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야반삼경(夜半三更) 문빗장 - 축지법(縮地法)

소요유 : 2008. 2. 28. 11:19


야반삼경(夜半三更) 문빗장이란 말은
경봉 스님이 입적 당시에 하신 말씀으로 세상에 알려져 있다.
상좌 스님이 "스님이 가신 뒤 스님을 뵈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물음에
"야반삼경(夜半三更)에 대문 빗장을 만져보거라"는 말을 남기고 입적하셨다 한다.

경봉 스님 말씀을 듣고 야반삼경에 빗장을 만지러 간 스님네들이 있을까 ?
만약 야반삼경 문빗장 만져 도를 이룰 수 있다면,
누군들 깨우치지 못하겠는가.
향엄은 무심이 던진 기왓장이 대나무에 부딪치는 소리를 듣고 깨우치고,
동산은 다리를 건너다 물위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 보고 깨쳤으며,
의현은 옆방 사람의 중얼거림에 깨우쳤으며,
백장은 코를 잡아 비틀려 깨우쳤으며,
주굉(祩宏)은 망루의 북소리를 듣고 깨쳤으며,
원효는 해골바가지에 든 물을 먹고 깨우쳤다.
그렇다고,
아무나 대나무에 기와장 던지고, 그림자 쳐다보며, 해골바가지에 물 담아 마시면 깨우치겠는가 ?

앞에서 제목을 “야반삼경 문빗장....”이라 하니
어떤 이는
“대문 빗장을 보기만 했지.... 만져보진 않았구랴” 이리 말하며 빈정대고 있다.
대문 빗장을 만져야 깨우침이 있다고 생각하였다면,
그 보다 더 쉽게 구지선사 흉내내어 손가락 하나 버쩍 들고 말지 어인 번거로움인가 ?

내 글의 제목 “야반삼경 문빗장....”에서 문빗장은 경봉 스님과는 관계없다.
야반삼경 내 집을 나서면서 문단속을 한다.
이게 내가 한밤에 길 나서는 첫 행위이니 글 제목을 이리 붙여 보았을 뿐이다.
이 글제목하에 야반삼경 등행간에 얻어진 낙수(落穗)들을 사금파리 이어붙이듯
추려볼까 하는 것이다.

산에 들어가면, 문빗장은 커녕, 거긴 대문 조차 없다.
탕탕한 어둠이 만상을 흑백으로 다스려 나를 기다리고 있다.
할 지랄 없다고, 산에 올라, 있지도 않은 문빗장 찾아, 만지고 돌아오는 것을
낙으로 삼을런가 ?
미련하게, 내 글을 보고 도를, 진리를 떠올리고 있다면 그야말로 한심하다.
내 글은 그냥 심심풀이에 불과하다.

행여라도 문빗장에 무슨 심오한 비밀이 있는 양 오해를 하고 자빠져 있으면,
고대 죽어 무간지옥에 들리.
경봉 스님 역시 성철 스님처럼 사람 속이려고 하는 수작임을 모르겠는가 ?
그들은 이리 사람들을 속임으로서 자비를 펴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그 어떤 이가 찾는 도는 언어도단, 이언절여(離言絶慮) 처에서나 만날 수 있다.
bongta의 이 누추한 글에 도가 있을 턱이 있나 ?
말은 뱉어내어지는 순간 이미 꾸밈이 가해진다.
교언영색(巧言令色)이 말의 본색이다.
말이나, 글은 계집 지분처럼 겉을 꾸며내게 마련이다.

도를 판다는 절집도 단청으로 장엄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스님 옷은 또 어떠한가 ?
금란가사라 금칠로 번쩍번쩍 거리지 않은가 말이다.
항차 이들도 이러한데, 내 글은 오죽할까 ?
어떤 이 지적대로 지지리 박색 가리려고 지분으로 떡칠하고 있지 않음인가 말이다.

그렇다한들, 계집 본색을 나무랄 것인가 ?
말을 나무랄 것인가 ?
글을 나무랄 것인가 ?
그럴 양이면 부랄 발라 똥통에 던져 버리고,
조동이 명주실로 칭칭 동여매고,
종이를 기어 다니는 검은 벌레를 다 잡아 죽여야 한다.

춘풍이 불면 꽃이 아름답듯,
계집 지분 바르고 하늘하늘 허리 흔들며 다가오면 춘흥(春興)에 겨운들  무삼 잘못이 있으랴.
이태백이 여산에서 폭포를 보고
"비류직하삼천척 의시은하낙구천(飛流直下三千尺 疑是銀河落九天)"
이리 시흥(詩興)에 젖었다면,
목석이 아닌들 함께 흥감(興感)하면 안되는가 ?

