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주회시(鼅鼄會豕)
며칠 전 싱크대 안을 보니 커다란 거미 한 마리가 빠져나오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가만히 건져 밖에다 놔주었으나 다음 날도 역시 똑같은 장면이 목격되었다.
거미줄을 적당한 곳에 쏘아 붙이고는 줄 타고 빠져나와도 될런만
연신 탈출을 시도하지만 미끄러지며 실패하고 만다.
시골이라 과연 벌레가 참으로 많다.
어떤 귀농한 이는 벌레가 견디기 어려워 다시 도시로 돌아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단순히 날아다니기만 하는 ‘날것’은 그런대로 봐주겠지만,
모기 따위의 ‘물것’은 실로 성가심을 넘어 괴롭기까지 하다.
요즘 세상엔 빈대니 벼룩이니 하는 것들은 거의 없어졌지만,
모기 외에도 파리는 쫓아대어도 집요하게 다시 대들며 살갗을 간지럽힌다.
과시 시골 파리는 뻔뻔하기가 촌무지렁이를 닮았음이지 않았는가 싶다.
나도 이들이 처음엔 귀찮기 짝이 없었지만,
차츰 견디어 내다보니 이젠 그려러니 하며 참아낸다.
무심한 경지까지는 아직 가지 못했지만 저들에게 한결 너그러워진 편이다.
연이틀 싱크대에 빠진 거미를 건져내 근처에 놔두다보니,
이상(李箱)의 지주회시가 의식 위로 물컥 다시 떠오른다.
싱크대를 우리말로는 개수대라 하지만,
싱크대란 말도 실은 제법 그럴듯하다.
source가 있으면 sink가 있을 터.
해가 뜨는 곳을 부상(扶桑)이라 하고,
해가 저무는 곳을 함지(咸池)라 한다.
해도 저 못에 빠지면 영원히 헤어나지 못하련만,
다음 날이 되면 윤회의 거대한 수레바퀴를 다시 굴리려고 나타난다.
그는 왜 그리 면면(綿綿) 부절(不絶) 그리 생사 간을 넘나드는가?
아마도 태양은 실체가 아니라,
윤회(輪廻)의 업력(業力)이 아닐까 싶다.
삼계 육도(三界六道)에 갇힌 중생(衆生)들은,
업연(業緣)의 상징인 태양으로부터 빛과 어둠을 저당(抵當)하고,
맞서 겨루며 영원을 향해 질주하고 있음일 것이다.
이상(李箱)의 오감도(烏瞰圖)에선,
이 장면을 이리 표현하고 있다.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오
(길은막다른골목이적당하오)”
~~~~
“(길은뚫린골목이라도적당하오)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지아니하여도좋소.”
태양은 그렇다하지만,
하지만 미약한 중생들은,
일단 이 현실이란 차안(此岸)에 설치된 sink에 빠지면 영원 속으로 사라지고 만다.
거미 한 마리가 sink에 빠져 며칠을 그냥 놔두면,
아마도 그는 그가 겨눈 과녁인 그 영원 속으로 관중(貫中)되어 떠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애써 그의 운명을 훼방 놓으며,
그를 다시 이 차안(此岸)으로 끌어들인다.
아니라고?
그는 진정 차안(此岸)으로 귀환되기를 원했단 말인가?
그 누가 이리 말하는가?
썩 나서거라,
내, 네 녀석 뺨을 벼락처럼 냅다 갈겨주마.
나의 심술을 모독하지 말라.
이상(李箱)은 원래 지주회시를 鼅鼄會豕로 적어놓았다.
蜘蛛會豕만 하여도 일반인들은 잘 알아듣지 못할 터인데,
鼅鼄는 더욱 생경스러울 것이다.
鼅鼄나 蜘蛛는 모두 거미를 가르킨다.
蜘蛛는 虫이 들어가 있으니 그런대로 벌레란 것을 짐작이라도 할 수 있다.
하지만 黽은 한자를 좀 안다는 이에게도 쉬운 글자가 아니다.
黽은 여러 음으로 읽지만 여기서는 ‘맹’이다,
在水者黽
물에 사는 것을 맹이라 한다.
