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이란 자기현시욕의 발로인가 ?
어떤 분이 이리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우리가 다른사람들 앞에서 글을 쓰거나 말을 한다는 것은 에고(자아)의 자기현시욕의 발현입니다.
우리가 일상 속에서 글을 쓰거나 말을 할때는 자기를 드러내려 하거나 자기 아는척을 하거나
자기 잘난척을 하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입니다.
따라서 되도록이면 입을 열지도 글을 쓰지도 말아야 합니다.
물론 지금 이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글을 쓸 양이면,
그 글 자체도 써내놓지 말아야, 그 뜻에 충실할 터인데,
그는 그 뜻을 전할 욕구는 아직 버리지 못한 것일까 ?
이하는 이 말씀에 대한
군더데기 저의 췌담(贅談)입니다.
***
대단히 준엄한 심판의 말씀입니다.
인간은 “창조적 자기표현”의 지향체란 글을 소시적 읽은 적이 있습니다.
여기서는 “창조적인”이란 수식어로 “현시욕”이란 자아에겐 다소 불편한 규정을
멋지게 극복하단거나, 아니면 우회, 은폐하는데 일응 성공합니다.
사람들이 말, 글을 발출하는 순간 곧 바로 세상을 對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순간, 이 현장에서, 도를 깨우치지 않은 보통의 사람들로서는 글과 말로서
자기를 드러내고자 의욕했다는 혐의로부터 자유로운 자는 하나도 없습니다.
부처의 팔만장광설은 그럼 무엇일까요 ?
부처가 무아를 말하면서, 열반시 일자무설이라고 선언한 것은 그럼 또한 무엇인가요 ?
만약 글, 말이 “에고(자아)의 자기현시욕”에 다름 아니라면,
부처는 죽음에 이르러 일자무언이라 하면서 그 혐의를 벗고자 한 것인가요 ?
아니면, 장광설이 방편에 불과하다는 것을 확인함으로서, 세상에 말의 허랑함을 경계하는 것일까요 ?
교외별전, 직지인심을 주장하면서도
정작 선종에선 수많은 글들이 나부낍니다.
이 때, 글, 말이 과연 “에고의 작동 증거”인지,
아니면 피안에 도달하기 위한 뗏목에 불과한지 일견 혼란스럽습니다.
이 혼란을 피하는 방법은 무엇인가요 ?
가장 확실한 방법은 자신이 직접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겠습니다.
진정 깨달음이라는 게 있다면, 이 길을 찾는 게 확실히 수지맞는 일이겠습니다.
문제는 이게 모든 사람들에게 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 차선은 무엇일까요 ?
저라면, “글, 말이 자기현시욕”이라는 이 의심으로부터 차라리 자유로와지고 싶습니다.
자기현시욕으로 가득 찬 말, 글일지언정 그를 대하면서,
우리는 조각조각 때에 이르러, 짜릿한 느낌, 주억거리는 고개 짓,
박장, 웃음, 소름끼치는 전률... 등으로 저 수많은 푸른 청춘을 시험하는, 저 징그러운 부처의 그 말씀,
그 증언 또는 기만일지도 모르는 현장을 가끔씩은 엿보는 행운에 자신이 처해 있다는
ecstasy에 빠집니다.
남의 글, 말에 임하여,
이 정도의 순간을 맞이 할 수 있다면,
그 상대의, 그 놈의 글, 말에 기특해하며, 즐거워 한다면 그것으로 족하지 않을까요 ?
상대에게 무엇을 더 구하려고 하는가요 ?
그 놈이 싸놓은 똥무데기에서 과연 무엇을 더 찾기를 기대합니까 ?
그것은 아무리 비싸게 보여도 제 물건이 아닙니다.
부질없는 욕심입니다.
그 욕심에 빠진 자신을 정직하게 비난하거나, 또는 혹간 좌절로 자신을 연민하는 순간,
종국엔 자신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는 그 진저리쳐지는,
그러나 결코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을 마주할 때,
우리는 단 하나의 슬픔을 대합니다.
전 그 찬란한 슬픔에 그저 침잠하고 싶습니다.
그 슬픔이 어떤 이에게는 모험심, 절제, 각오, 사랑, 충만, 또는 죽음을 불러 일으키겠지만,
이들이 빚어내는 그 현란한 세상을 전 제 나름의 방식으로
그윽하니 쳐.다.보.며 뚜벅뚜벅 걸어갈 뿐인 것.
그 외 또 무엇을 구할 수 있을까나 싶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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