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의 공적 분산 그리고 도착된 자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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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kr.news.yahoo.com/service/news/shellview2.htm?articleid=20081220111513247h2&linkid=613&newssetid=3178&title=%BA%BC%B0%C5%B8%AE+%26+%C0%D0%C0%BB%B0%C5%B8%AE)
내용 요약 :
올해 61살의 신부는 마침 그의 휴대전화를 빌린 소녀 신자에 의해 이제까지의 비리가 탄로났다.
소녀는 그의 부모에게 알렸고, 이내 경찰에 신고되었다.
그 신부는 8개월의 징역, 2년의 집행유예를 선고되었는데,
신부는 법정에서 “평생 처음으로 여성의 실제 알몸을 보고 싶은 마음에서 몰래 훔쳐봤다.”며 용서를 구했다 한다.
이 기사를 접하며 나는 두 가지 일이 떠올랐다.
하나는 바로 앞글에서 말한 돼지고기 원산지 표기 잘못 사건과,
(※ 참고 글 : ☞ 2008/12/20 - [소요유] - 혀가 붙어 있는가?)
한국 사회에서의 성직자들의 성추행과 관련한 문제이다.
앞에서 잠깐 풀어 두었던 이야기 실마리를 다시 옮겨오며 시작하자.
늘 느끼는 것이지만,
이런 사단에 대처하는 우리 사회의 의식은 대단히 특징적이다.
감정의 분출은 치열하나,
정작 해결 과정, 수단에 대한 합리적인 접근은 불투명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감정의 분출이라는 게,
주관적인 것이기에 사건 현장 마당에선 각자 부유(浮游)하며 떠돌 뿐,
통일된 주장으로 모아지거나, 가지런하게 정돈되어 다음 처리 단계로 넘어가기 어렵다.
그냥 용서하고 넘어가자는 측은, 마음이 너그러운 것도 물론 있겠지만,
개중엔 피해 당사자가 아니거나,
피해사실에 대한 감수성이 예민하지 못한 경우도 있지 않을까 싶다.
한 발 더 나아가 인정을 베푸는 것에 대한 대외적인 평가를 의식하다든가,
내심의 평온무사를 구하는 마음 등 여러 동인이 있으리라.
반면 적극적으로 나서며 잘못을 꾸짖고 용서하지 못하겠다는 측은 무엇인가?
속아서 원치 않은 상황에 처하게 된 자신을 주체할 수 없는 것이다.
개중엔 임신부라고 밝힌 이도 있다.
나 자신도 모자라 태중의 아이가 위험에 노출된
어처구니없는 현실에 분노하고 있는 것이리라.
나는 국외자이지만,
이 양자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한다.
요는 각자의 소신에 입각하여 행동하면 그 뿐인 것이다.
그러함에도 이 양 당사자는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끼리 서로를 헐뜯고 나무라고 있다.
그러하니,
나는 이 마당은 그저 끝임 없는 감정의 분출 밖에 목격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예하자면,
이런 사건을 해결하는 방법 중에서 가장 객관적인 것은 무엇인가?
응당 법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법리(法理)라고 할 때 理라는 것은 ‘이치’라는 게다.
그러하니 법리란 법적 이치, 사리란 말이다.
사적 감정이 아니라, 법적인 이치에 비추어 사건을 재단하고 처리하자는 것이다.
이쯤에선 그 법리를 사건현장에 인용(引用)하는 것이,
훨씬 사회경제적으로, 사회심리학적으로도 유익하다.
법적 호소, 법적 다툼의 현장으로 자리를 옮겨 가지 못하고,
연일 감정의 교환밖에 없는 장소에서 질펀하게 울고불고 떠들고만 있는 것이다.
이게 보통의 우리들 일상이다.
아직 법은 우리에게 낯설기 짝이 없다.
이게 우리 자신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법적 장치의 부실에도 문제가 있긴 하다.
심적 부담, 비용, 시간, 사법기관에 대한 신뢰문제 등등
법적 공간으로 이동하여 문제를 해결하려 할 때,
우리는 여러 문제를 예상하고 애저녁에 주눅이 들고 만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리 서성이고만 말 터인가?
저 돼지고기 사건에서는 근 20일간 결론 없이 떠들고만 있다.
급기야 어떤 이가 신고를 한 모양인데,
그것도 경찰에 고소한 것이 아니라,
보건.위생 당국에 신고를 한 정도이다.
나는 고소가 옳다 그르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당사자의 일임이니 어떠한 형태이든 그 행위를 존중한다.
다만, 만약 고소를 한다면 이런 효과가 있지 않은가 검토를 해보자는 이야기다.
예컨대, 고소가 우리 일상에서 자연스런 생활의 일부라면 어떠할까?
우선은 이런 문제로 20일간 감정의 낭비를 할 필요가 줄어든다.
