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전(毒箭)과 지월(指月) - 일번(一翻)
우리는 흔히 그저 ‘둥글 둥글게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 취의(趣意)를 어찌 내가 모를까만,
때때로 아니 흔히는 이게 자신의 비루한 모습을 감추거나,
거짓, 악함에 비겁하게 야합하는 자신을 호도하는 짓거리임을 많이 목격한다.
거의 같은 의식에서 나온 말 중엔 ‘좋은 게 좋다’란 것도 있다.
이 모두 아주 귀접스러운 찌질이들의 문법이라고 나는 단호히 규정한다.
그래 오늘은 과연 둥글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잠시 생각해보기로 한다.
둥글게 사는 것과 반대는 모질게 또는 모나게 사는 것이라 하겠다.
모나다라는 것은 한자로 하면,
원만(圓滿)하지 않고 능각(棱角)이 졌다는 것이니,
원(圓)에 대(對)하는 방(方)을 나는 이내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 참고 글 : ☞ 2008/07/07 - [소요유] - 방(方)과 원(圓))
한편 모질다는 것은 매섭고 사나우며 독한 것을 일컫는다.
그럼 둥글게 산다는 것은 결국 모나지 않게 부드럽고 너그럽다는 뜻이리라.
헌데 만약 세상이 비스듬히 자빠져 편의(偏倚)되어 있음에도 부드러우면,
제대로 바로 자리를 잡을 수 있을 것인가?
또한 세상이 옆으로 기우러져 편사(偏斜) 되어 있는데 너그럽다면,
올곧게 바로 설 수 있음인가?
병이 들었을 때, 약을 쓴다.
약이란 본시 독(毒)인 것.
그러하기에 달지 않고 쓰다.
쓰기 때문에 병을 다스리고,
독이기 때문에 병을 물리친다.
이게 이독제독(以毒制毒)의 이치인 게다.
***
개를 키우는 사람이 있다.
여기 시골에 오니까 정말 개를 키우는 사람이 많다.
아니 키운다는 말을 차마 쓰기도 벅차다.
키운다는 말은 본시 키를 크게 한다는 뜻이다.
때론 사람의 자식도 키운다고 이르긴 하지만,
이 경우엔 키가 자람은 곧 어른이 된다는 뜻을 사서,
자랑스럽게 느끼고 있다는 함의(含意)가 숨어 있다.
하지만 동물의 경우엔 몸무게가 늘어,
즉 증체(增體)되어 장에 내다 팔기에 가까움을 노리고 있다.
그러하니 이 경우엔 차라리 키운다고 할 것이 아니라 친다라고 함이 가할 것이다.
‘닭을 친다’,
‘돼지를 치다’
‘치다’라는 말은 새끼를 낳거나 알을 까내었다는 뜻도 있지만,
업으로 즉 영업상 남을 이용한다는 의미를 품고 있다.
예컨대 ‘하숙을 친다.’할 때 ‘친다’란 말에는,
하숙 든 이에 대한 인간적인 관계는 거세되어 있고,
다만 자신의 영업행위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타자를 향한 일점의 고려도 없이,
온전히 자신의 이해에 복무하고 있는 화법인 것이다.
반면 ‘키우다’란 말에는 설혹 내적인 기대 또는 예정된 행위의 목적이
자신의 이익을 위한 것일지언정 일차적인 언표(言表)엔 그 대상이 목표가 되고 있다.
환언하면 표면적이나마 언어적 관심의 자리에 타자가 등장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선 ‘치다’라는 말보다는,
다소나마 ‘긴장의 유보’, ‘착취의 유예’ 따위 같은 틈이 남아있다.
한편 ‘기른다’라는 말은 조금 더 여유가 있다.
‘키운다’라는 말의 경우처럼 단순히 증체만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여긴 대상의 본성을 틔우고 부조(扶助)한다는 인간적인 배려심이 엿보인다.
