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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타불과 가즈아

decentralization : 2018. 6. 12. 13:21


아미타불과 가즈아


내가 어느 분 장례식에 갔었던 적이 있다.


그 풍경 중에 어느 하나.


고인과는 관련이 없지만,

다른 망자를 천도하려고 온 스님도 있고, 

또 이를 따르는 신도도 있었다.

그들이 ‘아미타불’ 명호(名號)를 부르는데,

이게 왜 그리도 마음에 와 닿는지?

자르르 심통 한 가운데를 가르고 지나며,

그 간절함의 강물에 함께 마음을 일시 맡기고 말았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


아미타불을 끝 간 데 없이 이어 외고 있음이라,

저 아낙네들의 간절한 신심(信心), 원력(願力)이,

과연 서방 정토에 가닿으려는가?


망자(亡者)는,

저 원망(願望)에 기하여,

정녕 서방극락정토에 가닿을런가?


왜 하필 서쪽 아미타불이 계신 그곳은 “깨끗한 땅” 정토(淨土)인가?

또한 극락(極樂)이라, 락(樂)이 그 지극한 끝에 가 닿아 있는가?


又舍利弗!彼佛國土,常作天樂,黃金為地,晝夜六時天雨曼陀羅華。

(佛說阿彌陀經)


“사리불아, 저 불국토란, 항시 천락을 지으니,

황금으로 땅을 삼고, 주야로 하늘에서 만다라화가 내리느니라.”


이야말로, 가즈아를 외치는 이들이,

꿈꾸던 경지가 아니던가?


여기 내가 사는 곳은 예토(穢土)로 남겨두고,

하필이면 죽어서야 저기 깨끗한 곳으로 갈 수 있단 말임인가?

그것도 선업(善業)을 지어야 한다고 함이니,

그 누가 살면서 악업(惡業)을 짓지 않은 이가 있음이랴?


하자면,

저게 다 뻥이 아닌가?

다 악업 짓기를 수미산처럼 장장(長長), 올올(兀兀), 켜켜(層層)로 눌러 다져 쌓지 않았던가?


그러하다면, 

어느 인간이 서쪽 나라로 옮겨 살 수 있단 말인가?

저게 다 공연히 땡중들이 신도들 주머니 훑어내려고 만든 헛수작질이 아니던가?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


아낙네들이 이리 부절(不絶)하니 명호를 외는 것이,

마치 ‘가즈아’를 거푸 질러대는 암호화폐 투자자의 모습과 같지 않은가?


지금 여의치 않으니까,

미래를 향해 정토를 그리고, 극락을 바라며,

저리 아미타불 명호를 외고,

가즈아를 외치는 것이 아닌가 말이다.


땡중은 짐짓 근엄한 표정 지으며,

아미타불 선창하며 신도들을 이끈다.

아낙들은 행여 뒤쳐질세라 치마끈을 질끈 동여매고 따라 나선다.

죄는 월사(月事) 치르듯 간단없이 저지르며 살면서,

죽어서는 서방정토 극락에 태어나길 욕심 사납게도 꾀하고 있음이다.


암호화폐 종도(宗徒)들 역시 가즈아를 외치며,

ICO를 기웃거리고도 하고, 블록세일에 슬쩍 발을 걸치기도 한다.

그저 돈 푼 벌 욕심이 다인 주제에,

암호화폐의 역사적 사명을 죄다 걸머진 듯,

목이 터져라 외치며, 달콤한 헛꿈을 셈한다.


내가 장례식장에서 그리 구슬프게 아미타불을 염하던,

비구니승들과 말거래를 텄다.

이들은 아미타불 염불은 그리 잘 외면서,

막상 無量光, 無量壽가 아미타불인줄은 모르고 있다.


하기사 염불만 잘 외면 바로 극락으로 가는데,

까짓 케케묵어 곰팡이 냄새나는 불경은 왜 뒤적거리는가?


손자병법에 보면 

‘兵者, 詭道也. 故能而示之不能, 用而示之不用, 近而示之遠, 遠而示之近. 利而誘之, 亂而取之, 實而備之, 强而避之, 怒而撓之, 卑而驕之, 佚而勞之, 親而離之。

攻其無備, 出其不意, 此乃兵家之勝, 不可先傳也.’

