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를 위한 한국
"우리나라에 공자가 들어오면
한국을 위한 공자가 되지 못하고 공자를 위한 한국이 된다.
우리나라에 부처가 들어오면
한국의 부처가 되지 못하고 부처를 위한 한국이 된다.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들어오면
한국을 위한 예수가 되지 못하고 예수를 위한 한국이 되니..
이것이 어인 일이냐. 이것도 정신이라면 정신인데..
이것은 노예 정신이다.
자신의 나라를 사랑하려거든 역사를 읽을 것이며,
다른 사람들에게 나라를 사랑하게 하려거든 역사를 읽게 할 것이다."
(丹齋 申采浩)
단재 신채호 선생의 글을 읽으면,
일순(一瞬) 피가 뜨거워진다.
당시의 암울한 한국,
역사를 찬탈 당한 비운의 조국을 생각할 때,
한국인으로서 어찌 비분강개하지 않을 수 있으랴?
그런데, 내가 마침 어제 노객(老客) 두 분의 말씀을 듣게 되었다.
하여 몇 가지 생각을 일으키게 되었다.
이 분들은 불교 공부를 하신 듯, 연신 불교에 대하여 대화를 하신다.
한 분이 금강경의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에 대하여 말하는데,
당신은 10 여년 불교 공부를 하였다 이르신다.
이것을 일러 4상(四相)이라 하는데, 대개는 조금씩 달리들 알고 있다.
그런즉 오늘은 이를 좀 더 확실히 알아보고자 한다.
그러고 나서 본론으로 들어간다.
명나라의 석통윤(釋通潤)이 찬술한 원각경근석(圓覺經近釋)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善男子。云何我相。謂諸眾生心所證者。善男子。譬如有人百骸調適忽忘我身。四肢絃緩攝養乖方。微加針艾即知有我。是故證取方現我體。善男子。其心乃至證於如來畢竟了知清淨涅槃皆是我相。
人我相易知。法我相難知。故約證悟了覺以顯。所謂我相者。謂諸眾生心所證者。即此證者便是我相。喻如有人百骸調適不知有我。若四肢或絃或緩或攝養乖方。略加針砭艾火則我相便露。現見世人跛跛挈挈一無所能者。胸中夷坦即無我相。一有抱負或文學或智巧或經濟或技藝或辨論則磊磈不平。我相立現。是故纔有證取而見我為能證涅槃為所證。此即四果聖人斷人我而現法我相。所謂即彼淨解為自障礙是也。無論纔證小果存有所證是我相。即證如來究竟圓覺及清淨涅槃。而證相不忘亦是我相。以圓滿菩提歸無所得故。問。金剛經云。四果聖人皆不作念我得須陀洹果等。何故此中說有我。答。二果三果斷欲界我。四果斷三界我。故曰無我。而有涅槃可證法我未忘故說有我。
善男子。云何人相。謂諸眾生心悟證者。善男子。悟有我者不復認我。所悟非我悟亦如是。悟已超過一切證者悉為人相。善男子。其心乃至圓悟涅槃俱是我者。心存少悟備殫證理皆名人相。
所謂人相者。謂諸眾生心悟證者為非。而自謂我能悟證者之非。此即人相也。蓋菩薩發心自未得度而急於度人。故見有人不知有我。故釋之曰。由前取所證者為我。悟其為非。故不作證心不復認我。不知所悟非我即是人相。此人相者亦即是我。以悟得自己能超過一切證者故也。此即三賢位中行六度行變化諸幻而開幻眾者所現我相。所謂雖斷解礙猶住見覺是也。不但悟得自己能超行度生超過一切證者為人相。其心乃至圓悟能證如來清淨涅槃俱是我相已。若使存有一念悟心。自謂我能備盡證理毫無取證是去證心而存悟。皆名人相。故先德云。縱有妙悟也須吐却。
善男子。云何眾生相。謂諸眾生心自證悟所不及者。善男子。譬如有人作如是言我是眾生。則知彼人說眾生者非我非彼。云何非我。我是眾生則非是我。云何非彼。我是眾生非彼我故。善男子。但諸眾生了證了悟皆為我人。而我人相所不及者存有所了名眾生相。