개뿔도 달리지 않은 내 글 보고, 도가 어떻고, 진리가 어떻고 하는 사람은
필시 오장칠부일 게니, 남들보다 심술보내지는 미련보가 하나가 더 있으리라.
내 애초에 글제가 있었는데, 이리 잠깐 비루한 인간을 나무라다 보니 글 흥이 가시고 말았다.
내 전차(前次)에 해원하자고 하면서 이리 꾸짖고 있는 것은,
그를 비난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그리 알아 듣도록 타일렀는데도, 아직도 여전한즉
정작은 한줄금 소낙비 정수리에 뿌려,
암둔(闇鈍)한 그를 경책하고, 밝은 데로 이끌려고 함이다.

그렇다 한들, 그냥 물러서면 이 또한 볼썽 사납다.
하여 오늘은 간단히 축지법(縮地法)에 대하여 말해볼까 한다.

축지법의 한자를 보면 “땅을 줄이는 방법” 쯤 될 테다.
甲地에서 乙地로 이동할 때, 상거한 거리를 줄이는 수법이니
이게 홍길동이 쓰던 방법인가 ?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림을 보자,

자, 이리 생각해 보자.
산봉우리와 산봉우리가 있다면, 그 사이에 계곡이 있지 않은가.
우리가 이쪽 산봉우리에서 저 봉우리로 간다고 할 때,
어떻게 가는가.
이편 봉우리에서 계곡 밑까지 내려오고 다시 저 봉우리까지 기어 올라간다.
봉우리, 계곡, 봉우리 이 삼점을 각기 a, b, c라고 하면 삼각형abc가 된다.
이동 경로는 선분ab와 선분bc 길이의 합이 된다.

그런데 다리가 긴 사람이 있다면, 굳이 b를 거칠 까닭이 없으니
봉우리a에서 봉우리c로 바로 건너 뛸 것이다.
이 때의 경로는 선분ac가 되니 앞서 보다는 당연히 짧다.
더우기 골-마루간 상하 이동이 제거되어, 중력에 구속되는 에너지 소비가
사뭇  절약된다.

이게 축지법의 핵심 원리다.
즉 골은 피하고 마루만 밟아 나아가는 것.
골에 발을 내딛게 되면 위 예에서처럼 (선분ab와 선분bc)로 늘어난다.

당신은 다리가 짧으니 봉우리와 봉우리를 건너 뛸 수 없다고 ?
무슨 말씀.
산을 오르다 보면 당신 보폭만한 거리에도 잔 돌이 많이 널려 있다.
툭 툭 벌려져 있는 그 돌들을 봉우리로 생각하면 된다.

보통은 힘이 드니깐 낮은 곳을 찾아 걷는다.
그러니 애써 점b를 만들어내면서 걷게 되고 이게 등산거리를 늘리고
체력 소모가 많게 되는 효과를 내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처음엔 의식적일지라도 돌멩이들만 타고 넘어 다니면 점a, 점c만을
골라 다니게 되니 결과적으로 축지가 되는 것이다.
이게 익숙해지면 절로 발이 제 자리를 찾아 걷게 될 것이다.

더욱이 발바닥에 있는 용천혈을 뾰족한 돌이 자극하니
건강에도 좋다.
용천(湧泉)은 足少陰腎經에 속하니 이게 전회에 소개한 水氣와 관련되니,
이 혈을 꾸준히 자극하면 정력이 왕성해지는 공덕이 있다.
첫날밤 신랑을 거꾸로 매달아 방망이로 발바닥을 쳐대면 
바로 이 혈을 자극하게 되어 그 날 대사를 제대로 치르게 하기 위한
방책이기도 하다.

손오공이 타는 근두운(觔斗雲)을 잘 보라.
이게 골까지 내려왔다 다시 오르는가 ?
그저 이 봉우리, 저 봉우리 위를 스쳐 지나고 있을 뿐이다.

이 방법을 주식투자하는데도 원용하면 제법 효과를 볼 수 있는데,
이 경우 나는 파두법(波頭法)이라는 별칭으로 부르고 있다.
여기가 그저 소요유 하는 곳이라 말씀은 삼가나,
그 기본 원리는 축지법과 다를 바 없으니, 그리 짐작하시면 된다.
나중 주식 관련 글을 쓸 때, 자세히 설명드릴 기회가 있을 것이다.

실은 주식 관련 사이트에 가보면
장님 문고리 잡는 이들이 태반이다.
정작 이들이야 말로, 경봉 스님의 속임에 놀아나 야반삼경에 문빗장 더듬는 이들이 아닐까 ?

허경영, 이 분의 축지법은 도무지 미덥지 않다.
하지만, 내가 소개하는 축지법은 실답게 이름을 함께 하니,
가히 아름답지 않은가 말이다.

이 법수는 굳이 땅을 줄여 가는데만 쓰이는 게 아니다.
사업에도, 공부에도, 사랑에도, ...
삶 일반에 두루 그 원리가 원용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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