한자어로 한다면 육(育)이 아니겠는가?
‘부추기고 보살펴 자라게 한다’
여긴 최소한 돌봄의 적극적인 개입이 존재한다.
그래서 나는 삼자를 구별한다.
‘친다’, ‘키운다’, ‘기른다’
서울에 있을 때만 하여도,
고물할아버지와 같이 흉한 이도 간간히 있지만,
대개는 개를 기르는 사람이 많았다.
(※ 참고 글 : ☞ 2008/04/29 - [소요유] - 낮달)
아니 거의 동혈동거(同穴同居) 즉 한 자리 구멍에 함께 거한다 일러야 바를 것이다.
거(居)란 ‘점거하고 있다(occupy)’란 뜻을 넘어,
‘살고 있다(live)’란 어의를 갖고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잘 때 강아지가 이부자리에 끼어드는 것도 예사일 정도로,
저들을 친밀히 대하고들 있다.
그러한 것인데....
여기 시골엔 참으로 목불인견(目不忍見) 별 일이 다 벌어지고 있음이다.
소위 일컫는 밑 뚫린 철망 집인 뜬장에 올려놓고 키운다거나,
염천지절(炎天之節) 땡볕에도 물 한 그릇 없이 내버려두기도 한다.
(※ 참고 글 : ☞ 2011/05/21 - [소요유] - 물그릇)
생각해보라.
철망 위에서 똥을 누면 똥은 뚫린 바닥이니 당연 쌓이지 않고 아래로 떨어진다.
주인은 똥치는 수고를 덜 수 있다.
하지만 강아지는 발가락이 휘고 설 자리를 잃고 종일 안절부절 떤다.
저들 역시 혈관에 따뜻한 피가 흐르고 있음을 기억하라!
저들 또한 추위와 더위를 느끼고 아프고 슬퍼할 수 있음을 모를 터인가?
그러함인데 차마 이런 짓거리를 할 수 있는가?
정녕 이러고도 사람 노릇을 할 수 있음인가?
이것을 두고 어찌 둥글게 산다할 수 있음인가?
이야말로 참으로 모질고도 사나운 모습이 아니던가?
그 뿐인가?
농약병, 비료푸대, 폴리에틸렌 생활용기를 밭에다 그냥 태우길 예사로 한다.
이런 삶을 두고 어찌 둥글게 산다고 할 수 있겠음인가?
그야말로 패륜적이고 모진 모습이 아니던가?
(※ 참고 글 : ☞ 2011/10/03 - [소요유] - 재(灰))
나는 이들에게 묻는다.
과연 어찌하면 이리 모질고 독하고 사납게 살 수 있음인가?
정녕 이게 세상을 둥글게 사는 것인가?
과연 이게 좋게 사는 것인가?
내가 이를 두고 이번에 처음으로 꺼내어 이웃에게 탓을 하였더니,
둥글게 살라며 ‘시골은 다 그렇다’라고 말하고 있음이다.
이자가 그나마 가근방에서는 제일 젊은 축이며,
자칭 이르길 전문대학을 나왔다고 하는데,
이 얼마나 비루한 의식이요, 참람된 몰골인가?
이웃에게 탓을 하였다고 하였으나,
기실 그동안 수년 동안,
나 홀로 저리 방치된 강아지 틈틈이 물도 주고 먹이도 챙겨주었으며 똥도 치었다.
일언반구 하나 없이 저들에게 알리지도 않았음이다.
하마 저들이 단 일점이라도 부끄러움이 의식 속에서 일어난다면,
조금이라도 달라지는 것이 있어야 하지 않았음인가?
이번 윤상(倫常)을 허무는 패륜적 악행을 당하여 처음으로 이 사실을 밖으로 알렸으나,
그러하다면 이제 와서 밝히 보자면,
나야말로 참으로 세상을 둥글게 살아왔음이 아니던가?
