자퇴(子穨)와 위衛)나라의 의공(懿公)을 기억한다.
이들에 대한 얘기는 이미,
앞의 글 '☞ 2008/02/13 - [소요유] - 이명박, 소(牛), 학(鶴)'에서 소개를 했다.
이중 위衛)나라의 의공(懿公)의 얘기를 잠깐 다시 새겨본다.
위나라 의공(懿公)은 학을 좋아했다.
그는 학을 많이 길렀는데,
우스운 것은 기르는 학은 다 직품과 직위가 있어서 녹을 받았다.
가장 좋은 학은 대부로 봉해졌고, 그만 못한 것은 선비의 녹을 받았다.
위의공이 밖으로 행차할 때는 학들도 또한 반(班)을 나누어 따랐다.
수레 앞에 태우는 학을 학장군(鶴將軍)이라고 불렀다.
궁에서 학을 사육하는 자들도 많은 봉급을 받았다.
백성들로부터 과중한 세금을 거둬들여 학을 먹여야만 했다.
자연 백성들 간엔 굶주리고 추위에 떠는 자가 늘었다.
하지만 위의공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때 북적(北狄)이 위나라를 침략했다.
“군사를 소집하라!”
위의공은 나라가 위기에 빠지자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군사들을 소집했다.
그러나 위나라 백성들은 적나라의 침략을 피해 달아나기에 급급했다.
위의공은 군사들이 모이지 않자 달아나는 백성들을 잡아들이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잡혀온 백성들에게 물었다.
“너희들은 어째서 병역을 기피하고 달아났는가?”
그들이 이구동성으로 대답한다.
“주공께서는 한 가지 것만 쓰시면 족히 북쪽 오랑캐를 막아 낼 수 있는데,
뭣 때문에 저희들까지 동원하려 하십니까?”
위의공이 묻는다.
“한가지라니 ? 그게 뭐냐 ?”
“그건 학입니다.”
“학이 어떻게 북쪽 오랑캐를 막는단 말이냐 ?”
“학이 능히 싸울 줄을 모른다면 그건 아무 짝에도 소용없는 것이 아니오니까?
왕께서는 유용한 백성은 돌보지 않고,
무용한 학만 기르시기 때문에 백성이 복종하지 않습니다.”
위의공은 그제야 크게 깨달았다.
“과인이 잘못했노라.
과인은 이제 학을 모두 날려 보낼 것이다.”
위의공은 대궐에 가득한 학을 날려 보냈으나,
그래도 장정들은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모이지 않았다.
마침내 위의공은 적군에게 살해당하고 만다.
오늘 이 이야기를 다시 떠올리는 까닭은 오마이뉴스의 다음 기사 때문이다.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950736)
‘아르바이트 추억’이란 표제 하에 일련의 시리즈 기사 중 하나인데,
기자가 주유소에 일하던 중 겪은 사연이다.
....
....
우리의 흉처럼 짠돌이 사장님은 계속 미운 행동만 골라했다. 하루는 사모님이 아르바이트생들 먹으라고 맛있는 순대를 사온 적이 있었다. 우리는 좋아라 하며 순대를 먹으려 했다. 그런데 짠돌이 사장님이 잠시 기다리라는 손짓을 하셨다. 그리곤 순대의 맛있는 부분을 자신이 키우던 개한테 주는 것이 아닌가? 그런 행동에 내가 놀라 물었다.
"아니, 사장님. 왜 개한테 비싼 음식을 줘요? 그것도 맛있는 부분을?"
"개도 생명인데 영양가 있는 것을 많이 먹여야지."
"그럼 우리는요?"
"저 개는 뱃속에 새끼가 있잖니"
순대를 먹으려던 아르바이트생들은 할 말을 잃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우리는 동물보다 못한 대우를 받는 인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짠돌이 사장님의 엽기성이 빛났다고 해야 할까?
그런데 그 후 기자가 실수하여 휘발유 차에 경유를 넣어버리고 만다.
결국 못 쓰게 된 차는 수리를 하게 되고, 한바탕 난리를 치르게 된다.
하지만, 수리비 등, 그 뒷감당을 짠돌이라고 잘못 알았던 주유소 사장님이 다 처리해준다.