법적 심판을 구하게 되면, 그리고 물론 정상적인 사법시스템이 작동된다면,
여러 성가신 일들을 사법기구를 통해 해결을 보게 되리란 기대와 신뢰가 생기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
저들 사법기관은 그런 일을 전문적으로 처리하라고 사회가 마련한 제도인 것이다.
물론 지금 현실에 비추어볼 때 사법기관에 의뢰한다한들 비용, 시간이 절약될 턱이 없다.
소송은 마지막에라야 간다는 인식이 퍼져 있는 것은,
우리네 사법 시스템의 열악한 환경 조건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하지만, 이는 사법 서비스 회피의 현실적 필요 조건이 될지언정,
사법 시스템 불요(不要)의 충분조건은 되지 못한다.
요는 사법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이 땅의 현실을 바로 잡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이에 대한 관심과 애정 그리고 개선의 의지, 고민이 필요하다는 말을 하고 싶다.
난 그 하나로서 적극 사법 서비스 기관을 이용하는 풍토를 조성하자고 주장한다.
사람들이 적극 이 서비스 시장에 들어서게 되면,
시장 자체도 내외의 자기 반성 압력이 작용하여,
지금보다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동력을 확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해 보는 것이다.
가해자는 범죄를 저지르더라도,
법의 심판을 대비하여야 하기 때문에 둘 중 하나의 태도를 사전에 준비하여야 한다.
즉 하나는 아예 범죄 같은 것은 꿈도 꾸지 말자가 그 하나요.
다른 하나는 더욱 철저히 단도리를 하여 범죄 흔적이 노출되지 않도록 채비하는 것이
또 다른 하나의 방책이 된다.
이런 사회는 나날이 반성하고, 변화하며 발전해 나갈 수 있다.
최소 셋은 발전한다.
범죄자, 피해자, 그리고 사법당국(법률시스템).
하지만, 돼지고기 사건에서와 같은 모습의 사회는 어떠할까?
실컷 감정을 분출한 것 같지만, 무엇인가 속은 확 풀리지 않는다.
우선은 피해에 대한 법적사실관계 확인, 보상의 객관적 측정이 부재하기 때문에 더욱 혼란스럽다.
우리는 그 확인, 측정을 제삼의 기관에 맡기는 장치를 진작 만들었지 않은가?
피해자에겐 보상(報償)이, 가해자에겐 보벌(報罰)이 정해진 절차에 따라 평가되고, 보고된다.
이런 시스템은 사회 갈등 처리를 객관적으로 전문 집단이 수행하면서
나름 발전하고 사회 일반의 공익에 이바지한다.
언제나 사건은 있지만,
그 자리에 합당한 평가가 부재하고, 객관적 처리가 없는 사회,
그 이면에는 좋은 게 좋다라는 무책임한 온정주의와
공적 훈련이 덜 된 미숙한 집단들이 웅거하고 있다.
나는 이를 댓가 없는 “책임의 공적 분산”이라고 명명한다.
가해자 개인이 책임을 온전히 부담하는 것이 아니라,
원인행위도 없이 애꿎은 주변의 객들이 나누어 짊어지는 사회란 뜻이다.
“언젠가 나도 가해자가 될 수 있어,
그 때는 이런 사회가 정이 넘치고 살 만한 세상이 아닌가?
사사건건 책임을 묻고 따지는 사회는 얼마나 삭막한가?
그저 너그럽게 용서하고 함께 어울렁 더울렁 묻혀 가는 것이야,
짧은 인생 그리 모질게 살면 안 돼.”
미래의 가상 잘못에 대한 책임의 유보까지 준비하고 있는
저들의 허약한 비굴함이라니 정말 딱하다.
이런 의식 구조하에선 필연 악다구니 감정의 분출밖에 터져나올 게 없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은 자신의 미래의 가치를 훼손하고 말 테니까.
그 유보된 자리에 서서 피 끓는 악다구니 말고 더이상 할 것이 무엇이 남아 있겠는가?
그리고는 돌려 자기를 기만한다.
'그저 널리 용서하고 묻고 넘어가는 것이야' 하고 말이다.
이 순간, 그들은 덤으로 착한 사람씩이나 되고 만다.
뭐 이런 의식들이 면면히 흐르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문제는 이런 사회는 늘 현재가 없다라는 것이다.
“일어난 사건은 과거의 일이니 잊자,
자자 이젠 좋은 일만 생각하고 앞으로 나아가자.”
있다면 과거와 미래만 남겨져 있다.
현재가 거세된 사회.
그러나 따지고 보면, 정작 미루어 두었던 그것들,
제대로 된 물려줄 과거도 없고, 미래조차 없어져 버리고 만다.
이런 사회는 책임을 물을 곳이 없다.
엄마 젖퉁이에 코박고 아직도 젖만 탐하는 다 큰 어른의 사회라고
희화화한다면 너무 실례가 될까?
가해자에게 너그러운 사회가 좋으냐?
엄벌하여 그 책임을 묻는 사회가 옳으냐?