쓰레기만 하여도,
저들이 수십 년간 버린 것,
내 관절이 상하도록 줍고 치우길 년년 부절(不絶)하지 않았음이다.
그러함에도 일절 저들 허물을 탓하지 않고 묵묵히 내 할 도리를 다하였을 뿐이다.
설혹 시늉만으로 인두겁을 쓰고 있다한들,
나의 지극한 정성을 가까이에서 보았으면,
조금이라도 나아지는 바 있어야 하지 않겠음인가?
도대체가 부끄러움이 없는 촌것들임이라.
가여운 동물을 저리 모질게 대하고,
농민이면서 제 삶의 터전인 땅을 저리 유린하고 있는 저자들,
그리고 그 흉하고, 못난 모습을 보고서도 의기를 일으키지 못하고 있는 치들.
이 모두 천하에 둘도 없이 고약하고 못나며, 또한 모진 모습이 아니란 말인가?
그러면서도 둥글게 살자는 말인가?
이는 둥글게 사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모나게 사는 것이며,
모질고도, 흉맹(凶猛)한 모습이 아니더냐?
참으로 가증스럽고, 무지몽매한 이들이라 하지 않을 수 없음이다.
‘길이 아니면 가지를 말라’ 하지 않았던가?
저들은,
참으로 용렬한 소인배들인저.
나는 그러한고로,
이제 와서는 정녕코 모질고도 독하게 저들에게 분노하고자 한다.
방(方)으로써 원(圓)을 겨냥코자 하니,
나야말로 시정(市井)에 노닐며 저들을 절절히 걱정하는,
진정한 의미의 방외지사(方外之士)가 아닐런가?
내 그래도 그간 부러라도 정을 베풀고,
사람 사는 바른 도를 보여 저들을 일깨워보려 하였으나,
도대체가 유몽(幼蒙)하니 모두 다 부질없음이라.
일천제(一闡提)가 과연 있기는 있구나 싶다.
단선근(斷善根), 생맹(生盲), 소종(燒種) ...
말씀의 뜻을 새기자니 참으로 무섭고 두렵다.
그래 그냥 남겨둔다.
내 차라리 나무 씨앗을 뿌려 선근(善根)을 구하려 하노니,
문수(文殊)의 검무(劍舞)가 펼쳐지는 환영 앞에,
절절 사무치는 대비(大悲)에 따라 삼가 옷깃을 여민다.
(※ 문수보살은 일천제의 머리를 잘라 그들을 구했다.
아, 이 절절 사무치는 자비라니.)
***
‘독전(毒箭)의 비유’라는 말씀이 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이 이야기는 아함부(阿含部) 전유경(箭喻經)에 나온다.
내 이를 여기 전재한다.
猶若有人身中毒箭,
彼親屬慈愍之,欲令安隱、欲饒益之,求索除毒箭師。
於是彼人作是念:『我不除箭,要知彼人己姓是、
字是、像是,若長若短若中,若黑若白,
若剎利姓、若婆羅門姓、若居士姓、若工師姓,
若東方南方西方北方誰以箭中我?我不除毒箭,
要當知彼弓,為是薩羅木、為是多羅木、
為是翅羅鴦掘梨木?我不除毒箭,
要當知彼筋,若牛筋、若羊筋、若氂牛筋,
而用纏彼弓?我不除毒箭,要知彼弓弝,為白骨耶、
為黑漆耶、為赤漆耶?我不除毒箭,
我要當知彼弓弦,為牛筋、羊筋、氂牛筋耶?我不除毒箭,
要當知彼箭,為是舍羅木、為是竹耶、
為是羅蛾梨木耶?我不除毒箭,要當知彼箭筋,
為是牛筋、羊筋、氂牛筋耶,
而用纏箭耶?我不除毒箭,要當知彼毛羽,是孔雀耶、為是鶬鶴耶、
為是鷲耶,取彼翅用作羽?我不除毒箭,
要當知彼鐵,為是婆蹉耶、為是婆羅耶、為是那羅耶、
為是伽羅鞞耶?我不除毒箭,要當知彼鐵師,
姓是、字是、像是,若長若短若中,若黑若白,
若在東方若南方若西方若北方?』
彼人亦不能知,於中間當命終。如是,若有愚癡人作是念:
『我不從彼世尊行梵行,
要令世尊記世間是常。』彼愚癡人不自知,於中間當命終。
如是世間非是常、世間有邊至無有命終。
若有愚癡人作是念:『我不從彼世尊行梵行,
要令世尊作是記我言真諦、餘者愚癡。』
만약 어떤 이가 독화살을 맞았는데, 그 친척들은 이를 가엾이 여겨, 그를 편안히 하려고 독화살을 잘 뽑는 의사를 구하였다. 그러한데 독화살을 맞은 이는 이리 말하였다.
