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기우(杞憂)

소요유/묵은 글 : 2008. 2. 15. 20:12


기우의 고사는 너무 널리 알려진 얘기라 새삼 주제거리도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출전인 열자(列子)에서 전하는 이야기 전체가 대중에게
온전히 소개되지 않았기에 조금 오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침, 앞선 제 글 “어둠의 계조”의 ooo님과의 댓글들로 인해 인연이 닿으니,
이에 대하여 간단히 기술해봅니다.
(※ 참고 글 : ☞ 2008/02/15 - [소요유/묵은 글] - 어둠의 계조(階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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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조의 흥망성쇠를 보면, 두가지 형식에 의해 왕조가 교체됩니다.
선양(禪讓)과 방벌(放伐)이 그것입니다.
선양이란 것이 말은 점잖습니다만,
이게 하왕조이후 제대로 기능한 적은 없습니다.
삼국지에 보면 후한에서 위로 선양이 됩니다만,
실인즉 이게 무늬만 그렇지 따지고 보면 방벌에 다름 아닙니다.

선양이 되었든, 방벌이 되었든 멸망한 왕손들은 어떻게 처리되었을까요 ?
아예 씨를 말리는 것은 후대로 내려올수록 심해집니다만,
고대엔 그들에게 조그만 땅을 내주고 조상의 제사를 이어갈 수 있도록
조치해주는게 상례였습니다.
이게 그들이 후덕한 측면도 있습니다만, 그보다는 후환이 두려웠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즉 제사를 받지 못하면, 원령이 재앙을 내릴 것을 꺼려했던 것이지요.

주무왕이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그 마지막 왕 주(紂)의 아들 무경을 내세워
조상을 봉사할 수 있도록 조치합니다.
후에 모반을 일으켜 주살 당하지만, 대신 미자계를 송(宋)나라로 봉하여
그 뒤를 잇게 합니다.
그런데, 이 은(殷)은 실은 국호가 상(商)나라였지요.
우리가 상업(商業)이라고 하는 商은 이로부터 유래가 된 것입니다.
즉 망한 나라 상나라 사람들이 생업을 꿰한 것이 지금 부르는 상업활동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척박한 농토로서는 제대로 살아가기 힘들었기에
상업에 전념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상업이라 이를 때는, 망한 상나라 사람들이 구차스럽게 살아가는 생업의 형태라는
업심여김이 깔려 있는 것입니다.

거슬러 올라가 은나라 역시 앞선 하(夏)를 갈아 치운 것인데,
주나라 때 그 하나라 유민들에게 주어진 나라가 기(杞)였습니다.
지금 애기하려는 기우(杞憂) 역시 대단히 어리석은 사람에 관한 이야기인데,
이 또한 망한 나라 杞를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이리 보았을 때, 망국인을 들어 모두 악역 노릇을 시키고 있는 것이지요.

현대에도 특정 국가, 특정 지역을 합당한 이유없이 폄하하는 억지가 여전하듯이
당시 망국지인의 설움과 한 역시 읽혀지지 않는지요 ?
기우(杞憂),
송양지인(宋襄之仁), 수주대토(守株待兎), 발묘조장(拔苗助長) or 알묘조장(揠苗助長)의 고사에서 보듯이,
그 주인공들이 하나같이 망국지인들이니,
모두 이리 풀잎 쓸리듯 업신여겨지고 있었음이 여실합니다.

자, 이제 비로소 기우 이야기를 살펴봅니다.
기나라에 어떤 사람이 하늘과 땅이 무너질 것을 걱정하여 제 몸을 돌보지 못할 지경이었습니다.
이에 이를 걱정한 한 사람이 그에게 가서 말합니다.

