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方無隅
최근 사이다니, 고구마니 하며,
먹는 음식료(飮食料)에 빗대어 정치인들이 공방을 벌이고 있다.
처음 이 소식이 알려지자 바로 든 것이지만,
시답지 않은 짓들이라 나는 지나치고 말았다.
하지만 오늘 새롭게 자신을 밥에 빗댄 이가 나타났다.
점점 가관이구나 싶다.
내, 이번에도 그냥 지나칠 수 있으나,
이들에 대해 농(弄)이나 한 번 해주고 싶은 생각이 슬그머니 들었다.
그래 이제, 애초 사이다, 고구마 이야기가 언제 나왔는가 조사를 해보았더니,
12.02 문재인이 처음 발언한 내용을 아래와 같이 찾아내었다.
문 전 대표는 이날 오전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이 시장이) 내가 들어도 시원할 만큼 사이다가 맞다”면서도 “탄산음료가 밥은 아니다”라고 했다. 사회자가 “최근 야권 지지자들 사이에서 '이재명은 사이다, 문재인은 고구마다'라는 말이 나오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내놓은 답이었다. 문 전 대표는 “탄산음료가 밥은 아니고 금방 목이 마르지만, 고구마는 배가 든든하다"며 "저는 (고구마처럼) 든든한 사람"이라고도 했다. 이 시장에 대한 ‘상대적 우위’를 주장한 것.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6/12/02/2016120201089.html)
나는 사이다에 빗댄 고구마 비유가 이미 한쪽이 불리한 것임이라,
이리 비유한 것 자체가 문에게 득이 되지 않겠다 여겼었다.
헌데 이제 알았지만, 이 기사에 따르면, 사회자의 질문에 답한 것이니,
문이 안일하게 말려 들어가고 말았다 하겠다.
나는 TV나 드라마를 보지 않는 이라,
잘 몰랐으나 사이다, 고구마란 시속어가 이미 시중에 돌아다니고 있었음을 이제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헌데 나라면 저런 비유 따위에 갇힌 틀 속 안으로 내 인격을 내맡기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이다나 고구마란 본디 전일적(全一的) 가치를,
내포(內包)할 수 없는 조각 언설(言屑)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일방(一方)이 타방(他方)보다 낫다, 못하다 겨뤄보았자,
다 도토리 키재기라, 장단(長短)이 서로 교호하고,
호오(好惡)가 선후를 다투어 쉽게 결론이 날 수가 없는 것이다.
만약, 굳이 음식으로 제한하여 말한다면 사이다, 고구마 따위보다는 차라리 밥이 한결 낫다.
밥은 주식이지만, 나머지는 부식이나 간식에 불과하지 않은가 말이다.
이 게임에선 밥을 선점한 사람이 이긴다.
문이 사회자의 질문에 말려,
스스로를 고구마로 따라 한정한 것은 서 푼 재치조차 부족한 노릇이었다.
질문을 거스르고 차라리 자신은 밥이라 하였으면 좀 나았을 것이다.
하지만, 밥이라 하여도 한참 미치지 못한다.
이에 대하여는 조금 있다 말을 잇기로 한다.
그 전에, 자신을 밥이라 스스로 규정한 이의 말을 마저 들어보자.
또 “우리가 매일매일 먹고, 특별식으로 다른 걸 먹을 수 있지만 만약 밥이 질리면 어떻게 살겠느냐”며 “(고구마와 사이다는)매일 먹을 수는 없다. 밥에 섞어먹으면 좋다”고 은근한 견제구를 날렸다.
(출처 : https://www.hankookilbo.com/v/27994faccbe74826b1ccd8a8611ef38f)
이 앞엔 또 박원순이 자신을 김치에 비유했다는 말도 있는가 본데,
조사를 해보니 점점 애초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게도 판이 확대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싱겁기 짝이 없구나.
애초 이럴 줄 알았으면 아예 글을 쓰지 않고 모두 다 싹 무시하였을 터이다.
난 도대체 이런 따위의 공허한 말 장난질에 관심이 없다.
허나, 기왕에 여기까지 써왔으니 급히 내 생각을 부려놓고는 물러서려고 한다.
大方無隅;大器晚成;大音希聲;大象無形;道隱無名。
(道德經)
“큰 네모는 모서리가 없고, 큰 그릇은 채울 수 없고, 큰 소리는 들리지 않고, 큰 형상은 보이지 않는다.
