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이즈
나는 요즘 산에 들어, 이제와는 다른 새로운 등산로를 이용한다.
호적한 곳을 즐겨 찾는 편이지만, 부득이한 사정으로 인해
번잡하고 사람이 가장 붐비는 주 등산로를 이용하게 되었다.
그런데, 거의 등산로 하단에서부터 마이크소리를 듣는다.
산 위에 있는 영추사란 절에서 나는 소리다.
아래에서는 조그만 소리로 들리지만, 위로 올라갈수록 점점 소리가 커진다.
염불소리는 아니고, 이러니저러니 하며 무슨 명상을 주제로 한 소리다.
북한산은 국립공원이다.
이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이 산이 국가의 소유이며, 특별히 국립공원법에 의해 관리되고 있음을 뜻한다.
생각건대,
설혹 불교신자라 하여도 청하지 않은 소리를 연일 듣는 것이 늘 편할 리 없을 터이며,
기독교신자라면 더욱 타 종교의 종교방송을 듣는 것이 마냥 달가울 까닭이 없다.
항차, 무관한 등산객에게
국립공원 계곡에 울려 퍼지는 종교방송이란 얼마나 폐가 될 것인가?
굳이 이리 물어서야 깨우칠 까닭이 없다.
그가 사리가 소명(昭明)한 이라면 제풀로 알고도 남을 일이다.
나는 특정 종교를 믿지 않는 처지지만,
어쩌다 듣는 염불소리도 좋고, 스님의 독경소리도 좋아한다.
열두 폭 우중(雨中) 가운데 들려오는 염불소리란 얼마나 저리도록 사무치던가?
내 처도 천주교신자이지만, 원래는 스님의 염불소리를 좋아했다.
그러다가, 일년 열두 달 바로 앞산에서 들려오는 염불소리에 지쳐,
이제는 많이 생각이 달라진 모양이다.
아니, 코딱지만한 암자에서 무엇 그리 광고할 일이 넘친다고,
마이크로 온 동네 가득 외장(獨場)치며 난리 굿인가?
그곳이 사시장철 펼쳐지는 굿당인가? 아니라면 연회당이라도 된단 말인가?
그저 어쩌다 오는 신자 모시고 조촐하니,
복을 구하려면 복을 빌고, 법을 수(修)하려면 법을 닦을 것이지,
무엇이 부족하기에 그리 완력으로 용쓰며,
일일 365일 구함이 온산을 가득 차 넘치는가 말이다.
법문은 그저 법당안에 피어 오르는 향인 양 은은히 흐르면 족하다.
혹여 안뜨락까지 또르륵 구르면 이 또한 넉넉하리라.
바람이 언제 마이크 대고 소리 지르며 대숲(竹林)을 호령하던가?
竹影掃階塵不動
月輪穿沼水無痕
(죽영소계진부동
월륜천소수무흔)
대나무 그림자가 섬돌을 빗질 하여도 티끌 하나 일지 않고,
둥근 달이 호수를 꿰뚫어도 흔적 하나 없네.
그뿐인가,
기러기 역시 장공(長空)을 스친다한들 자취 하나 남김이 없다.
그러하지만,
만고(萬古)에,
대나무는 청청,
달은 교교(皎皎),
기러기는 애잔히
사람 마음을 소리 소문 없이 적신다.
법문이라 한다면 이들보다 더 깊고 사무치는 것이 있을손가?
저들, 산승(山僧)들은
산에다 소리로 무엇을 기필코 파 새기려 함인가?
절절 맺힌 한(恨)도, 찰찰 구하는 원(願)도 많고뇨.
심히 이들 삼우(三友)에게 부끄러운 노릇일세라.
명색이 출세간(出世間) 법에 의탁한 종교인이 아닌가 말이다.
이러고서야 어찌 부처님전에 엎드려 기도의 뜻을 올려 사리겠는가?
저러고서야 어찌 시방제불이 법향을 나리시겠는가?
저잣거리도 온갖 아우성으로 본을 삼고,
산사(山寺)도 이리 우악스러움으로 법을 삼으니,
삼세시방 온우주가
봄철 두엄 내갈 임시(臨時) 뒷간 가득 찬 똥물처럼 찰찰 욕심이 그득하고뇨.
참으로 해괴한 노릇이라 하지 않을 수 없음이랴.
성경에서 예수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너희가 구하기 전에 이미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기도는 모름지기 홀로 신 또는 부처를 만나는 행위여야 한다.
밖으로 꾸며 과장하고, 선전하고, 나팔을 불어대는 것으로 진정한 기도가 성취되겠는가?
통성기도(通聲祈禱)라는 것도 그저 광분하여 소리 내어 기도하는 것이 아니리라,
여럿이 모여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고, 신심을 서로 북돋우며
하나님을 내 안에 모시고자 하는 행위가 아닐런지?