“하늘은 기운이 쌓여 있는 것이니 무너져 떨어질 걱정이 없소.”
“하늘이 과연 기가 쌓인 것이라면, 해와 달과 별들이 떨어지기 마련 아니오 ?”
“그것 역시 기운이 쌓인 것이며, 설혹 떨어진들 맞아서 다칠 일이 없소.”
“땅이 무너지는 것은 어찌 합니까 ?”
“땅이란 흙덩이가 쌓인 것으로, 사방 빈곳에 꽉 차서 없는 곳이 없소. 하니 걱정할 바가 없소”
이 때, 그 사람은 비로소 시원한듯이 크게 기뻐했고,
그를 깨우치려는 사람 역시 크게 기뻐했다 합니다.

보통은 이 정도까지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그 다음 이야기들이 중요합니다.

장려자(長慮子)가 그 이야기를 듣고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무지개, 구름과 안개, 비바람 등은 기(氣)가 쌓여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현상이다.
산, 강, 바다, 쇠와 돌 등은 형체가 모여 땅에서 이루어진 덩어리이다.
기가 모이는 것을 안다면 덩어리가 모인 것을 알 것이니,
세상의 어느 것이 덩어리가 아니겠는가.
천지라는 것은 존재하는 것 중에 가장 큰 것인지라 그 종말을 예측할 수 없다.
무너질 것이라고 걱정한 사람은 너무 먼 미래의 일을 걱정한 것이고,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며 달랬던 사람도 옳은 것은 아니다.
천지가 무너지지 않는 본질을 갖추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결국은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이 무너질 때가 된다면 어찌 걱정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

주인공이 이 장려자의 말을 들었다면,
그는 다시 전전긍긍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이제 열자가 이 말을 듣고는 웃으면서 말합니다.

“하늘과 땅이 무너질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잘못이지만,
하늘과 땅이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역시 잘못이다.
무너질지 무너지지 않을는지는 우리로서는 알 수가 없는 일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저리돼도 한가지요. 이리돼도 한가지인 것이다.
그러므로 출생할 때에는 죽음을 알지 못하고,
죽을 때에는 출생을 알지 못하며, 올 때에는 가는 것을 알지 못하고,
갈 때에는 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무너지고 아니 무너지는 데 대하여 내 어찌 마음을 담아 두겠는가 ?”

이 열자의 태도에 이르러서는 ooo님의 화두인 주,객이 분리되지 않고 있습니다.
즉 열자가 갖는 生.死.去.來를 알지 못하겠노라 하는 회의는 不知를 고백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生.死.去.來로 나눌 수 없다라는 언표로 해석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렇듯, 거기엔 관객과 연출자로 이분되는 질문이 원천적으로 발생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우주를 창조한 신과 피조물간의 대립을 고민할 까닭도 없습니다.
이게 노장철학의 무위자연(無爲自然) 철학의 본질이 아닐런지요 ?
自然, 제 홀로 스스로 생성하고, 변화하는 것일 뿐인 것이지요.

때문에 ooo님이 들고 계신 화두인 “분리의식”은
서양철학적 전통으로서는 잘게 부수어 정밀하게 해석되어질 수는 있겠지만,
새로운 전망을 일구워내기에는 어렵지 않은가 이리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부처 역시, 윤회를 말함으로서 주객을 완전히 피해가지는 않습니다.
부처가 드라비다족 출신이란 설이 유력하지만,
역시 아리안족 또는 그 영향권하에 놓여 있지 않은가 하는 의심을 빗겨가기
어려운 대목 중 하나가 이 부분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즉 윤회를 말하는 순간 윤회의 주체가 누구인가라는 문제에
봉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순간 주, 객은 분리되고 맙니다.
물론 윤회설과 무아설등의 해석과 규명에 대립이 있습니다만,
동양철학의 전통에 비해서는 불교는 서양쪽 냄새가 조금 배어 있지 않은가 싶군요.

노자의 제자이며, 장자의 선배라는 열자의 “기우”를 빌어,
전번 글의 의론들을 조금 더 연장해보았습니다.
사실 오늘의 얘기는 별도로 충분히 다루워야 할 주제이지만,
제가 잘 알지도 못하고, 시간도 충분치 않아 그저 전 글의 가벼운 보충에 그쳤습니다.