도는 감춰져 이름이 없다.
(또는 도는 무명에 감춰져(숨어) 있다.
또는 道隱(도라는 은밀함)은 이름을 붙일 수 없다.
등으로 새김할 수 있다.)”
나는 이미 다른 글에서 대(大)에 대하여 말한 적이 있다.
方, 器, 音, 象 앞에 大를 두어 大方, 大器, 大音, 大象라 함은 무엇인가?
方, 器, 音, 象은 자기 자신을 스스로 제한한다.
네모는 모서리가 있으며, 그릇은 그 안에 채움에 한계가 있다.
소리를 내면 들리고, 형상을 가진 것은 눈에 보이기 마련이다.
하지만 大方은 너무 커서 모서리를 확인조차 할 수가 없다.
大器 역시 채움에 한계가 있다면 小器이지 大器라 할 수 없다.
이렇듯, 대(大)는 자기가 스스로를 규정하는 것을 부정하고 거부한다.
아니, 부정하고 아니 할 차원을 넘어 선 곳에 있다.
그러기에 道隱無名인 것이다.
도가 숨고 싶어서 숨은 것이 아니요,
이름을 갖고 싶지 않아서 無名인 것이 아니라,
본디 道는 그러할 뿐이다.
사이다가 최고라고 하는 순간, 고구마가 가슴을 쭉 내밀고는 나는 든든하다고 뻐기게 된다.
고구마가 이리 난 체하는 순간, 밥이 쓱 나서면서 나는 질리지 않는다고 빽 소리를 친다.
이 사람들 내가 보기엔 다 좁쌀들이다.
자기가 小方, 小器, 小音, 小象임을 스스로 주장하고 있음에 다름 아니다.
정치하는 이들이, 게다가 대권씩이나 노린다는 이들이,
한가하게 재치문답 놀이나 하고 있음이니,
나 같은 일개 필부에게 어찌 좁쌀이란 말을 듣지 않을 수 있겠는가?
大方, 大器, 大音, 大象은 모서리가 없고, 채울 수 없고, 들리지 않고, 볼 수도 없다.
천하를 다스리려면 조그만 곳에 매몰되어 편협하면 아니 된다.
서리 내린 늦가을,
어둔 돌 틈에 낀 벌레처럼,
실선도 아닌 비선 실세를 상대하고,
어둠 속에서 공작 정치를 하고서야,
어찌 대붕(大鵬), 대통령(大統領)이라 할 수 있겠음인가?
사이다, 고구마, 밥을 두고 다투지 말라.
지금 국민들은 튀밥도 제대로 먹기 어려운 형편인데,
먹는 음식 갖고 희학(戲謔)질로 한가하게 놀 틈이 있겠음인가?
※ 참고
1. 大方無隅;大器晚成;大音希聲;大象無形
여기 각각 귀(句) 세 번째 글자들 無, 晚, 希, 無의 의미공간에 대하여는,
수학의 극한함수(limit of a function)를 생각하면,
관념상의 연상(聯想), 통합적 이해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x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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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0.841471... |
0.1 | 0.998334... |
0.01 | 0.999983... |
마왕퇴(馬王堆)에서 발견된 老子乙德經에선 글자들이 좀 다르다.
또한 곽점(郭店) 초간 老子乙에선,
大方亡隅,大器曼成,大音希聲,天象亡形으로 조금씩 다르다.
이 모두 1번 논의를 되새기면 글자가 다르다고 혼란을 겪을 일이 없다.
글자가 다르다고 달리 대하며, 그 차이를 따지며, 질척일 일이 없다는 말이다.
大器晚成을 흔히 크게 될 인물은 늦게 이룬다.
이리들 새기고 있는데, 이리 이해를 한다면 그 정도에 머무르라지.
晚을 免이나, 曼으로 고쳐 새긴다면 사뭇 깊은 이해의 경지로 나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이럴 경우 앞서의 번역인 채울 수 없다란 뜻을 넘어,
그릇의 형태가 정해지지 않았다내지는 고정된 형태가 없다란 의미로 새길 수 있다.
본디 晩 역시 免이나 莫에 통하고,
免은 去, 止, 脫의 뜻을 가지고 있으며,
曼은 無(沒有)와 通한다.
한마디로, 이 모두 부정사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즉, 無,免,希,無은 모두 無로 의미 통합이 되어,
문맥의 흐름이 서로 자연스럽게 어울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