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수마발(牛溲馬勃)
景行錄云,
責人者不全交 自恕者不改過
경행록에 이르기를,
남을 책(責)하는 자는 사귐을 온전히 하지 못하며,
스스로를 용서하는 자는 자신의 과오를 고치지 못 하느니라.
앞에 이어, 이 글을 두고 떠오른 생각 하나를 더 덧붙여 둔다.
***
한 겨울 소달구지를 끌고 가던 소가 길가에서 똥을 싼다.
푸짐하게 쌓인 똥더미엔 허연 김까지 서리서리 피어오르고 있다.
그러자 예닐곱 어린 계집아이를 데리고 가던 아낙네는,
얼굴에 화색이 돌며 득의의 미소까지 짓는다.
아이를 채근하며 빨리 저기 들어가 발을 담그라 성화다.
갓 싼 소똥에 발을 담그면 동상든 얼음이 빠진다고 하였음인가?
과연 그러한가?
온기로 부풀어 올랐던 것도 잠시 먼 길을 지쳐 집으로 오는 동안,
눅눅하니 젖은 발은 다 식어가며 외려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다.
그날 아이는 밤새도록 가렵다고 보채면 잠을 이루지 못한다.
앞에서 소개된 경행록 같은 저리 인스턴트화된 말씀들,
파편화된 말 조각(語片)들은 저 소똥과 같은 것이 아닌가 나는 생각해보는 것이다.
제 아무리 그럴듯한 것일지라도,
깨어나 보면 결국 우수마발(牛溲馬勃) 소똥 말오줌에 불과한 것임이라.
남의 허물에 대하여는 가혹하고,
자신의 허물에 너그러운 인간을 두고,
시러베 자식 놈들이 아니고서는 세상에 그 누가 이를 옳다 하겠는가?
설혹 이리 엉터리로 사는 이일지라도,
의당 이 말씀 앞에 서면 아니 그런 양 시침 떼며,
성인군자인 양 거드름을 펼 것이다.
하지만, 저 말씀의 고깔모자를 쓰고, 허울을 두르고나선,
남의 허물을 지나치며 몸보신에 급급하길 예사로 하는 폐단은 없는가?
가령 남의 허물을 들춰내면 그 자가 내게 원한을 품지 않을 텐가?
이리 염려하며 내 알 바 아니다 하며 모른 척 지나친다.
그리고서는 저 경귀를 동원하며 마치 자신이 성인인 양 자위하진 않았던가?
이 때 저 경귀는 그저 몸보신책에 다름 아닌 것으로 기능할 뿐이다.
"남의 허물을 질책하기전에 너 자신의 허물에 대하여 엄격하게 하라는 것"
어떤 분의 이 말씀도 사뭇 그럴 듯하고 옳은 듯하나,
거꾸로 읊어보면,
“나 자신만 바르게 살면 그 뿐이지,
주제넘게 남의 허물엔 참견하지 말자”
이리 사는 바 그 핑계가 될 수도 있다.
혹자는 저 경귀를 견강부회, 오독하였다 이르며 변호하기 바쁠 터이지만,
그럴 위험한 빌미를 뭇 비겁한 자에게 제공할 수도 있다.
이는 사뭇 위험한 노릇이다.
그래서 언젠가도 지적하였듯이,
나는 저런 류의 단편적인 조각 말 경귀는 그리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옳지 않은 것을 보면 분연히 일어나 꾸짖고 나무랄 때라야,
잘못이 고쳐지고 세상이 발라진다.
헌즉 남의 허물은 필요할 때라면 아낌없이 지적하여야 한다.
이 노릇도 결코 쉽지 않다.
나름 공분(公憤)과 용기와 정의감을 갖지 못하면 이리 하고 싶어도 못한다.
남의 허물을 덮고 모른 척 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란 이야기다.
이는 기실 내 허물에 대한 관용 정도와는 짝지을 거리도 아니다.
비록 자신이 못났다한들,
바르지 못한 남의 허물에 대하여 경책하며 사회적 경각심을 유지하는 것은,
건전한 사회인이 지녀야 할 덕목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최소한 저 경귀엔 이런 사회적 책임에 대한 소극적인 암시조차 발견되지 않고 있다.
난 이를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혹여 있다면 사사로운 개인의 보신책으로는 상당히 유효할 수는 있겠다.
남의 허물에 대하여 모른 척 하는 자야말로,
지극히 경계하여야 한다.
도대체가 사회적 공분이 없는 자가,
어찌 제 허물에 대하여 엄격할 수 있으랴?
물론 남의 허물이라 함은,
그의 개인적 차원의 것이 아니라,
사적 경계를 넘어 사회적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제한하는 것이,
논의를 선명하게 이끌고 불필요한 오해를 일으키지 않겠다.