요런 문장을 만나게 된다.


문장은 길지만 ‘兵者, 詭道也’ 

요 한마디만 꿰뚫으면 그저 족할 뿐이다.

한마디로 전쟁이란 속임이란 것이다.


전쟁이란 지극히 현실적인 것이다.

저 거룩한 천상을 어여삐 선전하는 종교들이지만,

그들이 상대하는 이들은 이 현실 세계에 거하고 있다.

하니 그들과 관계를 맺으려면 부득불 모두 兵家가 되지 않을 수 없으리라.

중생이 달리 중생인가?

한없이 미련한 게 중생인 게라.

게다가 저들 牧者인지 僧인지는 천상에 거했다는 지나간 증거조차도 없다.


부처의 장광설 팔만대장경 역시 부처가 兵家임을 증거하고 있는 게 아닐까?

대기설법(對機說法)이라 할 때, 근기에 맞추어 說을 골라 한다하였음이니,

이 어찌 궤도(詭道)가 아니랴?


그런 부처도 막상 돌아가실 때, 자등명, 법등명 하시며, 

단 일설도 설한 바 없다고 시치미를 똑 떼시지 않았던가?

그는 돌아가실 제 즈음해서야,

당신은 ‘兵家가 아니고 싶었다’고 고백하고 계시는 게다.

이리 볼 때 정작 詭道야말로 자비요, 광명이 아니겠는가?


성철 스님은 돌아가시면서 이리 노래했다.


열반송 - 성철스님


일생 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하늘을 넘치는 죄업은 수미산을 지나친다. 

산채로 무간지옥에 떨어져서 그 한이 만 갈래나 되는지라 

둥근 한 수레바퀴 붉음을 내뿜으며 푸른 산에 걸렸도다.


生平欺狂男女群(생평기광남녀군)  

彌天罪業過須彌(미천죄업과수미) 

活陷阿鼻恨萬端(활함아비한만단) 

一輪吐紅掛碧山(일륜토홍괘벽산) 


그는 왜 한 평생 사기꾼 노릇을 하여야 했음인가?

그도 부처처럼 兵家였을까?


그를 친견하기 위해서 3000배를 구하였다면,

그야말로 천하의 사기꾼, 도척이라 할 것이다.

나 같으면 면전에서 그의 뺨싸대기를 갈겨 버렸을 것이다.

도대체 한 인간이 한 인간 앞에 무릎을 꿇고,

절을 한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 노릇인가?

제 녀석이 감히 무엇이관대?


한편, 무문관 무문의 評唱을 들어보자.


如奪得關將軍大刀入手 逢佛殺佛 逢祖殺祖 於生死竿頭 得大自在

向六道四生中 遊戱三昧


관우의 대도를 뺏어 손에 들고는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 생사간두에 대자재를 얻어 육도사생 중 유희삼매하리라 


아시는가? 그대는. 

중생을 속이기 위해 부처도, 성철도 오신게다.

부처도 죽이고, 죽여 보갚음을 하지 않고 

언제까지 의심 덩어리로 근심을 지고 다닐 것인가?

그리 의심이 깊으면 그대가 나서 부처, 성철 깝대기를 벗겨야 한다.

그때까진 이들은 중생을 깨엿 먹듯 즐겨 속여 먹으리.

이게 바로 유희삼매(遊戱三昧)요, 

소요유(逍遙遊)의 경지인 게다.


1992년 10월 28일 휴거를 외친,

다미선교회의 이장림,

오대양도, 

사린의 옴진리교도...

모두 위선이란 너울 쓰고 도를 팔았다.


위악은 피도 눈물도 없는 모짐으로서 陰德을 쌓고,

위선은 가없는 자비로서 陽德을 짓는다.

만약 중간에 허울이 벗겨지면,

둘 다 무간지옥에 빠진다.

그러한즉 無量光, 無量壽인 것이다.

즉, 순수지속이 아니라면 모두 가짜인 게다.

無量이 아니라면, 모두 사기요 詭道인 것이다.

모두 자전거 페달을 밟고 있는 게다.

멈추면 꼬꾸라진다.


無量光(Amitābha), 無量壽(Amitāyus)

여기 어근 Amitā를 無量으로 번역한 것이다.

