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可以死而不死天罰也

소요유 : 2016. 12. 19. 22:46


북한산엔 사찰이 물 묻은 손에 붙은 깨알처럼 많이 있다.

내가 등산을 갔다 내려오면서, 

몇 년 전 암주(庵主)가 바뀐 개인사찰 앞마당에 걸린 조그만 태극기를 하나 보게 되었다.

전임 암주가 돌아가시더니만 몇 년째 임자를 만나지 못하고 비어있었다.

그러더니 어느 날 새로 개비를 하더니만, 여기저기 플래카드가 걸렸었다.

고질병을 무료로 상담해준다는 것과 함께 지역 내 암자 연합회 소속이라는 표기되어 있었다.


왜, 관공서도 아닌데 사찰 경내에 뜬금없이 태극기가 걸려 있는 것일까?

미아리 점집에도 곧잘 대나무 장대 끝에,

태극기가 비쭉하니 얼굴을 내밀고 해죽 웃고 있곤 한다.


“우린 야메(闇)가 아니라, 근본 있는 사람들이야!”


나는 저런 깃발들이 펄럭일 때,

이리 외치는 소리를 듣는다.


자칭 애국(愛國), 우국(憂國) 단체 할배들이나,

순결한 어머니란 이름을 도용한 정체가 아리송한 아줌마들 역시, 

시위 현장엔 빠짐없이 태극기를 들고 나온다.


“우리는 동원된 것이 아니라, 나라 사랑하는 순수한 사람들이야!”


태극기는 이런 강변(强辯)의 지시물로서, 

자신들의 목적이나 행위 정당성을 홍보하는 상징 매개체에 불과하다.

불온(不穩)한 혐의(嫌疑)를 사물에 전가(轉嫁)함으로써,

대중의 눈을 가리거나, 보다 적극적으로는 속였다고 자위(自慰)하며,

일순 더렵혀진 양심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착각한다. 


고작 몇 천 원짜리 태극기로,

얻어지는 효과는 셈할 수 없이 크다.


내가 앞에서 몇 차 지적하였던,

맛집이나 경영 대상 농가들 역시,

돈을 주고 깃발을 구매한다.

(※ 참고 글 : ☞ 매명(賣名) - 여우 이야기 ⅰ)


지렁이가 쳐든 깃발에도 용이 새겨져 있으며,

고양이가 흔드는 깃발에도 호랑이가 새겨져 있기 일쑤다.


사람들은 높이 쳐들은 용 깃발을 보고 곧잘 놀라며,

흔들리는 호랑이 깃발을 보고 겁을 낸다.


때문에, 지렁이나 고양이는,

깃발에 의지하여 제 주제 이상으로 자신을 포장할 수 있다.


그러므로 병가(兵家)에선 의례 깃발이 동원된다.


斬木爲兵,揭竿爲旗


나무를 깎아 무기로 삼고, 장대를 높이 들어 깃발로 삼다.


이는 진섭(陳涉=진승, 陳勝)이 반란을 일으킬 때의 장면을 그린 것이다.

(※ 참고 글 : ☞ 진승과 오광)

이리 전쟁에선 깃발을 들어, 기세가 맹렬함을 꾸밀 필요가 있다.

어차피 전쟁이란 미친놈들을 상대하는 것이다.

아니, 피아 모두 미친놈끼리 미쳐 돌아가는 짓이다.

하지만, 그렇다한들, 지휘하는 장수까지 미치면 진다.

故將通于九變之利者,知用兵矣。

그래 손자병법에서 구변지리(九變之利)에 통달한 장수라야 용병을 안다 한다 하였다.


하지만, 이때는 전쟁이 나서,

적군을 향해서 세를 과시할 요량으로 그리하는 법이다.


전쟁터도 아닌 평화 시에,

제 나랏 사람들을 향해 태극기를 들어, 사람들을 격동할 때는,

필경, 깃발 든 이의 숨겨진 의도가 있는 법.


태극기 흔들며,

애국하자고 이를 때,

남들을 유인하기에 앞서,

이르는 이가 먼저 착한 이인 양 호도(糊塗)된다.


이리 깔려진 멍석 위로, 

사리(私利)가 공의(公義)로움으로 치장되며,

간짓대 위에서 깔딱대며 세상을 희롱하게 된다.


세상에, 

꾀는 일이 벌어질 때,

그 어떤 한 것일지라도,

의심을 미루지 말 일이다.

이 때에는 설혹 제 아비, 어미라도 믿어서는 아니 된다.


대개는, 꾀는 일인지 아닌지 아는 것은 실로 쉽지 않다.

낯색을 감추고 다가오는 교묘한 유인(誘引)엔 언제나 복심(腹心)이 숨겨져 있다.

이를 제대로 간파할 수 있어야,

속지 않고 명(命)을 부지하며 안전하게 세상을 건널 수 있다.


하지만 깃발을 흔들 때는 조금만 유의하면,

저것이 자신을 숨기고, 사람을 꾀는 짓이라는 것을 쉬이 알아차릴 수 있다.


그러함인데도 속아 넘어간다면,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랴?


광화문 집회에 나온 저들이,

휑하니 썰물처럼 빠져나간 자리,

태극기 하나가 도살장 앞에 끌려나온 소처럼,

긴 울음소리를 하늘 높이 흔든다. 


본래적 의미의 태극기의 실재를 부정하는 저들 무리들의 죄악도 끔찍하지만,

저 긴 울음소리를 듣지 못하는 어리석음도 그 못지않다.


촛불 집회를 축제라 이르는 언설은 그래서 더욱 위험하다.

촛불을 들기 전, 이미 50%는 과거에 현재의 자기를 부정하지 않았던가 말이다.

자기 부정을 깨닫지 못한 축제는 언제라도 다시 과거로 돌아가 미래의 오늘을 망각할 것이다.


촛불 집회는 결코 애국하자고 모인 것이 아니다.

애국 놀이는 저들 태극기를 든 일당 몇 만원들에게 맡길 일이다.

촛불 집회는 시민 각자의 자각에 기초한 사회적 실천일 뿐이다. 


태극기나, 촛불은 도구에 불과하다.

저들은 도구에 불과한 태극기조차 능욕하고 말았다.

인간으로서, 수간(獸姦)조차 차마 생각할 수 없음인데,

저들은 물간(物姦)까지 거리낌이 없다.


可以生而生,天福也;可以死而死,天福也。可以生而不生,天罰也;可以死而不死,天罰也。

(列子)


“살아야 할 때 살면, 하늘의 복이며,

죽어야 할 때 죽으면, 하늘의 복이다.

살아야 할 때 죽으면, 천벌이며,

죽어야 할 때 죽지 못하면, 천벌이다.”


우리가 흔히 늙으면 죽어야 해 하는 말을 하곤 한다.

그런데 죽어야 마땅할 이가 죽지 않고 외려 큰 소리 치고,

살아야 할 때, 벼락 맞아 죽으면,

이 어찌 천벌이라 이르지 않을 수 있으랴?


살아 있다고 하여 다 복이 있다 할 수 없으며,

죽어 있다 하여 다 벌을 받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일당(日當) 벌이로 태극기를 들기 전에,

저 말씀을 가만히 제 나이에 비추어 되새길 일이다.


可以死而不死,天罰也。


***


이글은 전번 글과 짝을 이룬다.
 

☞ 촛불과 태극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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