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유감
이글은 某某 사이트(아래 링크)에 적힌 내용에 대한 반론 성격의 글입니다.
우선 그 글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1. 골프는 공공의 적이 아니다.
2. 골프장만 아니라, 농업도 농약을 흘려내므로, 이를 빙자한 골프 혐오는 온당치 않다.
3. 골프에 대한 정체불명의 증오는 폭력에 가깝다.
4. 골프는 게임과 같이 단지 기호에 불과하다.
5. 금강산에 골프장 만드는 것은 욕 먹을 일이 아니다.
간단히 축약하였으므로,
전하고자 하는 뜻이 바르게 소개되지 않을 우려가 있을 수 있겠으나,
대의는 그리 훼손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염려가 되는즉, 의심스러우신 분은
링크를 따라 그의 원본 글을 대해주시기 바랍니다.
그 글의 필자는 다른 글에서 말하길,
글 쓰는 이는, 사실과 관점의 차이에 유의하여야 한다고 했습니다.
즉 관점에 불과한 것을 사실인 양,
주장해서는 아니된다는 경계의 말을 하기도 하였지요.
하지만, 제가 이 글을 쓰게 된 이유 중에 하나이기도 하지만,
그 분이야말로 관점인 것을 사실인 양 토로한 것이 아닌가 하는
강한 의문을 가졌습니다.
하여간, 그 분의
“금강산 골프장, 뭐가 문제일까.......”를 읽고
다소간의 비회(悲懷)감이 있은즉, 실례를 무릅쓰고,
싱거우나마 몇자 끄적여 봅니다.
지난 글이지만, 뒤늦게 그 분의 글을 몇 개 따라가며 읽다보니
글마다 昭明하니, 반듯하고 가지런하여, 고개가 절로 수그러지더군요.
이리 지난 글을 대하여 별도의 글을 내는 것이,
제법 무례한 것임을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것대로 용서를 구할 노릇이되,
앞서 그가 일러 가르쳐주신 “사실과 관점”에 비추어
한 터럭 배운 바가 있으니,
이를 되펴는 것이 또한 그릇된 도리는 아니라 할 것인즉,
이리 조심스럽게 다가섭니다.
하지만, 이는 전적으로 그 글을 대향한 글이라 할 것도 없습니다.
사실 일부 공감하는 내용도 있고,
다소 비판적이라한들 전체를 반드시 부정하는 것도 아닌즉,
이글을 저만의 골프에 대한 독립된 글로 보아도 될 것입니다.
다만 그 글을 대하고 이런 글을 쓰게 되었으니,
혹 오해가 있지 않을까 저어되어 이리 사전에 곡절을 밝혀둡니다.
***
저는 중학교 때 골프를 대한 적이 있지만,
그후 커서는 골프를 치지 않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지난 9년래 다리 달린 육고기를 먹지 않습니다.
그전엔 가리지 않고 먹었습니다만.
이리 먼저 자신의 위치를 말하는 것은,
“사실과 관점”이란 reference frame에 미리 비추어 두려는 긴장 때문입니다.
골프가 여늬 것과 다를 바 없는 한낱 스포츠냐, 만악의 근원이냐 하는 문제는
관점에 따라 달라질 테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진실을 많이 접하면,
비록 사실 아닌 관점일지라도 건전해지리란 기대가 있습니다.
노무현 정권하에서 2007년 1월 현재 골프장 수는 딱 배로 늘어났습니다.
2007.1.1일 현재 18홀 환산 354개로 늘었습니다.
아마 그 후에 더 늘면 늘었지 줄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실제 그후인 2007년 8월 현재 확인한 바에 따르면,
환경단체 관계자는
"현재 건설중인 곳만 150~200개에 달하고 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노정권하에서 장관하던 유시민이란 사람은 얼마전
“새만금에 100개의 골프장(1800홀)을 만들어야한다.”고 외쳤습니다.
거기 총리하던 이해찬이라는 사람은 '골프황제'라는 닉까지 헌정 받았으며,
끝내는 그로 인해 낙마까지 합니다.
그로서는 사뭇 억울한 노릇이었을 것입니다.
또 다른 누군가는 전국토에 300개 짓자고 외치기도 하였지요.
이명박의 국토 배 갈라 돈 줍자라는 외침과 하등 다를 것 없습니다.
정작은 국민들이 아니라 특정인만 돈을 주을려고 하는 것일 터,
사뭇 경계하지 않을 수 없는 노릇입니다.