본래 동사 mā는 측량(測量)이란 어의를 갖고 있다.

mā의 과거분사가 mita(彌陀)이고 거기 부정사인 (a, 阿)가 붙었으니,

곧 無量, 無法測量이 되는 것이다.

여기 光(bha), 壽(yus)가 더하여,

無量光(Amitābha), 無量壽(Amitāyus)가 되는 것이다.

헤아릴 수 없는 빛, 헤아릴 수 없는 수명.


이런즉, 가다가 중지하면 결코 무량이 될 수 없다.

하지만, 부처도, 성철도 죽으면서는 모두 자기의 지난 행위를 까발리고 있다.


부처도 一字 설한 바 없다고,

성철도 生平欺狂男女群이라며 자기고백을 하고 있다.

이 순간 그들은 無量佛이 아님을 스스로 증거하고 있음이다.


하지만, 이들은 세상에서 유일하게 ‘고백하는 사람’이다.

역설적이게도 이 고백을 통해 그들은 발설(拔舌)지옥에 떨어지지 않고,

무량겁 무량빛을 낸다.

그러한즉, 그들은 곧 회광반조하여 이내 無量光佛, 無量壽佛이 된다.


가즈아를 외치려면, 

남은 물론 자신까지 속여야 한다.

자고 일어나자마자 설마 오를까 이리 의심하고 있는,

당신 자신까지 시궁창 속으로 쑤셔 처넣어야 한다.

존버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함으로써,

무간지옥에 빠진 성철을 소환하여,

그대 밑에 무릎을 꿇리고, 삼천 배를 배례케 하여야 한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 스스로 자신을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을 고백하지 않는다.

그런즉 부처가 되지 못하며,

서방 극락정토에 계신 아미타불을 결코 만날 수 없다.


헌즉, 기껏 한다는 짓이란 게,

아미타불 명호나 외고,

가즈아를 목이 터져라 외치고,

존버라?

이를 부둥켜 앉고,

연신 불안한 자신을 위로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기복불교(祈福佛敎)와 무엇이 다른가?

갓바위에 올라 파리손이 되어,

그저 제 집에 복을 비는 아낙과 무엇이 다른가?


그대에게 딸이 있다면,

가즈아를 외치는 녀석은 사위 삼을 수 없으며,

아들이 있다면,

존버를 사수하는 계집은 며느리로 들일 수 없는 것이다.


舍利弗!若有人已發願、今發願、當發願,欲生阿彌陀佛國者;是諸人等,皆得不退轉於阿耨多羅三藐三菩提,於彼國土若已生、若今生、若當生。是故舍利弗!諸善男子、善女人若有信者,應當發願生彼國土。


信, 願, 行


아미타불이 계신 서방 극락정토에 태어나길 원한다면, 믿음을 가져야 한다.


일찍이 육조 혜능(慧能)이 오조 홍인(弘忍)을 뵈었다.

오조께서 물었다.


你來幹什麼?


“그대는 어찌 왔는가?”


혜능이 아뢰다.


唯求作佛,不求餘物


“다만 부처가 되려 할 뿐,

그 밖의 것은 구하는 바 없습니다.“


내가 곧 부처라는 믿음은 다른 외물을 구하지 않는다.


현장이 인도로 불경을 구하라 나섰다.

돌아오기까지 총 17년이 걸렸다.

그런데, 가는 길에 6년, 돌아오는 길에 6년을 보냈다.

그런즉 정작 인도에 머무른 기간은 5년에 불과하다.


그의 원력은 이리 굳건했다.


為者常成,行者常至。

(晏子春秋)


“하는 자는 항상 이루며,

가는 자는 항상 도달한다. ”


이를 거꾸로 말하면,

실천하지 않으면 결코 이룰 수 없다 할 수 있다.


지금 信, 願, 行 삼대 요목에 대하여 말하였다.

이제 마지막에 남은 것이 있으니 바로 證이 되겠다.


즉 信으로 말미암아 願을 세웠고,

願을 이루려 行을 이행하였다.

이 行이후, 法 즉 진리를 증명하게 된다.


信, 願, 行, 證


가즈아, 존버는 信, 願, 行은 실종되고,

다만 입증되지 않은, 

미래로부터 거저 꾸어온 證만 외쳐지고 있다. 


