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두(話頭)의 미학(美學) 구조
화두(話頭)
벽암록, 무문관, 종용록 등의 선어록은 과연 진리의 뗏목인가?
선문답을 통해 과연 피안에 이르를 수 있는가?
김선동의 만다라를 읽다보면 노승 지암이 법운에게 말하는 다음 장면을 만난다.
“여기 입구는 좁지만 안으로 들어갈수록 깊고 넓어지는 병이 있네.
조그만 새 한 마리를 집어넣고 키웠지.
이제 그만 새를 꺼내야겠는데 그 동안 커서 나오질 않는구먼.
병을 깨뜨리지 않고는 도저히 꺼낼 재간이 없어.
그러나 병을 깨서는 안 돼.
새를 다치게 해서도 물론 안 되구.
어떻게 하면 새를 꺼낼 수 있을까?”
법운은 이 화두를 짊어지고 운수납객(雲水納客)이 된다.
(※ 雲水納客은 雲水衲客 또는 雲水衲子라고도 쓴다.
衲이라면 곧 수행자, 스님을 가리키고 있다.
허나 納은 들은 상태를 뜻하니 어느 특정 집단에 한정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그는 병 속에 갇힌 새 울음을 아직도 어쩌지 못하고 있다.
그는 들리는 소식에 의하면,
이름만 그럴싸한 운수(雲水)따라 골골 방방 떠돌아다닐 뿐,
여직 폐포파립(敝袍破笠) 고단한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한다.
하지만 지산은 술 처먹고 계집질하는 등 파계승으로 불리우지만,
한 세상 실컷 먹기는 잘 먹고 사라지지 않았던가?
그야말로 수지 맞춰 장사 잘하고 떠난 것은 아닌가?
최근 마주한 이런 이야기 하나.
“어떤 한 고승이 1미터짜리 동그라미를 작대기로 땅에 그린 후
수행하는 스님에게 안에 들어가도 백대요. 밖에 나와도 백대요.
대답을 1분 안에 안 해도 백대다.”
이것의 답은 동그라미를 지우는 것이란다.
과연 그러한가?
나는 이와 유사한 옥련환(玉連環)에 대하여 기왕에 적은 적이 있다.
(※ 참고 글 : ☞ 2008/10/08 - [소요유] - 골디우스의 매듭과 옥련환(玉連環))
이런 따위의 얼개를 가진 이야기들,
화두는커녕 그냥 퀴즈 정도에 불과한 문제는 지천으로 널려 있다.
이 꾐에 빠져버리면,
마치 코뚜레에 꿰인 소처럼 가련한 존재로 전락해버리고 만다.
끔찍한 노릇이다.
그것도 자청해서 말이다.
화두란 부정(否定)의 미학(美學)이다.
내가 소싯적엔 회사에서 차출되어 합숙훈련에 참가한 적이 있다.
해병대 복장을 한 조교들이 거의 군대식으로 뺑뺑이를 돌린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군대에서도 그 신물이 나도록 당한 고문을 여기서 다시 되풀이 하다니.
직원들을 가학의 도가니에 몰아넣고,
아마도 경영자는 자신에게 충성하는 노예들로 닦여져 나올 사람을 기대하고 있는 것일까?
시대의 퇴물 군국주의자들 같으니라고.
지옥이나 가라지.
거기 구색으로 넣어둔 어느 그럴 듯한 시간 중에 하나,
강사가 논리적인 문제 열 개를 내놓고 풀라고 한다.
여러 회사로부터 수백 명이 차출되어 왔는데 열 문제를 모두 맞춘 사람은 유일하게 나 하나였다.
그 날의 운수였을 뿐이겠지만,
이 이야기를 왜 하는가 하니,
이리 논리적으로 사물을 접근하는 한,
절대 화두를 제대로 풀 수 없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게다.
화두란 부정(否定)의 미학(美學)인 게다.
일상을 부정하고, 논리를 부정한다.
언어도단(言語道斷), 불립문자(不立文字)인 선(禪)의 세계이니,
의당 언어, 논리로서는 길을 물어 갈 수 없다.
그래서 나는 화두란 부정(否定)의 미학(美學)이라고 부른다.
위에서 동그라미 문제의 답은 어떤 이는 친절하게도 동그라미를 지우는 것이라고 했는데,
이게 답이든 아니든 간에 애초에 저 문제를 내놓은 땡중은,
아마도 다음번에 당장 이리 고쳐대며 심술을 부렸을 것이다.
“어떤 한 고승이 1미터짜리 동그라미를 작대기로 땅에 그린 후
수행하는 스님에게 안에 들어가도 백대요. 밖에 나와도 백대요.
대답을 1분 안에 안 해도 백대다.
단, 동그라미를 지우면 아니 된다.”
이렇게 되면 ‘병속의 새’와 별로 다를 것이 없다.