所言眾生相者。謂諸眾生了知自己超過前之證悟。而證悟之所不及者。即眾生相也。喻如有人作如是言我是眾生則知彼人說眾生者。決非是我亦非是彼。所以決非是我者以我是眾生則知非我。所以說非彼者以我是眾生又非彼之我故。此即地上菩薩證寂滅時所現我相也。非若小乘之獨斷我執而有證心故曰非我。非若三賢雙伏二執而有悟心故曰非彼我。由彼雙斷分別我法二執。故能了前證者為我相。復了悟者為人相。故能屏其證心。蕩其悟跡。不向證悟處垛根。自謂我人不及。但其常覺不住存有所了。即此了心名眾生相。
善男子。云何壽命相。謂諸眾生心照清淨覺所了者。一切業智所不自見。猶如命根。善男子。若心照見一切覺者皆為塵垢。覺所覺者不離塵故。如湯消冰無別有冰知冰消者。存我覺我亦復如是。
所謂壽者相者。謂此菩薩覺心圓照已得清淨覺相。但存一念覺前所了者為非。未至無得無覺。即此覺者名壽命相。此相最極微細。自人天以至等覺。業相未空業識不轉者皆不能見。唯是離念如空心無初相者方能得見。此即根本生相無明也。正如人之命根雖不自見而使色身連持不斷。應立量云。壽命相是有法。覺所了是宗。因云一切業智所不見故。同喻如命根。由地上菩薩覺前前非故常覺不住。至於等覺能以清淨覺心照見十地常覺不住者皆是塵垢。但存覺所了之覺相。即此覺相亦未離塵。喻如湯之消冰。冰雖消而無別有冰。然而要知冰之所以消者畢竟是湯。以冰與湯是對待法。非本然之水體故也。今以後覺而覺前非。是存我而覺我。上我是能覺。下我是所了之覺亦是對待覺。以未忘覺相。亦非本來清淨覺體故。但併除覺相方是圓滿菩提清淨覺相矣。故文殊章云。知虗空者即空華也。
(大方廣圓覺脩多羅了義經近釋)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아상은 내가 나라고 여기는 것.
인상은 나 이외의 모든 대상에 대한 미혹을 말한다.
我相, 人相에서
我 ↔ 人은
주 ↔ 객으로 보면 된다.
그러니까 아상은 나의 실체가 있다라는 생각이고,
인상은 나 이외의 실체가 있다라는 생각의 모습을 말한다.
중생상은 중생의 고통을 두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곧 중생이 아상, 인상을 깨우치지 못하는 상태를 말한다.
수자상은 목숨에 대한 집착을 말한다.
이 모두는 각기 그것들의 실체가 있다고 여기는 상(相) 즉 모습에 갇혀 있다.
간단히 정리하자.
아상은 내가 실체가 있다라고 여기는 것이요,
인상은 나 이외의 모든 것이 역시 실체가 있다고 여기는 것이며,
중생상은 고통 속을 헤매는 중생이라는 별도의 실체가 있고,
밖에 해탈한 이가 따로 나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며,
수자상은 목숨이 있다, 없다라는 것에 구속된 상태를 말한다.
모두 뭉뚱그려 말하자면,
한마디로, ‘이러 저러한 것이 있다’라는 생각이 문제라는 것이다.
善男子。末世眾生不了四相。雖經多劫勤苦修道但名有為。終不能成一切聖果。是故名為正法末世。何以故。認一切我為涅槃故。有證有悟名成就故。譬如有人認賊為子其家財寶終不成就。
“선남자여, 말세의 중생이 사상(四相)을 투철히 알지 못하면,
비록 수많은 겁이 지나는 동안 열심히 쓴 고행을 수도한다 하더라도,
다만 이름만의 유위(有為)에 불과할 뿐,
종내엔 일체의 성스러운 과(果)를 이루지 못한다.
그런고로 정법말세라 이름한다.
무슨 까닭인고?
일체를 나를 인정하여 열반으로 삼는 고로,
증득하고, 깨달은 바 있다고 하니, 이름뿐인 성취인 까닭이다.
비유하건데, 어떤 이가 도적을 인정하여 아들로 삼으면,
그 집의 재보를 종내 이뤄낼(지켜낼) 수 없는 것과 같다.”
