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모범(從模範)
내 바로 앞, 앞 글에 이런 문장이 등장한다.
“有心栽花花不開,無心插柳柳成蔭”
“마음을 써서 꽃을 재배하나 꽃은 피지 않는다.
허나 무심하니 버들을 꺾어 심었으되 버들은 잘 자라 그늘을 이를 정도로 잘 자라다.”
이와 관련된 이야기 하나를 여기 실어둔다.
어느 분이 이리 말씀하신다.
어느 은퇴한 철학 교수 강연을 들었는데,
그 분께서 나이를 많이 먹게 되면,
남의 모범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했단다.
나는 단박에 이게 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남의 모범이 되는 삶을 살 것이 아니라,
제 삶을 살아야 되지 않겠는가?
그러다 혹간 이게 남에게 모범이 되면 모를까 말이다.
나라면, 남의 모범이 되든, 아니 되든 그게 내 관심의 적(的)이 되지 않는다.
남의 모범이 되는 삶을 심히 의식하게 되면,
그야말로 모범을 위한 모범의 삶을 꾸려나가게 된다.
모든 정치인들이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하겠다 한다.
그렇지만 표를 얻고 나면 대개는 자신에게 득이 되는 길을 쫓고 만다.
이 짓은 남을 향한 사기에 다름 아니다.
한편, 매양 다른 이에게 모범이 되기 위한 삶을 꾸려나간다면,
이는 자칫 억지 흉내가 되거나, 거짓 위선으로 흘러갈 수 있다.
이리 되면 이 짓은 자기를 향한 사기가 되고 만다.
이는 자기에게 불성실한 일이다.
모범이 되는 삶을 꿈꿀 일이 아니다.
제가 진정 원하는 일을 하고 살 일이다.
다만 남에게 폐를 끼치지 말고, 해를 가하지 않는 일이라면,
그게 무엇이 되었든 간에 제 길을 가는 것이다.
이게 후에 여러 사람에게 등불이 되고, 유익한 일이 되었다면,
이 때 모범적인 삶을 살았다는 평을 사후적으로 들을 수는 있겠다,
하지만 처음부터 모범적인 삶을 살겠다고 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과연 무엇이 모범적인 삶인가는 생각처럼 간단히 규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기실 우리는 그게 무엇인지 잘 모른다.
만약, 그것이 누구라도 알 수 있는 정도의 것이라면,
그것은 기실 모범적인 것이라기보다는 그저 상식적인 일에 불과하다.
나는 그리 생각한다.
그러니까,
‘남에게 모범적인 삶을 살아라’
이런 주문은 결과 지향적이며, 수동적인 삶의 지표를 제시할 뿐이다.
미리 답을 정해놓고 움직이면,
최종적으론 모판에 담긴 두부나, 틀에 부어진 국화빵이 되고 만다.
모든 이들이 모범적인 삶을 살기를 작정한다면,
나중에 아무리 성공적인 결과가 이뤄진다고 하여도,
기껏 개성 없는 두부모나, 똑같은 맛의 국화빵 이상이 되지 못한다.
낱낱의 인간 존재는 제 존재에 충실할 일이다.
남을 의식하여 살아갈 일이 아니다.
이리 살아가면 혹 코스모스가 되고, 혹 호박꽃이 되고, 혹 장미꽃을 피워내게 된다.
이것은 남의 모범이 아니라 모두들 제 개성껏, 재주껏 제 존재에 충실한 결과이다.
이 때 화단은 다양한 모습으로 조화(調和)롭게 빛난다.
아니 짓궂은 운명은 화단을 이질적 부조화로 이끌어 갈 수도 있다.
설혹 그리 된다한들 천편일률적으로 타자의 모범이 되고자 쫓는 삶보다는 천만 곱으로 낫다.
남의 모범이 되길 꿈꿀 일이 아니다.
다만 네 존재의 안짝 뜰을 응시하고,
너의 부름에 답하는 행동을 하라.
제 각각 이리 창조적 자기 현시(顯示)에 충실할 때,
세상은 제 꼴대로 빛난다.
다만 사회나 국가는 이런 개인의 여정(旅程)을 돕는 역할을 한다면 다행이라 하겠다.
아니라면 불행이겠지만, 그런 비극 속에서도 개인은 자기 꽃을 피울 뿐인 것을.
“有心栽花花不開,無心插柳柳成蔭”
“마음을 써서 꽃을 재배하나 꽃은 피지 않는다.
허나 무심하니 버들을 꺾어 심었으되 버들은 잘 자라 그늘을 이를 정도로 잘 자라다.”
만약 국가가 개인의 삶을 지도하고, 이끈다면 이것은 비극이다.
만일 어느 철학자가 늙어 남의 모범이 되라고 주문하고 있다면,
이것은 너무 안일하다.
난 아흔 넘었다는 그의 철학을 의심한다.
從模範到平凡
모범을 따르다 종국엔 평범한 사람이 되고 만다.
사람은 저마다 기질, 재능 따라 특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아니 특별함을 쫓아야 된다는 말이 아니라,
그리 개별 단독자로 존재하는 것이 인간이란 말이다.
때문에 특별하게 살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흔히 쓰는 모범(模範)이란 말은 모(模)와 범(範)의 합성이니,
이는 형틀로 같은 것을 찍어내듯 본으로 삼아 배울 만한 대상을 이르는 것이다.
마치 국화빵틀처럼 이것은 기실 몰주관가치적이다.
난 이를 배척한다.
늙은이라 하여 젊은이 이와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자신의 삶을 살아 갈 일이지, 굳이 젊은이를 의식하고 살 일이 아니다.
남을 의식하고 걷다가는 자칫 앞에 놓인 웅덩이에 빠질 수 있다.
당당하게 제 삶을 사는 것 자체가,
차라리 사후적으로 젊은이에게 모범이 된다면 그것은 또 그 때의 일일 뿐이다.
하지만, 남의 모범이 되고, 아니고는 내 삶의 과제가 아니다.
착한 사람이 되기 위해 착한 짓을 할 일이 아니다.
착한 일을 하다보면 자연 착한 사람이 되는 법이다.
이것 거꾸로 흉내내면 죽어 무간지옥에 떨어진다.
은퇴하여 사람 모아놓고 그럴싸한 말을 늘어놓는다 하여 그게 진실이 되는 것은 아니다.
훤소(喧笑), 큰 소리로 떠들고 한바탕 웃는다 하여 그 말씀이 옳은 것은 아니다.
아무도 듣지 않고, 손가락질 받는다 하여 그 말씀이 그른 것이 아니다.
듣기 좋은 말을 늘어놓고, 웃기며,
청중을 즐겁게 하는 것으로,
먹고 사는 일은 코메디언으로도 족하다.
철학자라면 바른 진실을 말하여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가 평소 말하였다는 연애나 하는 것이 낫다.
이것은 지극히 사적인 일이라,
뒷전에서 가타부타 말할 일도 아니고,
난 관심도 없다.
다만, 나라면 홀로 연애하면 되지,
널리 광고하며 연애하지는 않을 것 같다.
그게 고우면 더 그 만큼 더욱 더.
하지만, 그의 삶의 태도에 동의는 하지 않을지언정 존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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