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확정성과 주체적 책임
나는 파지 줍는 할머니를 한 분 알고 있다.
어느 날 TV에서 뉴스가 진행되고 있었다.
야당이 좀 표를 얻었는가 싶다.
이번에 해결해야 할 과제가 있다며,
이대통령과 박대통령 전임/현직들에 대한 비리를 캐내야 한다는 뉴스가 막 지나고 있었다.
그러자 파지 줍는 할머니가 나를 보고 동조를 구하듯 한 억양으로 말한다.
‘아니 무슨 잘못을 캐겠다는 것이야?’
‘李는 사대강 비리와 방산비리, 자원외교 등과 관련된 비리요,
朴은 부정투표 시비와, 세월호 관련 문제를 두고 하는 말이지요.’
‘지놈들은 그보다 더한 놈들이 뭘 조사할 것이 있다고...’
숨이 막힌다.
할 말을 잊는다.
이나 박을 지지하고, 아니고서를 떠나,
더한 놈이 있으니까,
죄가 없다는 저 인식의 우매함, 그렇다 그 폭력성에 질리고 만다.
정치, 사회, 경제학적 대부분의 문제는 기실 계급 문제에 터하고 있다.
가령 부자 감세라는 것은 자본가를 보호하기 위해,
무산 계층의 이익을 침해하고 있는 정책이다.
저들은 적하이론(滴下理論)을 내세우며,
부자가 돈을 많이 벌게 되면,
그게 흘러 넘쳐 무산 계층에게도 흘러 들어간다고 주장한다.
이 이론이 여러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지만,
요즘 같이 공급과잉의 시대엔 더욱더 턱도 없는 이론이다.
실제 우리나라 재벌들의 행태를 보면 감세로 인한 효과는,
저들이 주장하고 있는 것과는 정반대이다.
(출처:http://www.ceoscoredaily.com/news/article.html?no=7676)
감세에 따라 유보율이 놀라울 정도로 늘어나고 있다.
이 말은 뒤집으면 투자를 하지 않고 있다는 말이다.
도대체 기업체가 투자하지 않고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겠는가?
하니까 감세로 인해 투자가 일어나고, 수익을 내며,
결국 이게 흘러넘쳐 일반인들도 덕을 본다는 것은 순전 엉터리임이 입증되었다.
이게 李로부터 시작되었지만, 朴에 이르도록 줄기차게 고수되고 있는 정책이다.
서민 재산을 축내 저들 재벌 곳간을 채우고 있는 것이다.
유산/무산 계급으로 나눠 사회경제학적으로 새겨보자면,
저 파지 줍는 할머니는 도대체가 저들 정권을 지지할 이유가 한 치도 없다.
가령 녹색당의 정강정책으로 보면,
‘노인, 장애인, 농민, 청년을 시작으로 모두에게 기본소득’ 이러한 것이 있다.
백번 양보하여 이것 실현 여부는 믿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러한 정책을 내세우기는커녕,
이를 두고 좌빨 정책이니, 나라를 망하게 할 정책이라 하고 있는 것이,
저 파지 할머니가 지지하는 정당의 입장이다.
정의당만 하여도 친 노동자 계급 권익을 위한 정당이다.
그러함이니 계급적으로 보면 저 파지 할머니가 의지할 곳은 명백하다.
아니 이 당들을 지지하지 않는다 하여도,
최소 자신과 반계급적인 새누리당을 지지할 이유는 없다.
그러함에도 맹신적으로 저 당을 지지하고 있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
도대체가 그 이유를 알아내기 힘들다.
내 그 까닭을 알기 위해 유심히 세상을 관찰하고,
관련 자료나 책을 보긴 하였으나 아직 충분치는 않다.
내가 이 할머니 이야기를 처에게 하였더니,
‘왜 그냥 두었느냐 그렇다면 가르치지 않고서.’
이리 지적을 하더라.
아닌 게 아니라 그런 충동이 일기는 하였으나,
이게 쉬운 일이 아니라 고민만 하고 말았다.
이는 분명 내게 스스로 비열한 일이다.
그러면서 이리 덧붙였다.
‘가르치려 한다면 알파벳부터 시작하여야 하는데,
이게 그리 간단하겠는가?
같이 사는 사람도 교화(?)를 시키지 못하는데,
어쩌다 길가다 만나는 남에게 미치랴?
자고로 정치, 종교 문제는 피차 빗겨갈 일이지,
아는 척 하다가는 자칫 분란이 일어나는 법이다.’
내 이리 핑계를 대고 있음이니,
달콤한 말밥 던지는 정치인이 되기는 틀렸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마음이 편치 않다.
세월호 사건 때,
유족의 아픔은 나 몰라 하고,
햄버거, 치킨 먹으며, 그 옆에서 폭식투쟁을 태연히 저지르는 이들의 신념 체계를,
넘보는 것이 그리 쉽겠는가?
이미 인간의 양심이 허물어진 이에게 나 같은 범인이 무엇을 더 도모하겠는가?
저 파지 할머니는 새누리 같은 자신의 계급에 반하는 정책을 펴는 당을 지지함으로써,
무엇을 얻고 있는 것인가?
분명 저들에게 만족을 주는 무엇인가가 있을 것이다.
그게 비록 엉터리라 할지라도 말이다.
나는 비록 내가 지지하는 정당이 있을지라도,
잘못을 저지르면 가차 없이 비판을 할 것이며,
성에 차지 않으면 바로 버리고 말 것이다.