두 노객은 말씀을 계속하신다.
요즘 중들 가운데엔 팔리어를 공부한 이들이,
한문 경전을 넘어 팔리어 경전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한다고 한다.
하기사 팔리어로 쓰여진 경전은 보다 부처님의 말씀에 가까울 수 있다.
한문 경전이란 산스크리트어라든가 팔리어를 번역한 것인즉,
필시 본의가 달라진 것이 있을 터이다.
당신은 이제 나이가 들어 팔리어를 배워 다시 쫓아가기가 벅차다 이르신다.
허나, 이젠 개벽하여 백수(百壽) 세상인데 뜻만 있다면 지금인들 늦었다 할 일은 아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하여 나는 이리 생각한다.
불교가 인도로부터 중국에 들어올 때,
인도인, 중국인에 의해 한문 번역 작업이 행해졌다.
이 때 중국 고유의 사상 중에 가령 황로(黃老)의 철학을 원용하여,
불교를 풀어 중국인들이 이해하기 쉽게 접근하였다.
이 방법론을 격의(格意)라 이른다.
서력 3, 4세기 위진(魏晉) 시대 세상이 극도로 혼란스러울 때,
청담(清談)의 풍조가 성행했다.
죽림칠현이 당시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노장사상으로써 반야공을 설명하였는데, 이런 과도기의 학풍을 격의(格義)라 한다.
시간이 자나자 노장(老莊) 외에도 역경(易經)의 용어도 차출하였고,
더 후대엔 유가의 사상을 서로 견주기도 하였으니,
이 모두 격의불교(格義佛敎)의 일종이다.
이를 이끈 이로선 축법아(竺法雅)、강법랑(康法朗)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동진(東晉)의 도안(道安)은 최초로,
노장의 의리(義理)로써 불교를 강술(講述)하고, 불전을 주석하였다.
(※ 佛光教科書, 星雲大師編著 參考)
때문에 불교의 교의를 왜곡한다는 염려가 있었고,
불전을 정확히 번역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하여, 불교 경전의 원본을 직접 탐구하자는 기운이 일었다.
구마라습(鳩摩羅什)이 인도로부터 건너온 후,
중국불교는 격의의 방식을 벗어나기 시작하였다.
다시 삼장법사 현장은 직접 인도를 방문하여 불경을 얻어온다.
이 과정을 소설화한 것이 서유기이다.
그러함인데, 두 노객이 전하는 말씀은,
요즘 젊은 중들 사이엔 다시 팔리어로 돌아가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는 것이다.
당(唐)의 현장(玄奘, 602년 ~ 664년)이 인도로 구법(求法) 행각을 하고,
돌아와 역경 사업을 일으킨 지 1400 년이 다 되어 가는 지금,
다시 원전에 대한 욕구가 일고 있는 것인가?
천 수백 년 넘게 새로 구해 번역된 한문으로 불교를 공부하였음인데,
아직도 부족하여 원전으로 돌아가자고 하고 있음인가?
그렇다면 이는 고승들을 욕되게 하고, 스승을 깔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니면, 현장과 같은 열렬자심(熱烈滋甚)한 구법심(求法心)의 발로인가?
‘우리나라에 부처가 들어오면
한국의 부처가 되지 못하고 부처를 위한 한국이 된다.’
얼핏 단재의 이 말씀이 상기되고 있는 것이다.
이어, 여러 생각들이 마구 떠오른다.
우선은 부처가 네 것이 따로 있고, 내 것이 따로 있는가?
진정 법이 하나라 하면, 그리고도 이리 나눠 따로 놀고 있다면,
이는 이를 사는(生) 사람들에게 경을 칠 노릇이다.
본디 불교란 無一物, 無彼此, 無妄覺인 바라,
천 년을 공부하고도 또 남의 것을 구하여야 하는가?
그러하고도 아직도 공부가 덜 되었다면,
백, 천만번 원전을 구하려,
구법 행각을 떠난들 한 소식 얻어 갖기란 그 기대가 부지하세월인 바라,
차라리 팔만대장경 다 태워버리고,
공산명월(空山明月) 벗 삼고, 막걸리나 기우리는 것이 수지맞을 일이리라.