“화살을 뽑지 않으련다. 화살을 쏜 사람의 성씨가 무엇이며, 자(字)가 무엇이며, 모습이 무엇인지, 그리고 키가 큰지 작은지, 피부가 검은지 흰지, 신분 계급이 무엇인지, 동서남북 어디로부터 화살이 날아왔는지? 이를 알기 전에는 화살을 뽑지 않겠다. ........
저 사람은 결국 아지도 못하고 중도에 죽고 말 것이다. .....”
이와 비슷한 논법으론 지월(指月)이란 이야기가 있다.
“如人以手指月示人。彼人因指當應看月。若復觀指以為月體。此人豈唯亡失月輪。亦亡其指。”
<능엄경(楞嚴經)>
“한 사람이 손으로 달을 가리켜 다른 사람에게 보인다면,
그 사람은 손가락을 따라 당연히 달을 보아야 한다.
만약 그가 손가락을 보고 달의 본체로 여긴다면,
그 사람이 어찌 달만 잃은 것이겠는가, 손가락도 잃어버린 것이다.”
이 모두 현상에 매몰되어 본질을 놓치는 것을 경계한 말씀들이다.
우리들의 언어와 관념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세계가 있다면,
당연 언어와 관념으로선 거기 이를 수 없다.
그러하기에 언어도단(言語道斷)이니 불립문자(不立文字)니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서도 우리는 문자에 의지하고 말을 빌어 부절(不絶)하니 이야기를 계속한다.
염화시중의 미소라는 것도 결국은 언외의 것을 연꽃으로 드러내시고자 한 것이 아닌가?
그러하다면 연꽃 아냐 마른 똥막대기인들 가섭의 미소가 어찌 따르지 않으랴?
그런데 과연 그러한가?
손가락은 필요 없고,
독화살의 출처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가?
왜 연꽃이어야 하는가?
여기 이 비린내 나는 현실의 세계,
나는 저 말씀들을 때론 뒤집어보고 싶은 충동에 싸이곤 한다.
'독전(毒箭)과 지월(指月) - 일번(一翻)'
이 말씀들을 오늘은 한번 외로 꼬아 뒤집어본다.
과시 독전이든 지월이든 어느 망나니 손에 들어간다든지,
혹은 어리석은 이의 귀에 들리면 그야말로 差之毫犛,失之千里라,
말인즉 터럭만한 차이지만 천리를 그르칠 것인즉.
꿀 바른 달콤한 혀로 달을 노래하고,
금분 칠한 손가락 구부려 달을 가리키며,
정작은 제 욕심을 은휘(隱諱)하고 있다면,
달이 문제가 아니라 손가락을 유심히 살펴야 할 것이다.
천하의 사기꾼, 협잡꾼은 말한다.
“나는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나는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위해,
모든 사람이 반대를 해도 이일을 사심 없이 추진할 것입니다.”
“나는 도덕적으로 완벽합니다.”
그는 외친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지 말고 달에 집중하라고.