불교엔 정토종(淨土宗), 염불종(念佛宗)이란 교파가 있다.

저들은 오늘날의 말법5탁(末法五濁) 세상에선,

타력신앙을 통해서만 구제될 수 있다는 종지(宗旨)를 편다.  

염불만 하면 서방정토(西方淨土) 즉 극락세계(極樂世界)에 갈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

아, 이 간절함이란,

팔뚝에 소름이 바르르 돋으며 어깨까지 그 소망의 떨림이 전해온다.

간단히 통으로 말하긴 조심스런 구석이 있지만,

이게 기독교의 휴거와 무엇이 다른가?

여긴 최소한 믿음으로 구원이라든가 왕생을 꾀하고자 하는 기도(企圖)가 있다.


그런데 과연 지금 이 세상이 말법시대이긴 한가?

대방등대집경(大方等大集經)에 따른다면,

이미 말법 시기를 한참 더 지나고 있긴 하다.


若我住世諸聲聞眾。戒具足。捨具足。

聞具足。定具足。慧具足。解脫具足。

解脫知見具足。我之正法熾然在世。

乃至一切諸天人等。亦能顯現平等正法。於我滅後五百年中。

諸比丘等。猶於我法解脫堅固。

次五百年我之正法禪定三昧得住堅固。

次五百年讀誦多聞得住堅固。

次五百年於我法中多造塔寺得住堅固。

次五百年於我法中鬥諍言頌白法隱沒損減堅固。了知清淨士。

從是以後於我法中。雖復剃除鬚髮身著袈裟。

毀破禁戒行不如法假名比丘


이를 따져보면 말법 시대는 서기 1000년 ~ 1500년이니,

중국은 명(明)나라 때에 당(當)하며,

우리나라는 조선 임진왜란(1592년)을 지나고 있다.


이때에는 불법은 名存實亡이라 이름만 남고, 실은 없어지고 만다.

분종분파(分宗分派)가 되어 쟁의를 일으키고, 

법이 은몰(隱沒)되고, 정법은 파괴되고 만다.


從是以後於我法中。雖復剃除鬚髮身著袈裟。

毀破禁戒行不如法假名比丘


이 이후엔 비록 머리 깎고, 가사를 걸쳐도,

계율을 깨고, 행실은 법을 어긴 가짜 중들이 나타난다.


오늘날 한국 불교를 보면 식육을 거리낌 없이 하는 중들도 있고,

도박, 성 매수를 하여 사회적 지탄을 받는 경우도 적지 않다.

말법 치고도 농(膿)이 흐르고, 골수가 썩는 형국이라 하겠다.


실제 내가 목격한 사례도 적지 않다.

조그마한 암자는 종파 이름을 사올 수도 있다.

절집 앞에 떡하니 걸린 oo宗이란 종단 명판 앞에 서면, 우습기 짝이 없다.

一切法中無名,名中無一切法

(大般若波羅蜜多經)

경에선 이리 가르치고 있는데,

정작 저들은 이름을 사고 팔고 있는 것이다.


내가 농사 짓고 있는 블루베리도,

유명 언론사에 기 백만원 돈을 주면,

우수 농가 명판을 주고, 

지면에 그럴싸하니 닦아 세우며 기사를 올려준다.


일찍이 허운(虛雲) 선사는 이리 말하였다.


秀才是孔子的罪人,和尚是佛的罪人。


‘수재는 공자의 죄인이요,

중은 부처의 죄인이다.’


(※ 수재 : 한(漢)나라 이래 과거 시험 과목 중 하나를 가리키는 것이로되,

차차 우수 인재를 가리키는 말로 전화되었다.

여기서는 서생(書生) 또는 독서인( 讀書人) 정도로 보면 어떨까 싶다.)


과시 정문(頂門)의 일침(一針)이라 하겠다.


이리 세상이 허물어지고 있는데,

어려운 교선(敎禪)을 따를 자가 남아 있겠음인가?

그저 칭명염불(稱名念佛)하며 극락왕생하는 법을 찾는 것이 낫다는 이가 왜 아니 나타나리?


가즈아만 외치면,

마치 언젠가는 만다라화가 하늘에서 꽃비처럼 내릴 것이라는 듯,

저리 처절하게 외치고 있는 것이다.


이 얼마나 서럽디 서러운 모습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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