당이 우선이 아니라, 나의 가치, 신념, 철학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종교 역시 마찬가지이다.
내가 믿는 종교일지라도,
교리 상 문제가 있으면 비판 정신을 거두지 않을 것이며,
성직자 비리에도 난 단호하다.
헌데,
기실 나는 딱히 지지하는 정당이나, 믿는 종교가 없다.
좋은 정책은 그게 어느 당의 것일지라도 지지하고,
바른 교리라면 그게 어느 종교일지라도 믿는다.
나는 내 신념에 충실하다.
그리고 그 신념에 따른 책임을 회피하지 않는다.
책임이 있기에 새로운 배움을 멈출 수 없다.
신념은 고집스럽게 지키는데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잘못을 고치고, 옳은 방향으로 수정해나갈 용기도 있어야 한다.
***
불확정성 원리(不確定性原理, uncertainty principle)
이 원리는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특정할 수 없다는 것인데,
수식으로는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시그마 x : 위치의 평균에 대한 제곱평균제곱근 편차
시그마 p : 운동량의 평균에 대한 제곱평균제곱근 편차
ℏ(h-bar) : ℏ=h/2π
h : Planck constant)
위치와 운동량의 불확정성은 플랑크 상수로 제한 당하고 있다.
이게 자연계의 실상이다.
이것은 일반인들에게 비교적 많이 알려져 있다.
하지만 조금씩은 잘못 알고 있기도 한다.
대표적인 것은 이게 측정 때문에 생긴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이는 바른 이해라 할 수 없다.
측정과는 상관없이 입자의 물리적인 특성이 그런 것이다.
그 이전까지는 뉴턴 역학에 따라,
위치와 운동량을 특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불확정성 원리라는 것은 이 양자를 동시에 정확히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자연의 불완전성이나, 물리학의 부족함이 아니라,
자연의 본질에 속한 문제일 뿐이다.
기실 이러한 성질 때문에 입자가 때론 파동으로 보이기도 한다.
대표적인 것이 빛인데,
빛은 입자와 파동성을 동시에 갖고 있다.
이를 파동입자 이중성(波動粒子二重性, wave–particle duality)이라 한다.
후엔, 빛뿐이 아니고, 모든 물질은 파동입자의 이중성을 갖고 있다고 밝혀졌다.
이는 불확정성 원리의 귀결이기도 하다.
나는 이것은 물질의 원리만이 아니라,
우리 정신의 원리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하곤 한다.
가령 인물, 사태, 상황을 앞에 두고, 나쁘다 그르다 이리 특정하기보다는,
일정 조건 구속적으로 평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하는 것이다.
우리가 사물을 보는 관점에 따라,
어떤 부문이 두드러지게 보이고, 다른 부문은 미약하게 보이는데,
그 강약은 관점에 제한을 받기도 하지만,
보다 근원적으로는 사물의 성질이 그러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하는 것이다.
파지 할머니가 자신한테 유/불리한 계급정당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는 것은,
분명 인식, 판단 오류가 있겠지만,
각 계급 정당이 펴는 정강정책 그리고 그 실제의 변동성내지는 불확정성이 존재하기 때문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때론 제 편리대로 분식(粉飾)도 할 터이고, 변절도 할 터인데,
이것조차 모두 포함하여 사물의 본질을 이루고 있는 것이 아닐까?
또한 인성(人性)이란 것도 선악 이분의 구조가 아니라,
선악 혼재(混在) 구조로 되어 있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불확정성 원리를 도입한다면,
관념이나 철학을 연구할 때,
보다 겸손해지고, 때론 외려 더 철저해지지 않을까?
하지만,
그러할수록,
주체로서의 인식이나 판단 능력은 더욱 더 깊고, 날카롭게 벼려나가야 한다.
도대체가 사물의 본질이라 하여 거기 따라 좇을 이유는 없다.
사물이 그른 것은 그른 것이요, 악한 것은 악한 것이니,
이를 추종하고 하지 않고는 주체의 윤리의식과 실천의식에 달려 있다.
때문에 인간은 주체적 책임의 존재이다.
따라서 불확정성이란 본질을 가진 사물, 사태 앞에 서있다한들,
이 사실이 제 결정의 결과를 무책임하게 외부에 돌릴 핑계가 되지는 못한다.
온전히 제가 감당하여야 한다.
게다가 그 결정이 공동체 성원에게도 미칠 일이라면,
더욱 책임의 무게는 크다.
저마다 이런 인격으로 성장할 때,
사물의 본성도 진화하게 될 것이다.
인문학적 또는 사상사적 본질내지는 내용이란 실로 고정적인 것이 아니다.
불확정성을 갖는다한들 그 내용 지평은 진화론적으로 변할 것이다.
이는 주체적 인간에 의해 추동되고 발전하게 된다.
그러함인데,
세월호 유족 앞에서 폭식 투쟁하고,
옥시 사건에서 수뢰하고 조사결과를 조작하고,
사실을 왜곡하는 법률 대리인들의 작태는,
책임 주체적 존재임을 스스로 방기하는 짓이다.
나는 이들에게 사회적 존재를 논하기도 앞서, 주체적 존재의 사망 선고를 내린다.
불결한 녀석들이다.
파지 할머니의 경우,
화는 나지만, 나는 책임을 묻지는 못하겠다.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기 전,
사회적 안정망의 불비(不備)는 우리 모두의 잘못이기 때문이다.
저들을 어찌 대할 것인가?
앞으로의 나의 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