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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set 농법

농사 : 2014. 11. 3. 09:25


reset 농법

작물마다 그 특성이 다를 터인즉,
작물 일반에 대하여 두루 미치도록 온전히 주장할 까닭은 없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을 보건대,
작물 일반에 걸쳐 거의 비슷한 하나의 작법을 행하는 것을 목도한다.

그게 무엇인가 하니?
잠깐 이를 설하기 전에 나는 그 작법에 대하여,
우선 reset 농법이라 불러 두기로 한다.

내가 유기농 카페 등속을 한 때 열심히 드나들면 배움을 익히던 시절이 있다.
처음엔 신기도 하고 재미도 있어 그들의 말씀을 경청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슬그머니 의문이 들곤 하였다.
저들은 대개 무슨 자재를 발효시켜 밭에 넣고는 하였다.
이게 거의 농가만의 전속 가법(家法)이거나 비법이라,
사뭇 요란 벅적하니 위광을 떨치며 알려주고는 하였다.

마치 신기(神氣) 오른 무녀(巫女)의 질펀한 한 판 굿거리인 양,
그로써 온갖 시름을 덜고, 무사태평 안녕을 구할 수 있으리란,
희망과 기대가 파란 연기처럼 뭉실뭉실 솟아올랐다.

헌데 나처럼 게으른 이에게 이게 먼 곳에 걸린 풍경화처럼 설었다.
나중엔 따라 하지 않기로 작정하였지만,
당시엔 하고 싶어도 그 수고를 감당할 재주가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 때, 시험 삼아 저들의 지침을 따라 하였는데,
이게 생각보다는 노고가 만만치 않았다.
게다가 자연을 추수(追隨)하는 나의 농업 철학에 비추어,
새록새록 회의가 들곤 하였다.

미생물의 발효는 위대하다.
그러하지만 이게 땅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저들은 사전에, 계획하고, 통제하여,
두엄 틀, 멍키 통, 빨간 고무 다라 따위에서 미리 만들어 둔다,

저들은 명색이 유기농이란 표지에 크게 의지한다.
그런데 그게 어이하여 밭에서 직접 일어나지 않고,
별도의 장치, 채비를 통해서 꾸며지는가?
나는 바로 이 지점에 서서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저들 중 어떤 이들은 숲의 땅 속을 헤집고,
밥을 넣고는 미생물을 기착(寄着) 시킨다.
그리고는 이를 토착 미생물 운운하며,
이를 원 자료(資料)에다 넣어 널리 증식시켜야 한다며 기염을 토한다.

만약 저들이 밭이 온전하다면,
왜 매년 숲에 가야 하는가?
밭이 무엇인가 부족하니까,
도리 없이 숲의 생태계에 의지하는 것이 아닌가?
만약 진정한 유기농이라면,
진작 자체적으로 완성되어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숲은 그냥 내버려 두어도,
홀로 온전하니 제 품성을 지키고 있다.
하지만 밭은 사람이 그리 돌본다고 하지만,
년년세세 부족함이 이어져 숲에 의지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유기농이니 자연농이니 울부짖지만,
끊임없이 외부의 자원을 끌어 들이고,
값비싼 외산 미생물을 구하고,
매년 수고롭게 별도의 장치에 기대어 발효 공정을 밟아가야 한다.

비료를 쓰지 않을 뿐,
저들이 노심초사 애를 끓이는 모습은 과시 초인적이다.
그 정성은 갸륵하고 함부로 훼할 수 없다.

하지만, 그 농법이 그리 훌륭한 것이라면,
이는 자연의 이름을 빌려 위광을 더할 노릇이 아니라,
다만 농부의 정성, 즉 인위(人爲)의 결과임을 선전하여야 마땅할 것이다.
가만히 있는 무위(無爲) 자연을 빙자할 것이 아니라,
사람의 힘, 노력으로써 그럴 듯한 가치를 만들어내었다.
이리 자신의 농법을 선양하여야 할 것이다.

기실 그러한 비판의 연장선에서,
무농약, 무비료, 무경운, 무투입 .... 따위의 무(無)자를 앞세운 농법이 등장하였지 않은가?

내가 어느 날 기사 하나를 읽었다.

그 기사엔 따르면,
그이는 낙엽을 요긴하게 쓰는가 보다.