***
***

댓글 모음

[1/2] Jm IP 7x.x2.1xx.1xx    작성일 2007년07월20일 01시56분15초
봉타님의 글을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기우'와 '상업'에 관한 뜻을 알고 나니까,
제 관심이 삼천포로 빠지며(제 특기입니다, ㅋ)
마침 읽고 있던 책의 '하'와 '상' 나라의 청동기가 떠올라서
스캔하여 올립니다. 의식때 쓰던 술잔이랍니다.




윗쪽이 하, 아랫쪽이 상의 술잔입니다.
  [2/2] 봉타 IP 2xx.2xx.1xx.xxx    작성일 2007년07월20일 11시48분18초 
Jm님 안녕하세요 ?

저 역시 삼천포로 잘 빠집니다.
저의 경우, 삼천포로 잘 빠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생각해보았습니다.
구름이 주처없이 떠돌듯 어디 매여 뜻을 부려놓지 못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더군요.
Jm님의 경우엔 어떠할런지 싶군요 ?

저는 올려주신 저 그림을 보고는 두가지 생각이 스쳐지나가는군요.

저 삼발이, 삼족정(三足鼎) 아니 삼족배(三足盃)쯤 될러나, 하는 다리 세 개 말입니다.
하늘을 향해 의지를 펴서 설 수 있는 최소의 필요조건은 둘을 넘어 셋일 때
비로소 가능합니다.
(* 둘도 가능합니다만, 이 때는 땅에 닿은 밑면적이 넓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엄밀한 의미에서 이는 둘이 아닙니다.
다리 밑부분이 점으로 되어 있다고 가정하면, 반드시 셋 이상이라야,
중력을 버티고 곧추 설 수 있습니다.)
그 셋이 천, 지 그리고 하나 보태 人일 터입니다.

하니, 곧 삼발이는 사람의 의지의 표상인 것이지요.
하지만 넘어 넷이라 한들 대지에 꼭 맞춰 서지는 못합니다.
셋인 경우, 아무리 땅이 고르지 않아 울퉁불퉁해도 세발이 모두 땅에 닿습니다.
그렇지만 넷을 넘으면 땅이 고르지 못할 경우,
어느 다리 하나쯤은 필경은 땅에 닿지 못하고 허공중에 떠있게 되지요.

고대인들 역시 이를 직관적으로 알아낸 것일까요 ?
아니면, 하나, 둘씩 다리를 붙여가다, 셋에 이르러 곧추 서니,
거기에서 멈춘 것일까요 ?
만약 이렇다면, 그들은 게으른 것일까요 ?
아니면 욕심이 없는 것일까요 ?

사람도 셋 정도면 얼추 균형을 잡지만,
그 이상 넘어가면 모임의 결속을 단속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넷이란 숫자를 넘는 순간 법(rule)이 필연적으로 요청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비상한 수단이라야, 비로소 절룩거릴망정 모두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생래적으로 이런 번거로움을 꺼려 넷 이상을 구하지 않습니다.


다른 한가지는 일장공성만골고(一將功成萬骨枯)라는 말이 떠오르는군요.
장수 하나가 공을 이루기 위해선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따른다는 말이 아닙니까 ?
저 술잔이 아름답습니다만, 일반 백성들의 피와 땀이요.
그들의 곡식을 위정자들이 비단 옷 두르고 얼마나 착취하였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이몽룡의 금준미주천인혈(金樽美酒千人血)이니,
저들의 술동이가 그리 만만치 않은 사연을 간직하고 있음이 아닐런지요 ?
자 이 정도면 저의 삼천포로 빠져드는 행각이 사뭇 주책이 없지 않습니까 ?

“일장공성만골고”를 떠올리고 보니, 예전에 이를 주제로 글을 썼던 것이 생각납니다.
하여 조금 있다가 찾아내서 올려보고자 합니다.

JJ님에게 제가 홑청이불 물 뿜어, 팽팽히 펴잡듯,
부러 독한 마음 펴서 격려하였습니다만,
이번엔 꼭 뜻을 이루도록, 엄히 채근하여 지켜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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