그러하다면 거죽으로 꾸며, 괴이쩍고, 흉치 않은 가운데,
회중(會衆)이 모인 자리 밖으로 그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는 절제가 있음으로,
비로서 그 뜻이 법대로 모아지리란 기대가 혹 있으리라.
아무리 그렇다한들,
이는 일시적 방편일 터,
진정한 존재의 빛을 찾는 길은,
예수의 가르침대로 은밀한 골방기도로서야 만난다.
우리 어렸을 때는 교회당의 종소리, 차임벨이 삼이웃까지 그저 퍼져나갔었다.
그러던 것이 이제 그런 모습을 볼 수가 없다.
제 아무리 참되고 복되다한들, 그로 인해 이웃에 폐를 끼칠 수는 없는 것이다.
기독교측은 진작에 자각하여 사회변천에 발맞추어 적응하였음이다.
그런데,
지금 개명(開明)한, 이 멀쩡한 세상에 불교(영추사)는 어찌하여 거꾸로 가고 있음인가?
국립공원 안에서 무슨 권리로, 자격으로 그리 안하무인 방자하게
마이크 소리로 계곡을 꽉 채워넣고 있음인가 말이다.
국립공원이 저잣거리인가?
아니면 독(獨)으로 전세라도 내었단 말인가?
조계종에선 탁발을 금하고 있다.
탁발의 거룩한 뜻도,
시대와 조우하며, 작폐(作弊)가 되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독교도 이미 폐한 교회종소리를 상기도 모르고 있는가?
불교는 어찌 시대를 거슬려 마이크로 온 산골짜기를 오염시키고 있는가?
상호 다른 가치가 충돌하고, 신념이 상호 갈등을 일으키는 복잡다단한 현대사회다.
서로 삼가며, 조신(操身)하며 세상을 건너야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절이 산에 든 까닭은 무엇인가?
기도처로 삼았을 까닭이 있을 상 싶고,
한편으론 조선시대 억불책에 의해 산으로 쫓겨 그리 된 까닭도 있겠다.
하지만, 내 나름대로는 생각 커니,
속세의 번거로운 진애(塵埃)를 여의고 보리(菩提)를 닦고자 함이 아니겠는가 싶다.
그런데 어인 연고로 그리 방자하게 마이크를 들이대고
온 산을 소리로 꽉 채우고 있는 것인가?
산이 두렵지 않은가?
난 어떤 때, 혹간 들고 가는 등산용 지팡이가 바윗돌에 툭툭 부딪히는 소리도
남에게 폐가 될까, 혹은 산짐승에게 해가 될까 조심하며 다닌다.
항차 산주(山主)를 자임하고 있는 사찰이 아니던가?
무주공산(無主空山)임에도 주인이라 함은 떵떵 거리고 위세를 부리람이 아니라,
산에 깃든 뭇 중생을 보듬고, 지나는 객을 살펴 보하라는 소임으로서
자득(自得)되어야 마땅한 노릇이거늘.
마이크를 빌어 목탁으로 삼고,
소리로 복을 구하고자 함인가?
도대체가 부처가 말씀하신 심법(心法)은 어느 나변에 내팽개쳐 있음인가?
기독교에서는 이리 말하고 있음이다.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골방의 은밀함을 기도의 본령으로 삼으라는 말씀이다.
불교라고 가르침이 다를손가?
그게 아니라면,
독굴(獨窟) 폐관(閉關)수행함은 어인 까닭이며,
원효가 구심주(九心住)를 닦기 위해 고요한 곳에 머무르라고 가르치심은 무엇이란 말인가?
선정(禪定)이라 함은 곧 정려(靜慮)라 하지 않았음인가?
심체적정(心體寂靜), 심정지일경(心定止一境)이니
이 또한 식려(息慮)를 말하고 있음이며, 응심(凝心)을 수행법의 골간으로 하고 있음이라,
그러하니, 기독교의 골방에서 기도하라는 말씀과 도대체 한끝인들 다름이 있음인가?
이젠 도가 오를 대로 올라 부러 소리공해 속에서 시험하려 함인가?
그리 놀라운 수승(殊勝)의 경지에 다다랐다면,
내 권청(勸請)하노니,
공연히 산중을 소란스럽게 하지 말고,
어여, 하산하여 저잣거리에 들어 입전수수(入廛垂手)하라.
혹, 우정 자비심을 내어 가련한 중생에게 불음(佛音)을 듣게 하고자 함일까?
아니면, 포교 목적으로 그리 자신을 선전하고 있음인가?
나는 전자가 아닌 후자로 의심하고 있음이다.
‘도(道)를 구함이 아니라 인(人)을 구함이라.’
만약 이 의심이 맞는다면, 저들은 이젠 산에 있을 까닭이 없다.
저잣거리로 사찰을 옮겨 내려야 한다.
거기 뭇 상인과 어울려 한껏 영업을 할 수 있겠음이 아니더냐?
그렇지 않은가 말이다.
홀로 청정한 산을 왜 휘저으며 괴롭히는가?
과연 종교란 무엇인가?