“낙엽은 구청에 전화해서 받는다. 어떤 이들은 가로수에 농약을 치기 때문에 탐탁찮게 여기는데 미생물이 다 분해하기 때문에 마음을 놓아도 좋다.” 

이 글을 읽자 실소가 인다.

미생물이 농약을 다 분해한다면,
그럼 밭에다 직접 농약을 친다한들 무엇이 문제인가?

무농약, 무비료를 사용하지 않을뿐더러,
검은 멀칭 비닐도 쓰지 않고 소위 말하는 유기농을 지향하는,
저들의 정성은 갸륵함이 뻗치어 과시 하늘가를 맴돈다.
가까이 계시다면 막걸리 나누며 벗으로 뫼시고 싶다.
흔치 않은 일이다.
고맙다.

헌데, 도시 가로에서 모은 낙엽은 문제가 많다.
농약이 혹여 분해되는지 모르지만,
얼마 전 일부 지자치 단체에선 발암 성분이 포함된 살충제를 쓰기도 하였다.
차라리 밭에 치는 농약은 훨씬 더 안전하다.

그런데 문제는 농약이 아니다.
저들이 수거한 낙엽은 한마디로 더럽다.
온갖 쓰레기가 다 쓸려 들어가 있고,
게다가 지나는 차량에서 내뿜는 매연에,
수은 따위의 중금속이 침착되곤 한다.
난 이게 더 미덥지 않다.

어떤 이가 와송을 키운다고 하는데,
이자가 바로 이런 낙엽을 긁어와 용토를 만들더라.
목불인견(目不忍見)
거기 낙엽 더미 속엔 온갖 쓰레기가 범벅으로 버무려져 있었다.
와송이야말로 비료 없이 기왓장 위에서 온갖 악조건 속에서 버티며,
약성을 키우는 것인데 이런 따위로 감히 그 곧은 품성을 지켜낼 수 있는가?
게다가 제초제까지 뿌려대고 있음이니,
참으로 작법 태도가 참람스럽기 그지없다.

다시 돌아와, 그러니까 유기농하는 이의 마음 셈에 커다란 근심이 있다 하겠다.
비료를 쓰지 않으니까 무엇인가 그 이상으로 힘을 낼 것을 밭에 투하하여야 한다는 것.
바로 이 순간 그는 관행농 농부와 별반 다르지 않은 족속이 아닌가?
나는 저들에게 이를 걱정한다.

나 역시 블루베리를 키우는 중에,
조그맣게 텃밭을 일군다.
무농약, 무비료는커녕 저들처럼 검정비닐도 쓰지 않는다.
그런데 금년엔 미처 돌보지 못하는 사이 작물이 풀에 완전 제압을 당하였다.

풀숲에 숨어 있다 어쩌다 별빛처럼 반짝이며 내 눈에 띄는 과일들을 취하곤 하는데,
이것이야말로 보물이다.
땅에 떨어진 것을 한참 내버려 두어도 썩지 않고 탱탱하다.

발효 퇴비를 만들어 유기농을 한다고 하는 순간,
우리는 아직도 생산량을 의식하고 있는 것이다.
관행농하는 이들을 따르지는 않겠다고 하면서도,
기실 마음 한가운데는 저들 못지않은 소출량을 겨누고 있다.
난 이런 욕심을 경계한다.
여기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이상,
언제나 꾀함이 일어나고,
급기야는 낙엽 같은 쓰레기 외부 자원을 끌어들이려는 유혹에 지게 된다.

난 오늘날 모든 농부가 이런 욕심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을 안다.
하지만 이런 현실을 회의하고,
보다 건강한 철학을 가진 사람들이 늘어가길 바란다.

이러할 때,
농산물은 온전해지고,
정당한 가치 평가가 이뤄지며,
사람들의 건강이 지켜지고,
우리들의 마음 밭이 정갈해질 수 있다고 믿는다.

reset 농법?

사람들은 당년도에 온갖 것을 다 꾀한다.
비료를 동원하거나,
비법, 특제 발효 퇴비를 만들어 흠뻑 밭에 넣는다.
그러니까 관행농이든 유기농이든,
한 해 동안 한껏 욕심에 부역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듬해 봄이 되면,
넋을 다 뽑아낸 밭을 다시 reset한다.
이제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은 밭.
다시 밭갈이를 하고,
한껏 비료든 퇴비를 처넣는단 말이다.