난, 사적인 허물까지 참견할 정도로 한가하지도 않고,
그리 오지랖이 넓지도 않다.
요즘 세상은 좀 좋은가?
자신이 직접 나서지 않아도 경찰력 같은 공적 파워에 기대어 처리만 하여도,
어느 정도의 성과를 만들어 낼 수 있다.
공의롭지 않은 남의 허물을 보면 신고를 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을 정도만만 되어도,
일응 제 역할을 행할 수 있다.
이런 신고의식은 건전한 시민의 특권이자 의무가 아니겠는가?
여기 시골 생활에선 이런 의식이 거의 확립되어 있지 않다.
그저 ‘좋은 게 좋다’라는 허위의식, 무책임으로 서로를 감싸주고 숨겨주며 흘러간다.
이게 責人者 不全交의 오도된 모습이 아니겠는가?
책(責)을 하지 않으면 별 탈 없이 이웃과 지낼 수 있다.
그 이면을 살펴보면 버성겨져 이웃과 불편하지 않을 수 있음이니,
이게 자신에게 이롭다는 계산일 것이다.
사회가 망가지든 말든 오불관언 자신에게 이로우면 그 뿐이란 마음보가 숨겨져 있다.
이로 인해 초래되는 사회적 비용과 부담은 다 애꿎은 남에게 떠넘겨진다.
문제 유발자 개인에게 책임을 묻게 되면 사회 전체가 편안해진다.
제 사적 안위를 위해 이것이 부단히 방기되고 만다.
이 모두 남의 허물을 관용하기 때문이다.
아니 실인즉 관용이 아니라 은밀히 제 자신의 사적 이해에 복무하는 것이겠지만.
게다가, 저런 허물의 결과가 어쩌다 특정 개인에게 몰아 떨구어질 때는,
애꿎은 개인이 홀로 다 치러내야 한다.
이 때는 아무도 도와주는 이가 없이 고군분투 홀로 다 감당하여야 한다.
남의 허물을 덮고 넘어가는 것에 익숙해지다 보니,
사회는 늘 오줌 싼지 한 식경이나 지나도록 기저귀 갈아 차지 못한 아이처럼 찌찌부둥하다.
이웃과는 허허로운 듯 웃고 지내지만,
좌우 어디를 둘러보아도 사회 전체는 찌들고 더럽다.
좀 바르고 스마트하게 살 수는 없는가?
저 경귀는,
‘난 남의 허물을 들춰내는 소인배가 아니야.’
이런 자기 충족적 허위의식을 키우는데 소비되는데 일조를 하고 있음이 아니던가?
나는 이런 위험성에 대하여 중인(衆人)을 향해 호각(號角)을 불고 있는 것이다.
whistle-blower.
호루라기를 불어야 할 때는 용기 있게 불어재낄 수 있어야 한다.
호루라기를 부는 자를 아끼고 감싸줄 때라야 사회가 화평해진다.
허나, 백년하청이라,
특히나 내 여기 시골 생활을 가만히 관찰하건대,
아마도 이런 찌질한 모습은 쉬이 가셔지지 않을 것이다.
난 그래서,
저런 따위의 그럴듯한 말씀을 그리 중하게 여기지 않는다.
제 부담은 하나도 지지 않으면서,
그저 달팽이처럼 저런 말씀의 껍데기 속으로 숨어들 것이 아니라,
내일 당장 나아가 그대 이웃을 고발하라.
행으로써 입증되지 않는 지식은 가장(假裝)이요 위선일 뿐.
비판의식이 부재한 인간은,
제 아무리 사람 좋은 모습을 하고 있더라도,
그저 이기적일 뿐이다.
나는 이웃에 好人으로 불려지기보다,
욕을 먹는다 하여도 깨어있는 비판적 시민으로 남길 원한다.
이는 나의 자부심이요, 자존을 지키는 방식이기도 하다.
내 최근에 만난 여호와 증인 하나.
종일 거리를 누비며 가가호호 방문하며 전도에 열심이다.
가만히 그이의 말씀을 들어보자 하니 부활을 겨냥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천국에 들어가는 티켓을 얻기 위해 갈심진력 혹서와 혹한을 무릅쓰고,
어둑새벽 대지 위에 피어오르는 물안개처럼 간절한 소망을 그리 지피어 올린다.
그런데 저 티켓은 행의 결과로서 주어지는 것이지,
쟁취하기 위해 타깃 그 자체가 되어서야 되겠는가?
이야말로 원리전도몽상(遠離顚倒夢想)이 아니겠는가?
조각 말의 고깔모자 속에 숨어든 허위의식을 나는 경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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