그 외 이헌재의 골프 경기 부양론 등 관리라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골프를 들어 우국지사가 됩니다.
설혹 골프가 건전한 스포츠일지라도,
왜 유독 골프장만 수배씩 늘려야 하며,
이로써 경제가 발전한단 말입니까 ?
이 좁아 터진 국토에 정권 하나 바뀔 때마다,
수배씩 늘어나야 할 당위성이 있습니까 ?
군사정권 때도 역시 골프장 허가를 빌미로 삥을 뜯었듯이,
저는 저들 사이에 무엇인가 의심스런 구석이 있을 것이라 짐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히말라야 안나푸르나에서도 비닐 태우는 냄새가 제천의식처럼 하늘가를 떠오릅니다.
돈만 내면 아흔 잡순 노인일지라도 업고서라도 산을 ‘정복’시켜 줍니다.
물론 다는 아니지만,
이젠 산을 오른다는 것은 스포츠란 너울 쓰고 산업에 포섭되어가고 있습니다.
거기 스프츠란 이름을 빌어 인간의 감춰진 욕망이 음욕처럼 진탕 흘레질을 해댑니다.
사는 것이 욕망의 발현이 아닌 것이 없겠습니다만,
골프를 ‘문화’란 코드를 빌려 독해를 해내든, ‘환경’ 측면에서 보든,
또는 모든 인간의 욕망을 불온하지 않은 것으로 보든 그것이야말로 관점이니
그것만을 가지고 나와 다르다고 나무랄 건덕지는 없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잘난 욕망이라도 드러난 결과가 외부에 해를 가하고 있다면,
그것이 스포츠가 아니라, 내 집 식구가 저지르고 있다한들
엄히 제한을 가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니, 욕망이라하여 그 자체에 면죄부를 줄 수도 있다라든가,
혹은 낙인을 찍는 식의 이해는
그리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누구든 제나름대로의 사적 욕망의 발출 여부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다만, 그것이 남에게 폐를 끼치는 것이 될 때는
제 양심의 이름을 빌어 긴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저의 입장도 물론 욕망이겠습니다.
여기 욕망의 충돌 문제가 발생합니다.
이런 諸 욕망의 충돌을 해결할 최소한의 시금석을
저는 남을 향한 해악에 두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자리에서 의론이 길어지므로 짜르고 넘어갑니다만,
‘남’이라 할 때 이는 인간으로 한정할 까닭은 없습니다.
넘어 동물, 자연까지 지평을 넓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일찍이 남해로 낙향한, ‘김열규’라는 교수는
거기 함부로 버려지는 쓰레기를 보고 ‘살이 떨린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저 역시 산에 다니다가 사탕껍질 하나 버려진 것만 보아도 치가 떨립니다.
저들의 욕망이 자연에 해를 가하는 현장은 참으로 끔찍합니다.
얼핏 토로하셨듯이,
만약 농토에 뿌려지는 농약과 골프장에 뿌려지는 농약을 등가교환하려고 한다면,
노쇠해서 죽는 일과 전쟁에서 죽는 일을 동일 지평에서 보는 것과
그다지 큰 차이가 없다는 생각입니다.
진정, 농약과 죽음이 부정적인 것이라면,
이를 막을 방책을 세울 수 있는 것에서부터 우리의 노력을 기우리는 것은
대단히 떳떳하고 의젓한 일이라 할 것입니다.
반대로 어차피 뿌려질 농약이니 더 뿌린들 대수랴 라든가,
어차피 죽을 몸, 전쟁에서 죽은들 어떠하리 란 생각은 너무 패배적입니다.
혹은 모종의 이득을 꾀하려는 위치에 서있는 사람들이 뱉어내는 말이기 십상입니다.
예컨대, 농약상이거나 무기상쯤 될런가 ?
만약 이들 상인이 아니면서도 그런 주장을 한다면,
그는 필경은 골프나 전쟁을 즐겨 사랑하는 이든가,
양주(楊朱)처럼 자신의 터럭만이 귀한 사람이라 할 것입니다.
(* 실은 저는 양주를 매양 싫어 하지만은 않습니다.
언제 그를 재평가하는 글을 써보고도 싶습니다.)
