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시와 새 떼
옥시와 새 떼
내가 수 년 전에 겪은 일이다.
강아지 두 마리와 함께 동네 뒷산을 산책하고 있었다.
숲 사이로 난 소로를 걷고 있었는데,
앞 서 가던 이들이 검정 봉투를 풀숲에 휙 버린다.
이거 내 눈을 빗겨갈 수 없다.
가서 보니 왜 아니겠는가?
쓰레기 봉투였다.
내가 가던 이에게 쓰레기를 왜 버리는가? 이리 외쳤다.
조금 만 더 가면 산중에 군부대가 하나 있다.
내가 그들 뒤를 쫓아 그 정문 앞께에 이르렀다.
그러자 녀석들이 내게 달려들며 엉겨 붙는다.
싱갱이가 일어났는데,
나는 두 손을 강아지에게 묶여 운신하기가 어려웠다.
하여, 부대 위병(衛兵)에게 신변보호를 구하였는데,
그들은 눈만 껌벅이며 소 닭보듯 구경만 한다.
그 때 녀석 중 하나가 갑자기 내게 주먹을 날린다.
당시 나는 강아지를 좌우 양 팔로 나눠 안고 있었다.
이것 그냥 맞을 판이다.
나는 슬쩍 피하며 앞지르기로 냅다 그자의 가슴팍을 내질렀다.
녀석은 옆으로 빗겨 맞고 고꾸라지고 말았다.
위병에게 112 신고를 부탁하자,
이 비열한 놈들은 비실비실 산 아래로 줄행랑을 친다.
내가 위병을 보고 일렀다.
내가 도움을 청하였는데, 그대들은 왜 외면을 하였는가?
이리 나무라자 자신들의 소임은 정문을 지키는 것뿐이란다.
해서 내가 그럼 책임자를 부르라 일렀다.
초급 장교가 내 부름에 따라 나왔다.
그에게 내가 일렀다.
“무릇 군대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존립한다.
그대들의 위병은 당전(當前)하는 현실 한 가운데에서 국민 하나가,
생명의 위해(危害)를 받고 있음을 목격하고 있었음에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게다가 도움 요청에도 이를 외면하였다.
설혹 그들의 소임이 정문을 위수(衛戍)하는 것일지라도,
우선 조치 후, 최소 상부에 보고하여 지침을 받았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면서 君命有所不受를 꺼내 저 초급 장교를 을러보았다.
여기 그 원문을 다시금 새겨본다.
軍有所不擊,城有所不攻,地有所不爭,君命有所不受。故將通于九變之利者,知用兵矣。將不通于九變之利者,雖知地形,不能得地之利矣。治兵不知九變之術,雖知地利,不能得人之用矣。(孫子兵法 九變)
“적군도 쳐서는 아니 되는 경우가 있고,
성도 공격해서는 아니 될 곳이 있으며,
땅도 서로 다투어서 아니 될 곳이 있으며,
임금의 명령도 받아들여서는 아니 될 것이 있다.
그런즉 장수가 구변(九變)의 유리한 점에 통달해 있으면,
용병에 능하다 할 수 있으며,
장수가 구변(九變)의 유리한 점에 통달해 있지 못하면,
비록 지형을 안다 하여도,
지형의 잇점을 얻지 못한다.
병졸을 다스릴 때 구변(九變)의 술수를 아지 못하면,
비록 지형의 잇점을 안다 하여도,
사람의 쓰임(용병)을 얻지 못한다.”
그러니까, 무릇 군사의 일이란 상황에 즉응하여 조처할 도리를 찾고,
적절한 대응을 할 노릇이지, 고착된 사고를 갖고 있으면,
적군을 이길 수 없는 법이다.
손자병법에선 이 이치를 九變之利, 九變之術이라 하고 있는데,
이 중 핵심은 君命有所不受라 생각한다.
임금의 명령까지 받아들이지 않을 때가 있다는 이야기는,
전쟁터의 상황에 따라 임기응변(臨機應變)하는 것은 전적으로,
장수의 책임이라는 것이다.
이 도리를 사무쳐 깨우치지 못하면,
유능한 장수가 될 수 없으며,
적군을 이길 수도 없다.
위병이 제 소임이 정문 지키는 것이라 고집하며,
당장 문 앞에서 국민 하나가 죽어가고 있는데도,
나 몰라 하고 있어야 하겠음인가?
이리 자문해 보면 내가 말하는 뜻이 자명해지리라.
이어 내가 말을 더 보태었다.
“위력(威力)을 가진 국가 권력기관이,
가까운 국민의 안전을 소홀히 한다면,
그런 국가기관을 국민이 기르고 유지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음인가?
그대들의 위력은 국민이 위임한 것임을 알아야 하며,
그것은 바로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라 주어진 것이다.
이를 망각한다면, 그대들 군인들은 하등 쓸모가 없는 것이다.”
옥시로 인해 무고한 인명이 죽어나갔다.
이게 5년 전 일이다.
그 동안 모른 척 뒷짐 지고 있던 정부 당국은,
사타구니에 더운 국 쏟고 좆을 데었는지,
선불 맞은 멧돼지 형상을 하고서는
헐레벌떡 수사를 하고 있다.
도대체가 해망(駭妄)스럽기 짝이 없다.
어찌 이러고서도 국가라 이를 수 있겠음인가?
국민의 생명이 절단이 났다.
그런데 국가라는 것이 5년 동안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있었다.
이러하고서도 국정을 위임받을 자격이 있는가?
당장 저들을 소환하여야 한다.
어느 날, 새 한 마리가 비닐하우스 안으로 들어와 나가지를 못하였다.
그러자 동료 새들이 떼로 몰려와 우짖으며 난리를 친다.
내 즉시 측창과 앞 뒷문을 열고는 나아갈 길을 터주었다.
옥시로 인해 어린 생명이 죽어나갔다.
저것은 유가족의 일만이 아니다.
우리 모두의 일이다.
우리 모두는 저 새 떼처럼 들고 일어나,
정부 당국자를 질타하고,
옥시 측의 책임을 묻고 따져야 한다.
궁극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기업은 ‘기업 살인죄’를 원용,
기존의 법원을 검토하여 기필코 법인을 해체시켜버려야 한다.
도대체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주지 못한다면,
그 따위 정부는 더 이상 필요 없다.
세월호 역시 멀쩡한 사람들이 새 떼처럼 들고 일어나지 않고 있는 사이,
유가족만 고군분투 또 한 번 골병이 들고 있다.
저들의 골수에 맺힌 한이 내 일인 양 너무 아프다.
분노가 인다.
2년이나 지났지만 여전히 시원하게 밝혀지지 않고,
질질 끌고만 있다.
역시 우리 모두의 일이다.
함께 새 떼처럼 들고 일어나 울부짖어야 한다.
그리고 책임을 방기하고 있는 정부 당국을 되우 꾸짖어야 한다.
여기 옥시 참사 참고 자료 링크를 걸어둔다.
☞ 심상정 “1차 책임 정부‧검찰…옥시 청문회, 도요타 때도 회장 불렀다”
'소요유'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불확정성과 주체적 책임 (0) | 2016.05.09 |
---|---|
기사성 광고 (0) | 2016.05.05 |
TNR 이후 (2) | 2016.05.04 |
나는 촌놈이 싫다. (2) | 2016.05.02 |
도요타의 간판방식 (0) | 2016.04.29 |
바보와 은자 (4) | 2016.04.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