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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요유 : 2016. 2. 19. 15:59


최근 우연한 기회에 내가 쓴 글이 다른(타인) 블로그에 도용된 것을 발견하였다.


자신의 이름으로 태연히 내 글을 전재(轉載)한 것인데,

외양상 이게 외부에서 불러왔다는 표지를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

내가 비밀글로 이 글이 내 글임을 저이에게 알렸다.


비밀글이 아니고 공갯글로 알리면,

저이가 뭇 방문객에게 낯이 부끄럽게 되지 않겠는가?


그러자 그이가 좋은 글이라 베꼈다며 죄송하다고 한다.

그러면서 원한다면 삭제하겠단다.


내가 그래서 출처를 밝히든가,

불연(不然)이면 삭제를 하라 답하였다.


얼마 후, 그 글이 삭제되었다.


이제 이게 과연 포틀 검색에 걸리는가 싶어 확인하니,

이번엔 다른 곳에서 동일한 글을 또 도용한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역시 비밀글로 내 글임을 밝히는 글을 그 블로그에 남겼다.

이거 영 단작스러운 일을 내가 하고 있구나.

그러자 그이는 일언반구도 없이 삭제하였다.


나는 내 글에 마우스 드래그, 또는 우(右) 클릭 금지 따위는 하지 않는다.

이는 글 절취(截取)를 막는 짓이 남우새스러운 짓임을 알기 때문이다.

어떠한 조치를 취한다한들 일단 모니터 상에 나타난 것은,

사용자 단말 측에 그 흔적이 남는다.

이런 것을 취하는 것은 문제도 아니 된다.

그러함이니, 저런 따위의 짓은 공연한 도로(徒勞)임을 알아야 한다.

실제 아무리 교묘한 조치를 해두었다한들,

그게 내겐 아무런 장애도 되지 않다.

필요만 따른다면 나는 이미지 내용도 얼마든지 텍스트로 바꿀 수 있다.


한편,

내가 쓴 글이라 한들 그게 온전히 내 것이라는 보장도 없다.

수 많은 선인(先人)과 동시대의 현자(賢者)들의 훈김(薰氣)을 쬐이지 않은 것이 있겠음인가?


공자(孔子)는 예악의 근원으로서 주공(周公)을 두고, 사모하여 모셨다.


子曰:「甚矣吾衰也!久矣吾不復夢見周公。」

(論語)


“공자 왈, ‘심하구나, 나의 노쇠함이여!

오래 되었구나, 내가 주공을 꿈에 다시 보지 못한 것이.’”


사모함이 깊기가 이만 하랴?

오랫동안 주공을 꿈에 보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자신이 쇠약함에 빗대고 있다.


이러하자, 묵가(墨家)는 주공보다 앞선 우(禹)를 앞세우며,

농가(農家)는 신농(神農)에 기대어,

권위를 사며 제 사상을 폈다.


그러자, 이번엔 맹자는 우보다 앞선 요순(堯舜)을 끌어들여 앞세웠다.

나중에 도가는 더욱 거슬러 올라가 황제(黃帝)에 가탁(假託)하였다.


이리 자신들의 사상에 권위를 외부 성왕에서 구하는 일을,

가상설(加上說)이라 한다.


이러하듯 진리를 외부의 권위에 두는 일은,

인도 논리학 즉 인명학(因明學)의 정교량(正教量)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를 겸손함의 외표(外表)로 볼 수도 있지만,

유가의 경우, 다음과 같이 술이부작의 태도에 기인한다.


子曰:「述而不作,信而好古,竊比於我老彭。」

(論語 述而)

(※ 老彭 : 商朝賢大夫, 好述古事)


“공자 왈, 선인들의 지식을 전수하지만 새로 짓지는 않는다.

선인의 가르침을 믿고, 옛 것(책)을 좋아한다.

과시 나는 상(商)나라의 대부 노팽(老彭)에 비견된다 하겠다.”