그 대표적인 것이 개구리인데, 여기서는 맹꽁이를 뜻한다.
이게 뛰기를 좋아하고, 울기를 좋아하는데,
한번 울면 격렬하게 노한 듯 운다 했다.
주례(周禮)엔 괵씨(蟈氏)란 벼슬이 있다.
이들은 개구리나 맹꽁이를 잡는 게 주업이다.
한참 때 논에서 우는 개구리 소리가 어떤 때는 시끄러울 지경이긴 하나,
이는 잠시 잠깐이고 보통의 경우엔 풀, 물을 떠올리는 정겨운 소리이다.
시멘트, 비닐 따위로 둘러싸인 우리네에게 풀, 비, 구름, 바람을 자연 연상시키는,,
저들의 소리를 노명(怒鳴)으로 해독한 옛사람들은,
과연 무정하기 짝이 없었던 것일까?
개구리 아니더라도 자연을 운치 있게 느낄 만한 다른 것들이 더 많아서 그런 것이 아닐까?
저들이 보기엔 격렬하니 노해 우는 개구리 소리에 기껏 정을 붙이고 사는,
우리 현대인들이 구차스럽고 안쓰럽게 생각되지나 않을까?
별주부전(鼈主簿傳)의 별(鼈)은 자라를 뜻한다.
나는 학교 다닐 때 鼈을 보고는,
이게 개구리, 맹꽁이 두꺼비 족속이되 다만 거죽 껍데기에 갑주를 입은 것이로고,
이리 여기며 이것은 여간 별난 놈이 아니겠군.
하니 토끼를 교묘히 꾀어 용왕에게 데리고 갔지 않았음인가?
이리 나름 이야기를 꾸며 지으며 글자를 익혔었다.
나중 옥편을 뒤져보니,
자라를 일명 神守 또는 河伯從事라고 한다하니,
과연 그럴듯하지 않은가 말이다.
여하간 虫보단 黽이 덩치도 크며, 잘 뛰고 잘도 운다.
나만의 생각이지만 이쯤이면 큰거미, 왕거미로 보아주면 아니될까?
이상(李箱)은 이를 빌려 혹 거대한 부조리 아니 그냥 강고한 현실이라도 좋다.
이런 것을 꾸며 비춰보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蜘蛛보단 鼅鼄란 글자는 내겐 심미적으로 조금 거칠고 위압적으로 다가온다.
거기다 맹(黽)은 在水者黽이듯 물이 연상(聯想)되어 축축한 기운이 느껴진다.
거미 역시 음습하니 구석진 곳에 망(網)을 펴놓고는 먹이를 구하지 않던가?
자라는 갑주를 입었으되, 거미는 대신 입으로 거미줄을 뽑아낸다.
모두들 녹록치 않은 무기들을 채비하고 있음이다.
하나는 방패로 무장하고, 또 하나는 포승줄을 지녔으니,
저들이야말로 바다와 하늘 비밀을 지키며,
세상을 기찰(譏察)하는 신의 종사(從事)들이 아닐까 싶다.
심망구식(尋網求食)
거미줄을 쳐놓고 먹이를 구하다.
무릇 함정과 그물은 어둑하니 눅눅한 곳에 남몰래 마련하는 것.
그리 얻은 먹이란 말은 입에 들어가는 필요의 소산,
명을 부지하는 거룩한 목적 가치처럼 그럴듯이 여겨지지만,
실인즉 타자(他者)의 살과 뼈를 취한 것.
그 현장에 넘쳐흐르던 피와 아픔 그리고 울음은 어디에 갔는가?
마트에 가면 이들의 슬픔은 부재하고,
다만 거기엔 장사꾼의 교묘한 선동만이,
배시시 화사한 웃음을 지으며 너를 맞이한다.
게걸스런 너의 혀는 타액으로 환호하며 너무도 쉽게 여기 무너진다.
너는 필시 '파브로의 개'인 게라.
실험실에 올라온 가여운 개.
써놓고 보니까,
파브로 이자가 여간 잔인한 인간이 아니군, 밉다.
먹이란 말을 두고 맛(味), 살(肉)을 떠올리는 그대들은 얼마나 천박하고 욕스러운가?