하지만 정작 그의 갈고리 진 손가락엔 욕심의 때가 덕지덕지 끼어 있음이다.
이럴 땐 달이 아무리 밝고 아름다워도,
달을 볼 것이 아니라,
손가락을 먼저 점검해보아야 한다.
달을 말하는 사람을 독사 보듯 대하여야 한다.
내게 달려와, 침실에서나 들을 법한 달콤한 말로,
유혹하는 사람은 늑대 보듯 경계하여야 한다.
암전난방(暗箭難防)이라 하지 않았던가?
저게 어둠 속에서 독화살을 쏜 그놈이 아닐런가?
이리 의심해야 한다.
손가락이 뚫어지도록 훑어보아야 한다.
“둥글게 살자.”
“좋은 게 좋다”
이리 뻔한 인정의 말로 그대를 무장해제 시키는 작자를 더러운 똥 보듯 해야 한다.
정작 저런 치들은 제게 해가 되면 칼 물고 숭어뜀을 뛸 놈인 것이다.
저 따위 비열한 화법엔,
오로지 결과만 있지 동기, 과정은 거세되어 있다.
생략된 과정, 은폐된 프로세스는 더러운 저놈들에 의해 절취당하고,
남은 것은 타자의 희생, 자연의 유린뿐인 것을 알아야 한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차후에 자기에게 기회가 왔을 때,
저 문법을 동원하여 사리(私利)를 꾀하리라 이리 내심 작정하고 있는,
그대 역시 저들과 한 패, 협잡 모리꾼인 것이다.
그대는 역시나 아주 더럽고, 비겁하고, 치사한 영혼들과 한 통속인 게다.
우리들의 문제.
매사 적당히 덮고 넘어가는 게 아니라,
바로 짚어 추상같이 시시비비를 가려 이치를 밝혀야 한다.
그리고 사리에 어긋나면 물러서고,
부절부합되면 서로 부추기고 격려하며 나아가야 한다.
그러하지 않으면 늘상 힘 가진 놈, 말빨 센 놈, 먼저 자리 잡은 놈이 다 해먹고 만다.
“둥글게 살자.”
“좋은 게 좋다”
이런 허황된 말은 정작은
천하에 제일 모난 말이자, 나쁜 말인 게다.
우리 다 숨겨두고 함께 공범이 되자는 말이다.
이 얼마나 지저분하고 더러운 수작질인가?
저런 말을 부끄러움도 없이 거침없이 뱉는 놈들을 가까이 하지 말아야 한다.
언젠가 그대가 위험에 처했을 때,
제일 먼저 그대를 배반하고 도망갈 놈이 저놈인 것임이라.
명심하라!
지금 저놈과 함께 히히닥거리며 술추렴을 하고 있다 한들,
이는 잠시 그 때 그뿐일 뿐,
언젠가 비상한 때에 이르러 그대는 크게 당하고 말리.
소인배는 애저녁에 가까이 하지 말아야 한다.
소인배는 도도처처에 흩뿌려져 있다.
한강 백사장 모래알처럼 많고도 많다.
맹귀우목(盲龜遇木)이라,
사람으로 태어나기가 마치 망망대해 바다 위에 떠다니는 나무를,
눈먼 거북이 고개를 내밀 때 마침 만나는 것처럼 어렵다고 했다.
(如海盲龜遇浮木 人身難得甚希有)
사람다운 사람,
진정한 사람 역시 그 만남이 맹귀우목(盲龜遇木)처럼 어렵다.
소인배들이 들끓는 세상,
진인(眞人), 활불(活佛), 군자(君子)를 어찌 알아볼 수 있으랴?
하지만 눈먼 거북이도 언젠가는 나무를 얻지 않던가?
바르고 곧게 걷다보면 언젠가는 전단향(栴檀香) 그윽하니 퍼지는 그곳에 이르리.
이 때 비로소 명월(明月) 이 공산(空山)에 걸려있음을 보게 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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