이렇듯, 술이부작이란 자신이 사상이나 지식을 창신(創新)하지 않고,

다만, 선성선현(先聖先賢)의 가르침을 그저 전술(傳述)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당세(當世) 자기가 가르침을 펴는 일을 자임하고 있다는 기개를 엿볼 수 있다.

나는 이 말씀 앞에 서면, 공자의 그 떳떳함, 당당한 태도를 느끼게 된다.


각설하고,

공자와 같은 성인이 아니고, 이제 내 글에 대하여 말한다.


기실 천하의 글은 천하인이 주인인 것.

나 역시 다른 훌륭한 분들의 훈김으로 글을 써나아가고 있을 뿐인 것을.

내 글이라는 것, 다만 내 이름을 앞세웠을 뿐,

혹간 터럭 한 오라기 내 생각이고, 나머지는 다 남에게 신세를 지고 있음이다.


내 글은 밖으로 나아간 이상 이미 내 것이 아니다. 

허공중에 바람 타고 나르는 날개처럼, 물을 따르는 외로운 돛단배와 같이 

쉬이 지나가는 인연의 터럭 실줄인 것.

우리가 말을 밖으로 내놓으면 "옴마니반메훔" 알파와 오메가 

그 소리의 영혼이 가없는 우주를 끝없이 떨며(振動) 나아간다. 

그런즉 그 끝줄을 움켜지고 내것이라 우김은 얼마나 구차한 노릇이겠는가?


난 내 글이 sourcer는커녕 connector로서도 아닌, 

그저 평범한, 처처(處處)에 質料化, 無化되기를 소망한다.


그러함인데도,

내 글을 도용한 곳 앞에 서서 나는 왜 서성거리고 있는가?


거기 저들 블로그를 보니,

기천(幾千)가지 글이 올려져 있다.

남의 글을 통으로 옮겨두고 자신의 이름을 걸어 두었다면,

이것은 과연 옳은 처사인가?


제 글은 하나도 없이,

다만 남의 글로써 무엇을 도모하고자 함인가?


많은 책을 기증하겠다는 것을 앞에 두고, 이를 사양한 분이 계시다.

책이 아무리 많다한들 그 책 주인의 안목과 기도(企圖), 소구(所求)로 모아진 것임이니,

그것은 그의 인생을 규정하는 이력일 뿐,

하나의 장부로서, 내 자신의 가는 길과는 다르다.

이를 탐할 일이 어디에 있으랴?


계집 아이처럼 소꿉장난하듯,

기천 아냐 기만을 모아둔들 다 허깨비 그림자 노름이다.

남의 글을 제 이름으로 모아둔다는 일은. 


허나, 남의 글을 질료(質料)로써 내 글에 가지런히 복속시키는 것은 무엇을 탓하랴?

가령 건축가가 집을 짓고 나서 정초(定礎)에 제 이름을 새겼다 하자.

비록 그 건축물의 벽돌, 서까래, 기와가 남이 만든 것이라 한들,

그 집 건축가가 벽돌쟁이 이름을 훔쳤다 할 수는 없다.


건축가란 무엇인가 ?

그에겐 설계 컨셉과, 철학, 소망이 있다.

이는 그의 가슴과 머리에 들어 있다.

하지만, 구체적 현실에선 건축 자료를 얽어 건축물로 구현할 수밖에 없다.

이 때 비로소 우리는 장엄한 건축물을 대한다.

아무리 하찮은 건물이라도 그의 소망이 녹아 있고

철학이 숨어 있다.


내 몸뚱아리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살이니 뼈니 모두 타자의 명을 빼앗아 만들지 않던가?

그러하고도 제 이름을 가슴에 자랑스러이 붙인다.

왜 그런가?

이는 유일자인, 내 청정 영혼의 부름이 시킨 일이기 때문이다.

술이부작 공자처럼 오연(傲然)하니 떳떳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허나, 저들처럼,

제 생각 하나 일으키지 못하고,

남의 집에 제 문패를 달아둔들,

도대체 이게 무슨 뜻이 있으랴?


여기 블로그의 저작권 관련 제한 사항은,

다음 내용과 같다.

이에 여기 이미지 링크를 매달아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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