나는 ‘맛집 기행’이란 타이틀로,
장미여관에 스며든 암수가 야합(野合)하며, 살을 태우듯 좋아 죽겠다며,
요살을 떠는 기사들을 거들떠도 보지 않는다.
저들은 도대체가 천하다.
‘트루맛쇼’에서 보듯,
저들 천박한 치들은 기어이 거짓과 위선의 막장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는가 말이다.
거미는 천고에 이 무거운 과업을 홀로 짊어지고,
천한 오명(汚名)을 뒤집어쓰고 살아간다.
하지만 저들이야말로 묵언 수행을 하며 천년 어둠을 낚는 것이 아닌가?
저들처럼 운명에 순응하는 이가 그 누가 있던가?
아니 그것은 순응이 아니다.
역설적이게도 그것은 항거인 게다.
아니라면 망 하나 쳐놓고는 저리 무던히도 견디어낼 재간이 그대에겐 있는가?
저것은 제 아무리 고문을 해대어도 절대 불지 않는 투사인 게다.
아, 저들은 얼마나 위대하고 엄숙한가?
하지만, 현실에선 저들은 더럽고 징그럽다는,
그리 추한 오명을 혼자 뒤집어쓰고 만년 고독을 견딘다.
반면, 나머지 것들은 특히 인간은 저들과 선을 긋고,
멀찌감치 물러나 우아하니 멋진 폼을 잡는다.
마치 이슬 먹고 천상에 노니는 양 갖은 야살을 떤다.
하지만 뒷간에 가면 더러운 똥을 그 누구보다도 적지 않게 싸대며,
요즘엔 땅에 버리지도 않고 물로 버리며 온갖 하천을 어지럽힌다.
그뿐인가?
그도 모자라, 여기 시골 동네 사는 무지렁이 ‘촌것’들은 제들 밭이며 마당을 가리지 않고,
폐비닐, 치약껍데기, 화장품통, 라이터, 건전지 ... 따위를 시도 때도 없이 태운다.
엊그제 추석 하루 전에는 저 몹쓸 고약한 할망구는
제 집 안마당에 잔뜩 쓰레기를 모아놓고는 흉한 냄새를 피우며 태우고 있었다.
그리고는 추석 때에는 제 귀한 아들놈, 며느리, 손자들을 햇살처럼 맞이 할 것이다.
선과 악, 미와 추과 하루 저녁사이에 자반뒤집기를 한다.
이 어찌 천하고 천하다 하지 않을손가?
내겐 ‘촌것’들이 ‘날것’, ‘물것’보다 하나도 귀하지 않다는 것을,
여기 시골에 들어와서 깨달았다.
한참이나 늦은 터이다.
내가 도시에 살 때는 ‘촌것’들을 사회적 약자라고,
무슨 이슈만 터지면 한껏 응원하며 한 편이 되었었다.
하지만, 여기 와서 살아보니 거개는 환경파괴자이며,
경우 없는 무지렁이가 태반이다.
나는 이내 농부는 경외의 대상이지만,
‘촌것’은 상대할 것들이 아니라는 알게 되었다.
나의 과제.
나는 여기 와서 참 농부를 찾아내 ‘사귐’과 ‘모심’의 인연을 지어야 한다.
아니 정작은 내가 농부가 되는 것이 먼저일 터임이라.
千行百行,種莊稼才是正行
이 세상에 천 가지 만 가지 행함이 있지만,
농사처럼 바르고, 크고, 순수한 것이 없다.
이러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온 천하인이 이 말을 믿지 않게 된 것이 이미 오래 전이다.
이젠 그나마 노루꼬리만하니 남은 이것조차 미국, 호주, 프랑스 등 외국에 다 줘버리려고 한다.
그것도 위정자라는 치들이 앞장서서.
거미에서 시작하다가 결국은 예까지 이르렀다.
그래 나의 의식은 매운 고추 먹고 맴돌듯,
이리로 흘러든다.
저치들이,
이게 실인즉 내 말이 아니라,
호질(虎叱)인 듯,
지주노호(鼅鼄怒號)라고 여길 수나 있을런가?
행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