첫 번째 위의공의 사례는 동물을 인간 보다 더 아껴, 인심을 잃고 결국 자신도 망친다는 이야기다.
반면, 오마이뉴스의 기사에서는 새끼 밴 동물을 사랑하는 마음이, 짠돌이라는 오해를 받기까지 하지만,
인간에 대한 사랑과 별개로 동물만을 사랑한 것이 아님이 밝혀진다.
그러한즉, 한 인간의 동물 사랑, 인간 사랑이 상호 배타적인 게 아니라,
혹 사람에 따라, 혹 개별 상황에 따라 다 제각각인 것임이라.
앞의 글 '☞ 2008/02/14 - [산] - 여성동지(女性同志)'에서 등장하는 주인공,
그 분은 동네 이웃한테, 빈정거림을 당하기도 하셨는데,
그들이 쑥덕거리길,
“아마 저 여인네는 제 시어미한테는 저리 정성껏 도리를 다하지 않을 거야.”
이리 뒷공론의 임자가 되기도 하였다한다.
하니, 천하의 인자(仁者)라한들, 인심의 가볍고 얇은 것을 - 부박(
浮薄
) - 어이 감당할 수 있으랴.
공자를 모시고 길을 떠나던 자로가
밭갈이 하는 은사(隱士)인 장저(長沮)와 걸익(桀溺)에게 나루터 가는 길을 물으매,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가는 것이 세상인데 누가 이를 바꿔 놓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자네도 사람을 피해 천하를 두루 돌고 있는 공구를 따라 다니는 것보다는, 세상을 피해 조용히 살고 있는 우리를 따르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하고는 뿌린 씨앗을 덮기에 바빴다.
돌아와 자로가 공자에게 전하니, 공자는 무연(憮然)한 표정으로 이리 말한다.
"새, 짐승과는 함께 무리를 같이할 수 없다. 내가 이 사람의 무리와 함께 하지 않고 누구를 함께 하겠는가.
천하에 도가 있다면 내가 바로 잡을 필요도 없지 않겠는가."
夫子憮然曰:「鳥獸不可與同羣,吾非斯人之徒與而誰與? 天下有道,丘不與易也。」(《論語・微子》
소위 조수불가여동군(鳥獸不可與同群)의 고사가 이러하다.
공자가 말씀하신 조수(鳥獸)가 꼭이나 동물을 가리키고 있음이 아닐 터지만,
혹 그렇다한들 이로써 자귀(字句) 그대로 동물과 인간이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신 것은 아니다.
다만 천하에 도(道)를 펴고자 함에, 은사(隱士)인 장저(長沮)와 걸익(桀溺)처럼,
세상을 등지고 제 일신의 안일만을 구할 수 없음이니,
이 탁류가 흐르는 세상 한가운데서 갈심진력(竭心盡力)할 뿐이라는 말씀이다.
결국 조수(鳥獸)라는 말을 들어 지칭하고 있는 것은,
정작은 조수(鳥獸)가 아니라 바로 인간(人間)들이다.
신자유주의 같이 힘 있는 자들이 밀어붙이고 있는 소위 대세(大勢)라는 것,
그리고 이들 물결에 몸을 맡겨 부화뇌동하는 이들,
또는 짐짓 다 아는 양 조(操)빼며 세상을 등지고,
일신의 안전만 돌보는 저들 장저(長沮)와 걸익(桀溺)같은 이들을 빗대고 있음이다.
하니, 조수(鳥獸)란 결국 무도(無道)한 인간들을 지칭하고 있음이다.
이걸 오독하여,
“공자 같은 성인도 조수를 인간과 분리하였음이니,
동물들은 인간의 수단화 대상일 뿐이 아닌가?” 하며,
동물들을 유린하는 것을 당연시 하는 일그러진 인간성을 대하면,
공자의 탄식처럼 과연 무도(無道)한 세상이 2500년을 지난 지금도 여전하지 않은가 말이다.
참으로 딱한 노릇이라,
과연 나그네가 찾는 나루터는 언제쯤이나 찾을 수 있을런가?
갈 길이 사뭇 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