‘병속의 새’에서도
“그러나 병을 깨서는 안 돼.
새를 다치게 해서도 물론 안 되구.”
이리 shield를 친다.
마치 원폭 보호요새처럼,
MB의 지하벙커처럼,
세상과 단절된다.
shield도 하나가 아니라 중중무진(重重無盡),
겹겹이 쳐내놓아야 그럴 듯이 삼삼한 공안(公案)이 된다.
부정의 부정의 부정의 부정의 부정 ...... = (否定)n
비상비비상천(非想非非想天)의 세계,
욕계(慾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를 차례로 쳐 뚫고는,
비상(飛翔)하여 현실을 초월하려면 부득불 (否定)n이란 이름의 뗏목을 타야한다.
이 때, 언어는 도단 되고,
문자는 꺼꾸로넘어지고 만다.
그러하니 제 아무리 논리적인 문제 열 개 아냐 백개를 잘 맞춘다한들,
그런 식으로 가을 서리처럼 차갑게 벼린 이성을 가지고 이 문제를 제대로 풀 수 있겠는가?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병속의 새’
이 화두를 풀겠다고 대든 이들의 이야기들을 한번 들어볼까?
A. 병 속에 내가 들어간다. 안과 밖의 경계가 어디에 있는가?
bongta : 덕산(德山) 방(棒)하나 먹거라.
B. 병 주둥아리처럼 내게 욕심이 많으니 그 욕심으로부터 벗어나련다.
bongta : 임제(臨濟) 할(喝)이나 받아라.
나는 저 문제를 풀었다.
아니 저런 따위의 문제로부터 걸림이 없고 매임이 없다.
이 소식은 내게만 유효한 것.
내게 묻지 말라.
그대의 것은 그대가 풀어야 한다.
내가 한 때는 머리를 싸매고 무문관, 벽암록 따위를 몇 차 들춰 보았지만,
이제는 마치 저것들이 퀴즈대왕 뽑는 싸구려 TV 프로처럼 싱겁기 짝이 없다.
부정의 부정의 부정의 부정의 부정 ...... = (否定)n
긍정의 긍정의 긍정의 긍정의 긍정 ...... = (肯定)n
전자와 후자의 차이가 무엇인가.
전자는 끊임없는 자기 부정, 반전이 있다.
마치 살모사처럼 살모(殺母)하고,
개구리가 올챙이를 잡아먹듯 살자(殺子)하는 역동적인 연환(連環) 구조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후자는 n으로 어디 뒷골목 싸구려 퇴물 작부 얼굴에 덕지덕지 회분칠하듯,
골백번 덧씌우기를 하여도 기껏 자기 강화 외에는,
아무런 새 소식이 전해지지 않는다.
이 형식을 제대로 꿰뚫게만 되면,
공안이 1800개든 오만 개든 제 아무리 많다한들,
그리고 그대가 은성철벽(銀城鐵壁) 험한 요새에 갇혀 있다한들,
단박에 깨드리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런데 그리 깨뜨린다고 상이라도 주는가?
하다못해 퀴즈 왕이라도 되면 해외여행 티켓도 주고,
황금 몇 냥이라도 쥐어주지만,
화두는 제 아무리 깨뜨린다하여도 득이 없다.
본래 진면목으로 되돌아가서가 아니라,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두더지 게임하듯,
보는 족족 화두를 깨뜨린들,
그게 전자게임 짱먹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문제는 부정의 미학은,
마치 쏜 화살이 상대에게 가서 틀어박히고 다시 이쪽으로 되돌아와서는 아니 되는 것처럼,
이 차안(此岸)의 세계에선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피안(彼岸)에 가닿았을 때라야 생명력을 득한단 말이다.
게임 짱은 오늘 짱 먹고 내일 다시 출전한다.
이것은 그가 아직도 차안(此岸)을 서성거리고 있는,
담판한(擔板漢)에 불과하다는 증거인 것을.
그러한즉,
진정한 게임 짱은 오늘 게임을 하지 않는 것이다.
마우스 위에서 까딱까딱 거리던 그 녀석 검지 손가락을 당장 도끼로 찍어내어 끊어야 한다.
자비는 이리도 절절 삼엄한 것이다.
사타구니 밑에 물 마를 새 없는
기루(妓樓)에 적(籍)을 든 창부(娼婦)가 그 짓을 하루에 열두 번을 한다한들,
사랑을 잘 안다고 할 수 없다.
화두를 제 아무리 잘 푼다한들,
제 앉은 자리 밑바닥이 언제 뻥하니 밑으로 허물어져 무간지옥으로 떨어질지 모른다.
게임 짱, 화두 짱은,
그저 스타일리스트, 쟁이(匠人), 기능인일 뿐인 것을.
나는 화두를 더 이상 마주하지 않는다.
다만 오늘을 걸어 갈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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