만약 담배가 남에게 폐해를 끼치는 것이라면,
개인의 기호, 욕망을 들어 방어만 할 것이 아니라,
공중 앞에서 흡연하지 않고 삼가는 미덕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 흡연자가 골방에 들어가있다면, 혼자 피든 말든 저는 괘념할 일이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차라리 나는 마약이야말로 숨어서 하는 한,
남한테 폐를 끼치지 않는즉, 개인에 전속된 기호행위로 방임한다고 하여도
그를 탓하고 싶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골프가 공해유발적인 측면이 있다면,
스포츠란 외투를 걸치고 난 몰라라 할 일이 아니라,
일응 부끄러워야 할 염치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골프장은 조성시부터 환경 파괴적입니다.
멀쩡한 산림을 수십만평 뭉개야 할뿐더러,
꺼진 곳은 북돋고, 높은 곳은 깍아내는 거대한 토목공사가 필수입니다.
게다가 지표면 위 60cm 정도 복토를 해야 합니다.
그래야 물 빠짐이 좋기에 잔디가 썩질 않습니다.
산을 그저 까뭉개는 것을 떠나,
아예 새로 터를 닦는 것이라고 보아야 옳습니다.
보통 18홀 기준 하루에 1000톤의 물이 소용됩니다.
대개 지하수를 이용하기 때문에 일대의 지하수는 거의 고갈될 지경입니다.
우리나라에 자생하는 잔디가 아니라, 이들을 관리하는 것도 만만치 않습니다.
해서 농약도 퍼붓듯이 들이대야 유지가 됩니다.
때문에 그 일대 하천은 모두 죽음의 강으로 변합니다.
농업에 사용되는 농약하고 비교하셨지만,
농업은 최소 일년 내내 농약을 치지는 않습니다.
더욱이 게서 생산되는 낟알은 생명을 부축하는 필수 요소입니다.
감히 기호니 취미니, 욕망 따위와는 궤를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산림보호법이 존재하는 이유는 산림이 우리 인간에게 적지 아니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무관치 않아 이 부분에 대하여 조금 압니다만,
비록 산주일지라도 잡목외 벌목도 제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골프장은 최소 수십만평 이상 멀쩡한 곳을 갈아엎어야 만들어집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거기 깃든 수많은 생령이 다치는 것이 가슴이 아픕니다.
나아가 멀쩡한 산, 비록 무정물이지만 그 산이 다치시는 것도 못내 안타깝습니다.
북한처럼 먹고 살 수 없어 산을 허무는 것이 용인되어야 하는가라는
특수한 문제는 별론으로 다루어져야 할 문제입니다.
사적 욕망 충족을 위해 음으로 양으로 외부에 해를 가하는 골프는
그저 골방에 틀어박혀 하는 게임과 같은 차원에서 인식될 성질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스포츠라든가, 취미라는 동질의 고깔모자 속에 도피하여
뭉뚱거려질 정도로 뻔뻔히 여유로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윤동주는 이리 말했습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
죽어 가는 생명을 앞에 두고
제 욕망, 취미를 운위하기 바쁜 불한당들,
기능 중심적이며, 생명경시사상이 몸에 배고,
돈에 이악스런 사람들,
더불어 이를 두고 희학질이 번지르르한 세태를 나는 개탄합니다.
욕망의 충족을 위해,
사람들이 어떤 짓을 저지르는지
아래 자료를 제공합니다.
산이든, 동물이든
인간의 욕망이란 것이
문화니, 기호니 하는 따위에 기대어 그냥 한가로히 변호될 것이 아니란 생각에
오늘 이 자리를 빌어봅니다.
산을 가벼히 망가뜨리는 그 맘보가,
종국엔 동물을 수단화하여 아무렇지 않게 유린하는 마음과 다를 바 없습니다
나아가 인간에게도 그리 하고도 남을 것입니다.
실제 오늘날의 생명공학은 이쪽 영토까지
군화 신고 성큼 들어와 있습니다.
(아래)==========================================
이하 자료,
www.withanimal.net 에서 퍼옴.
© 아름품
자료 엮어주신 김애리나님 감사드립니다.
(※ 사진 저작권 : 각 자료 사진의 저작권은 해당 저작권자에게 각기 속함.)
환경, 동물을 향한 인간의 유린, 착취.
