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如奪得關將軍大刀入手 逢佛殺佛

소요유 : 2016. 12. 20. 22:09


조지 레이코프(George Lakoff)가 지은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가 등장한 이후,

프레임이라는 말을 빌어 정치사회 현상을 분석하는 것이 거의 일반화 되었다.


여기 출판사에서 제공하고 있는 '프레임'에 대한 설명을 잠시 인용해둔다.


“진실이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려면, 

그것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기존의 프레임에 부합해야 하고, 

만약 진실이 프레임과 맞지 않으면, 프레임은 남고 진실은 버려진다는 것이다. 

프레임에 어긋나는 진실은 아예 귀에 안 들어오거나 사실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여기서 말하는 프레임이란 곧 ‘생각의 틀’이다.

진실만으로는 부족하고 들을 귀를 먼저 열어야 하는데,

그 귀를 여느냐 마느냐 하는 것은 생각의 틀이 결정한다는 것이다.


보수주의자들은 곧잘 비리를 저질러 놓고도,

태극기를 흔들며 국익을 먼저 생각하라 선동한다.


내가 어제 태극기와 관련된 글을 하나 썼었다.


☞ 可以死而不死天罰也


그런데 재미있게도 바로 다음날인 오늘 이런 기사를 접했다.

앞선 내 글에 비추어 이를 대하면,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친박 김진태 “촛불만 무섭고 태극기는 무섭지 않냐]

“촛불은 무섭고 태극기는 무섭지 않느냐. "

"비대위원장이 앞장서서 대통령을 밟고 가선 안된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면 되지 않느냐"

(출처 : http://www.viewsnnews.com/article?q=139817)


국가는 나를 대표하며, 국가의 이익은 곧 나의 이익이라는 가치 판단을 하거나,

때로는 국가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이익을 포기할 줄 알아야 애국자라는,

프레임, 곧 생각의 틀 속에 갇히면,

갖가지 실수를 하였든 먹혀들지 않는다.

진실이 문제가 아니라 국익 우선 프레임으로 실수가 덮여지곤 한다.


레이코프는 보수주의자들은 저런 프레임 설정을 잘하고,

진보주의자들은 진실만을 고집하다 판을 잃곤 한다고 말한다.


내가 이미 묵은 고전이 되어버린 이 책을 떠올린 것은,

오늘 우연히 글 하나를 접했기 때문이다.

이 역시 일종의 프레임에 갇힌 본보기라 생각된다.


[도올이 묻고 문재인이 답하다]

도올:좋다! 지금 당신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고 치자! 그리고 지금 북한도 갈 수 있고 미국도 갈 수 있다고 치자! 어딜 먼저 가겠는가?

응답 :“주저 없이 말한다. 나는 북한을 먼저 가겠다. 단지 사전에 그 당위성에 관해 미국, 일본, 중국에 충분한 설명을 할 것이다.”

(출처 : http://news.joins.com/article/21008771)


도올이 문재인을 부러 옭으려는 의도를 가지고 물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상대가 이자택일(二者擇一)로 묻자 문재인은 덥석 그 중 하나를 물어내놓고 있다.

문제로 엮인 세상 안에 선택지(選擇肢)는 실로 천 가지 만 가지 셀 수 없이 많은 법이다.

사지선다형(四肢選多型)에 익숙해진 수험생들은 답이란 언제나 넷 가운데 하나인줄만 안다.

넷으로 포진(布陣)된 세상 안에 갇혀 그 밖의 세상을 꿈꾸지 못한다.

가여운 일이다.


당선되었을 때 방문할 곳이, 왜 북한과 미국의 이지(二肢)로 제한되어야 하는가?

질문자가 설혹 북한 핵문제나 사드 배치 문제를 염두에 두었다한들,

최소한 수험생이 아닌 정치인이라면 저 문제에 갇힐 것이 아니라,

지혜롭게 주도적으로 요리를 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가령 중국을 방문하겠다고 말한다든가,

정세현 전 통일부장관의 지적처럼 좀 더 유연한 답을 내놓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미국에 대해서도 좀 에둘러서 말했더라면 좋았을 겁니다. 한미 관계는 동맹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좋은 관계를 유지시켜 나갈 수 있고, 이것은 어떤 점에서 상수이기 때문에 나름대로 관리를 하지만, 위험성이 있는 북한을 관리하려면 한미 간 긴밀히 협의가 필요하다는 식으로 설명을 해줬으면 어땠을까 합니다.”

(출처 :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46466)  


김선동의 만다라를 읽다보면 노승 지암이 법운에게 말하는 다음 장면을 만난다.


“여기 입구는 좁지만 안으로 들어갈수록 깊고 넓어지는 병이 있네.

조그만 새 한 마리를 집어넣고 키웠지.

이제 그만 새를 꺼내야겠는데 그 동안 커서 나오질 않는구먼.

병을 깨뜨리지 않고는 도저히 꺼낼 재간이 없어.

그러나 병을 깨서는 안 돼.

새를 다치게 해서도 물론 안 되구.

어떻게 하면 새를 꺼낼 수 있을까?”


(※ 참고 글 : ☞ 화두(話頭)의 미학(美學) 구조)


병 안에 갇힌 것은 새만이 아니다.

이 화두를 집어 들고 어쩔 줄 모르는 이들은 모두 저 새와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


문재인 역시 도올이 친 울 안에 갇혀,

파드닥 거릴 뿐, 단 한 치도 밖으로 날아가지 못하고 있다.


난, 사실 문재인이란 개인을 탓하고 싶지 않다.

나는 세상의 어떠한 정치인일지라도 인물 그 자체에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않는다. 

다만 그는 연신 내게 주젯 거리를 던지고 있을 뿐이다.

이것은 내게 흥미를 유발한다.


엊그제 다룬 글에 등장하는 다음 내용처럼,

이번에도 어찌나 이리 판박이로 같은가 말이다.

(※ 참고 글 : ☞ 大方無隅)


사회자가 “최근 야권 지지자들 사이에서 '이재명은 사이다, 문재인은 고구마다'라는 말이 나오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내놓은 답이었다. 문 전 대표는 “탄산음료가 밥은 아니고 금방 목이 마르지만, 고구마는 배가 든든하다"며 "저는 (고구마처럼) 든든한 사람"이라고도 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6/12/02/2016120201089.html)


大方無隅


프레임에 갇히면 小方有隅가 된다.

귀퉁이를 가진 네모는,

상대가 친 프레임이란 그물에 갇혀 파드닥 걸리다 끝내는 종국을 맞이하게 되는 법이다.


이제, 大方無隅

모서리 없는 네모의 함의(含意)가 무엇인지 좀 더 명확해졌길 바란다.


如奪得關將軍大刀入手 逢佛殺佛 逢祖殺祖 於生死竿頭 得大自在 向六道四生中 遊戱三昧

(無門關)


“관우의 대도를 뺏어 손에 들고는,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

생사간두에 대자재를 얻어,

육도사생 중 유희삼매하리라“


관우가 쳐든 청룡언월도(靑龍偃月刀)를 빼앗아,

그 누구든지 쳐죽여야 한다.

아니면 네 목이 달아나고 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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