나는 행이나 재주가 없어,
원전이든, 한문 경전이든 그 따위 차이에 구애를 받지 않고,
더 이상 차별지에 구속당하지 않는다.
하여 우리 밭 언덕 위에 올라, 홀로 막걸리를 마신다.
내겐 밭흙이 경전이요, 명월이 부처의 말씀일 뿐인 것을.
다만, 불행한 것은 곁에 내 말을 알아들을 해어화(解語花) 하나가 없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부처가 들어오면
한국의 부처가 되지 못하고 부처를 위한 한국이 된다.’
일본 놈들이 쳐들어와 나라까지 다 말아먹고,
소인배들은 일제에 부역하느라 제 조상까지 기꺼이 팔아재꼈다.
이런 배짱조차 없는 치들은 이런 소인배 밑으로 기어들어가 밑까지 닦으며,
배실배실 웃으며 영혼을 팔아재끼고 있음이다.
그러함이니,
나라 잃은 못난 이 땅의 현실 속에서,
공자, 부처, 예수, 왜인 이 따위 것들은 모두 다 똥구멍 닦는 밑닦이인 것이다.
넋 잃고, 남의 종노릇하는 못난 신세들,
제 역사를 잊고, 남이 조작한 역사를 배우는 이 한심한 나랏 사람들을 향해,
단재는 이리 사자후(獅子吼)를 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함인데,
개명천지라 하는 지금 당세의 한국 땅이라 하여,
과연 무엇이 다른가?
이게 곧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즉 4상(四相)에 다름 아니다.
별도의 실체가 있다고 믿으며 거기 함몰되는 것이다.
석통윤(釋通潤) 스님은 이리 말씀 하신다.
一有抱負或文學或智巧或經濟或技藝或辨論則磊磈不平。我相立現。
한 사람이 있어,
혹은 학문을, 혹은 지혜, 기교를, 혹은 부유함을, 혹은 기예를, 혹은 변론을 껴안고,
돌덩이처럼 비쭉 나온 일개 재주에 의지한다.
이 때 아상이 드러나게 된다.
5 년이 지난 옥시 가습기 살인 약제 사건,
겨우, 이제야 몇 녀석 잡아넣었을 뿐이다.
2 년이 지났지만, 세월호의 원인은 아직도 오리무중이다.
바른 역사를 방기하고, 새 역사를 만들어야 한다며,
얼굴 하나 비추지 않고, 장독 뒤에 숨어서, 무엇인가를 꾸미고 있다.
이 정도면 이것은 나라도 아닌 것이다.
궁벽한 촌동네 조그마한 마을이라도,
이리 형편무인지경일 수 없음이다.
business friendly
이 말을 기억하는가?
나랏 사람보다 기업이 더 중하며,
일반 서민보다 부자가 더 귀하다.
이게 전임 정권에 이어,
현 정권에도 이어지는 정책 기조이다.
하기에 이미 수년전에 밝혀진 PHMG 유해성에 대하여,
아무런 조치가 취해지지 않았다.
이 또한 사람이 아니라, 기업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여든, 야든 하나 같이 무릎 꿇고 표를 구걸한 것이 바로 엊그제다.
그러함인데, 여야 원내 지도부와 청와대 간 회동에서,
노동개악법, 테러법, 세월호, 가습기 문제에 대한 야당의 입장이 제시되지 않았다.
(※ http://www.goba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8323)
‘우리나라에 부처가 들어오면
한국의 부처가 되지 못하고 부처를 위한 한국이 된다.’
이게 곧 한국이란 나라만을 위한 편협한 민족주의를 주창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부처가 편 교설을 재대로 따르지 못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세상을 구부려 견인하고 있는 현실을 개탄하고 있는 것이다.
표를 달라고 할 때는,
국민에게 무릎을 꿇지만,
막상 표를 거머쥐면,
국민은 안중에 없고,
오로지 제들 이해만 열심히 좇을 뿐이다.
부처를 왜 배우나?
너도 없고, 나도 없으니,
욕심껏 마음대로 하기 위함인가?
세상을 바르게 보고(正見),
바른 말을 하며(正語),
바르게 행하여(正業)하고자 함이다.
해탈은 둘째 치고,
최소 이 정도만 되어도 사회적 평등과 정의가 설 여지가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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