나는 이들이 차원이 다른 별개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특수 장치를 설치하느라 머리에 철심을 빙둘러 박힘 머리에 뚫린 구멍으로 몇달간 화학물질을 주입 두 눈이 가려진 채 머리에 초음파 탐지기를 설치 신경병리학 실험의 대상으로 두개골에 죽을 때까지 전극을 꽂고 살아야한다. 인간의 뇌와 신경생리학적으로 가깝다는 이유로 고양이의 뇌는 전극으로 연결 화장품 실험과 옴 실험을 받느라 피부와 몸이 일그러진 토끼
드레이즈(Draize) 눈 자극 실험. 동물들이 눈을 긁거나 부비는 것을 막기 위해 머리만을 내밀고 고정되는 장치에 놓여진다. 실험 재료(표백제. 샴푸. 잉크 등)를 눈에 투입하여 관찰한다.
(뉴욕 타임즈) DNA변형으로 쭈글쭈글하게 변한 쥐 마취도 하지 않은 개의 다리를 쇠망치로 때리거나 인위적으로 간경화를 일으키기도 한다.
첫 번째 천으로 만든 어미 원숭이 - 계획이나 필요에 따라 고압의 압축 공기를 내뿜도록 고안된 가짜 어미로 새끼 원숭이가 몸체에서 떨어져나갈 만큼 강력했지만 새끼 원숭이는 점점 더 세게 어미를 껴안았다. 왜냐하면 두려움에 질린 새끼가 필사적으로 어미에게 달라붙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새끼의 머리와 이빨이 흔들릴 정도로 매우 강렬하게 진동을 일으키도록 고안된 괴물 어미 - 새끼는 더욱 더 대용 어미에 달라붙었다. 세 번째 괴물은 그 몸안에 철사틀이 내장되어 있어 앞으로 튀어나와서 새끼를 복부 표면으로부터 떼어낼 수 있도록 고안된 어미 - 새끼는 계속해서 어미 몸에서 떨어져 나가 바닥에 나뒹굴었는데, 새끼는 이에 굴하지 않고 천으로 된 몸체 안으로 철사틀이 다시 기어들어 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또 다시 대용물에 달라붙었다. 네 번째 못이 달린, 복부 표면 전체에 걸쳐 날카로운 놋쇠 못을 표출시키는 어미 - 그래도 새끼는 못이 원래 위치로 돌아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어미에게 돌아가서 안긴다. 실험 결과 - 상처입은 새끼에게는 어미에게 매달리는 방법 외에는 의지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비글견(犬)을 대상으로한 열 노출 실험 개들은 방에 고립된채 재갈이 물리워져 있었으며, 높은 습기가 동반된 화씨 95도의 열에 노출되었다. 음식이나 물이 주어지지 않았고, 그 상태가 24시간 지속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개의 행동을 관찰되었다. 앞발로 나무로 된 벽을 긁는 것. 계속 맹도는 것. 재갈을 벗기려고 머리를 쳐드는 것. 재갈을 나무 바닥에 앞뒤로 문지르는 것, 그리고 감시인에게 공격적인 행동을 보이는 것.. 등을 관찰했다. 몇 마리는 방에서 목숨을 잃었고 살아남은 개들은 방에서 꺼냈을 때 피를 토했으며 탈진해 있었다. 그리고 좀더 나은 방법을 발견하면서 실험을 계속했다.....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는 말은 빼놓지 않고...
도대체 위에서 언급한 실험들이 어떻게 자행될 수 있을까? 어떻게 가학성 변태 성욕자가 아닌 사람들이 원숭이의 일생을 우울로 몰고가는 데 일과를 보내고, 개에게 열을 가하여 목숨을 빼앗고 고양이를 약물 중독에 빠뜨리며 하루를 보낼 수 있는 것일까? 그리고 난 다음에 어떻게 흰 가운을 벗고 손을 씻고 자신의 가족들과 식사를 하러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납세자들은 이러한 실험에 세금이 활용되는 것을 용인해도 되는 것일까? 학생들은 흔히 부정의. 차별, 그리고 모든 종류의 억압에 대항하면서 어떻게 자신들의 캠퍼스 내에서 자행되어 왔던 - 그리고 현재도 자행되고 있는 - 잔혹성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일까? 사진 - 퍼옴 글 - 피터 싱어의 동물해방 중에서 나를 울게 하소서 비참한 나의 운명 ! 나에게 자유를 주소서 나에게 자유를 주소서 나를 울게 하소서 비참한 나의 운명 이슬픔으로 고통의 사슬을 끊게 하소서 불쌍히 여기소서 나를 울게 하소서 Lascia ch'io piang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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