봄이 시작되어,
밭에 나서면 그들은 다시 시작한다.
power on reset
파워를 넣자마자,
모든 것은 원위치 처음부터 새로 시작되고 만다.
거긴 기록된 역사가 남아 있지 않다.
밭은 모든 것을 빼앗겼기 때문에 무화(無化)되어 있다.
그러함이니 다시 밑바닥부터 시작된다.

연속성이 없이,
언제나 당년도를 의식한다는 말이다.
경영학에서 말하는 대리인 비용(agency cost)의 문제와 비슷하다.
농부라는 것이 밭과 따로 노니깐,
최대한 투입으로 최대한 뽑아내고 고갈시키고 만다.
그 다음 일은 주주가 감당할 노릇이지,
우선은 당대 자신의 가시적인 경영 성과에 집착하고 만다.

그러하니깐.
봄이 되면 다시 reset하여 새로 시작하여야 한다.
전 해와 올 해 밭은 이미 주인이 바뀌고 만 것이다.
밭은 하나이되 주인이 매년 다르다.
그러함이니 on going 연속성이 유지되지 않고,
언제나 새롭게 개시된다.

그러함이니 비료든 퇴비든 듬뿍 넣고 다시 시작해볼 뿐,
거기 밭엔 도무지 역사적 현실이 전개되지 않는다.
회사와 경영주가 다르듯,
밭과 농부는 각기 딴 주머니 차고, 
셈을 달리하여 따로 놀게 된다.

대(對)하여 숲을 보라.
언제 숲이 아랫마을 밭에 가서,
고두밥을 넣고 미생물을 구걸하든가?
봄이 되었다 하여,
밭을 새로 갈고,
검은 비닐 멀칭을 하는가?
여름이 되었다고,
한 봉에 수만 원씩 하는 영양제를 엽면 시비니 하는 요상한 짓거리를 하는가?
가을이라고 감사 시비를 하는가?

그러함인데도,
자칭 유기농합네 하는 이들은,
산에 와서 고두밥 묻고는 미생물을 취하여 가져간다.
그리고는 이게 토착 미생물이라며 기염을 토한다.

그리 잘난 이의 밭엔 왜 토착 미생물이 없어,
산을 기웃거린단 말인가?

난 게으른 품성이 다행이다 싶다.
만약 내가 천성이 부지런하였다면,
유기농에 뜻을 세웠다한들 필경은 저들처럼 갖은 요사스런 짓거리를 마다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들을 가만히 보면 관행농 한다는 이들보다 곱절은 더 별난 짓을 다한다.

처음 농장을 만들 때,
뭣 모르고 남 따라 구입한 비료들이 수년 째 그냥 내버려져 있다.
조금 사용하다가 남은 것 약간,
그리고는 이내 마음을 곧추 세웠기에,
부대도 뜯지 않은 것이 구석에 방치되어 있었다.

얼마 전 이를 수습하여 이웃 농부에게 넘겨주었다.
지금 남은 것은 유안이 있는데,
이 역시 사다만 놓고 하나도 사용하지 않은 채 그대로다.
이는 혹 필요한 이가 나선다면 넘겨줄 계획이다.

얼마 전 지난여름에 블루베리를 사간 분이 재차 방문하였다.
17개월 된 손자에게 먹였다 한다.
다른 곳에서 산 블루베리는 먹지 않는데,
신기하게도 이곳의 것은 잘 먹는다 한다.

맛이 있다, 없다를 떠나,
우리 것은 ‘정결하다’
아마도 그 아이는 이를 감지한 것이 아닐까 싶다.
난 우리 밭, 그리고 거기 자라는 블루베리를 순수(純粹), 정순(貞純)하게 대하고 싶다.
 
純粹,不雜。
純粹,精也。

잡되고 삿되지 않으며,
그 정수만 오롯이 빛나는 그런 사람, 사물을 만나고 싶은 게다.

純粹素樸者道之幹也。

순수하고 소박한 것은 도(道)의 줄기라 하였다.

此真人之遊純粹素道。

참사람 진인은 순수한 도의 세계를 노닌다 하였음이니,
내가 비록 탁한 이 세상에 기탁하고 있지만,
우리 밭과 블루베리를 통해 그를 배우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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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 : 2014. 11. 3. 09: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