도대체 산에 든 이들을 무슨 자격으로 객들을 시험하고 있음인가?
나는 산에 들어,
사각사각 낙엽 밟는 소리에 침잠하고 싶다.
계곡을 우우 소리 내며 몰려가는 바람 소리를 듣고 싶다.
때로는 내 마음에 파문져 흐르는 그 소리에 잠기고 싶을 따름이다.
이게 내가 등산하는 소박한 이유다.
내 마음이 비록 시랑(豺狼, 승냥이와 이리), 사갈(蛇蝎, 뱀과 전갈) 못지않아
사납고 독하지만, 산에 들면 시집을 챙겨 맘을 달래기도 하노라.
한용운은 이리 노래했다.
알 수 없어요
한용운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의 파문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 위의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을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돌부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구비구비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 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해를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나 역시 산에 들어,
수직의 파문을 내며 떨어지는 나뭇잎 발자취를 더듬고 싶으며,
푸른 이끼 낀 나무를 거쳐 버려진 탑 위로 사라지는 향기를 맡고자 한다.
그리고 돌부리를 울리고 가늘게 흘러가는 시냇물 소리를 듣고 싶을 따름이다.
이 연약하고, 소박한 꿈이 주제 넘겨 그리 염치없는가?
거기 이름도 거룩한 영추사 스님 네들,
제발 마이크 좀 꺼주면 아니 되겠소?
부처님이 영취산에서 설법할 제,
언제 마이크를 사용했을까나?
이 청정 공간에 퍼지는 마이크 소리란 도대체가 얼마나 삿된가 말이다.
네겐 마음이 퍼렇게 멍드는 폭력과 한 치도 다름이 없다.
그게 저 자리, 저 때에 이르러서는,
제 아무리 거룩한 길음(吉音)이 되었건, 성스런 복음(福音)이 되었건 매한가지다.
내가 만일 불교신자라면,
어느 날 사찰에 들려 절하고 기도할 마음이 있을 때가 있을 터,
그 때라면 내가 자진하여 그리 찾아 들 것이며,
만일 기독교 신자라면,
어느 날 교회 예배당에 들려 하느님을 구(求)하고 사(赦)함을 바랄 때가 있을 것이다.
그 때가 아니라면,
나를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겠는가?
그 이전엔 그 누가 되었든 간에,
국립공원이란 공적 공간에서 함부로 나를 부르지 말아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내가 언제 그대들을 청하였던 적이 있는가?
그냥 내버려 두었으면 싶은 것이다.
최소한 이 조그마한 일우(一隅) 북한산에서만이라도.
저 아랫동네엔,
담배연기도 자욱하고, 소리 공해도 심하다.
내가 아무리 피하려고 하여도 도리 없이 피해를 입고 산다.
나 역시 본의 아니게 남에게 폐를 끼치기도 하리라.
하지만 말이다.
짧은 시간이나마 여기 국립공원 북한산에 들면,
누구로부터 방해를 받지 않고 ‘하늘’을 만나리란 기대와 소망이 있다.
그래서 나는 산에 든다.
그런데 영추사 그대 사찰측은 도대체 무슨 자격으로,
나의 소박한 기대를 허물고, 연약한 소망을 훼하고 침탈하는가 말이다.
사뭇 염치가 없는 짓이 아닌가?
만약 산꼭대기에 점포 하나가 있고,
그들이 매일 호객행위를 한다고 마이크로 떠든다면,
천하에 그 누가 용납을 하겠는가?
그런데, 종교단체이기 때문에 산에서 종교방송을 하는 것이 용인될 수 있음인가?
그리 거룩하다고 말하곤 하는 종교라는 이름을 참칭(僭稱)하여
저리 산객(山客)에게 무단히 폐를 끼쳐도 되는가 말이다.
특정인을 제외하고는 이는 종교방송이 아니고 그저 소음에 불과한 것이다.
내가 특청해서 듣는 것이 아니고, 외부에서 강제되어 듣는 소리라면,
그게 제 아무리 거룩하고 성스런 법음(法音)이요, 복음(福音)이라 한들,
그저 시끄러운 소음이라고 규정함에 그 누가 이를 탓할 수 있으랴.
만원(滿員) 지하철을 타고 저녁 늦게 귀가하는 노동자에게,
기독교 전도사들의 귀 따가운 소리가 역시 소음으로 느껴진다면,
그 또한 누가 이를 들어 그를 나무랄 수 있겠는가?
공적 장소에서 그 누구라도 타인에 의해 유발된 소리 공해로부터
보호받아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그 누구도 그 자리에서 일방이 타방을 자신의 뜻이라고,
함부로 강제할 권리는 없는 것이다.
영추사측은 이제라도 대오각성하고,
종교가 무엇인가 북한산 운예(雲霓), 곡수(谷水)에게 되물어야 한다.
그날이 오면,
내 삼가 영추사 스님에게 공양(供養)하고 청법(請法)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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