이 물음에 대한 바른 대답이 어디에 있으랴?
하지만, 저 단순한 돼지고기사건을 보면서
나는 우리 사회는 현대라는 이름의 사회에
아직은 충분히 진입하지 않았지 않은가 이리 의심해보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어인 까닭에 근 20일간 분란만 일었지 뚜렷한 결과를 얻어내지 못하였는가 말이다.
물론 사소한 사건까지 법정에 세우자는 것은 아니다.
경중 판단이 문제겠지만,
분명히 중대한 문제가 발생했음에도 공론화하는데 익숙하지 않을 뿐더러,
은연중 미룸으로서 무엇을 도모하려는 어두운 계산까지 작동되고 있다면,
참으로 몹쓸 노릇이 아니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런데,
앞에서 인용한 기사에선 법적인 도움을 구하는 데 그리 큰 장애가 없는 것 같다.
저 프랑스 신부의 비행을 신고한 것은 틀림없이 신도중에 하나였을 터,
법적 생활이라는 게,
일테면 우리들이 일상으로 영위하는 경제생활, 문화생활, 종교 활동 등등 ...
제 활동 가운데 그저 하나에 불과하다면,
신부라 한들 신자가 그를 신고하는 게,
뭣 그리 큰 부담이 되겠는가?
엄연히 죄를 저지른 확증 현장에서 말이다.
신부는 망신을 톡톡히 당하겠지만,
개인적으로는 환골탈태의 계기가 될 터이며,
성소는 다시 새롭게 씻기고,
신도는 정상적인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
더불어 뭇 신부들의 처신은 더욱 바르게 되리란 희망과 기대가 있다.
모두 더불어 떳떳해진다.
요즘 법조 인력들이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기업은 모를까 일반인들의 법률 수요는 이런 사정이니 크게 늘 전망이 보이지 않는다.
나는 원래 변호사든, 의사든 실력이 아니라, 정원으로 제한하는 제도를 그르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우리 사회의 성격상 법률 수요는 크게 늘기는 어렵다고 본다.
그저 툭하면 "Sue"하겠다고 나대는 사회도 정나미 떨어지지만,
한편, 이혼전문 변호사, 교통법칙금 전문 변호사 등등 자질구레한 수요에 따라 분화하는
법률 서비스 공급자들이 마치 콩나물, 두부 장사처럼 일상화되는 세상이 도래했으면 하고 바란다.
이는 앞으로 고소 전쟁이 가득하기를 소망하고 있다는 얘기가 아니라,
이제껏 법률 서비스에 대한 제대로 된 인식이 부재한 우리네의 실정을 되비추고자 함이다.
내가 실제로 당해 교회의 신자로부터 들은 얘기 하나가 생각난다.
어느 교회에서 목사가 여신도 여럿을 성적으로 농락했다.
증거도 충분히 확보된 상태다.
그런데도 그는 멀쩡히 교회를 이끌어 가고 있다.
그런 파렴치한 목사를 왜 법의 심판대에 세우지 못하는 것일까?
이런 사회는 과연 무엇을 지향하고 있음이며,
사회에, 그리고 하나님의 역사에 무엇을 남길 수 있을까?
건전한 법적 생활의 확립만이 문제가 아니다.
매 일주일마다 저 목사가 주관하여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 수 있는가 말이다.
저간의 사정을 아는 신도야 이미 내막을 인용(認容)하는 처지이고,
자신의 목적과 이해를 위해 감수한다고 하더라도,
나머지 멀쩡한 신도들의 천진스런 기도란 도대체 얼마나 안타까운가 말이다.
이런 온정주의란 허울은 얼마나 무지몽매한가?
또한 얼마나 기만적인가?
그곳 신자도 아닌 내가 그저 천만 죄스럽다.
이 지경이라면,
저곳은 이미 신망(信望)의 교회가 아니라,
무엇인가 별다른 것이 거래되는 저잣거리에 설치된,
그저 몇몇을 위한 비굴한 사적 위안소(慰安所)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이미 저 자리는 내적으로 허물어지고 만 것이니,
설혹 거죽으로 건물을 몇 층씩 쌓아올린들 그 허물이 가려지겠는가 싶다.
도착된 자위, 위선으로 덧씌어진 비굴함의 그림자가
저믄녘 땅위를 십자형으로 긋고 있다.
나는 저 프랑스 신부의 기사 앞에서 다시금 이를 회의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빌어 장사하는 무리가 아니라면,
어찌 성추행을 한 목자(牧者)를 교회 단 위에 서게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하기에, 예수의 이 말씀은 또 얼마나 절절한가?
“너희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려고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노라 나는 사람이 제 아버지와 맞서게 하고 딸이 어머니와 맞서게 하고
자기 시어머니와 맞서게 하려고 왔다”
돼지고기 사건에서도 그렇고,
두루두루,
우리 사회가 조금은 더 발라졌으면(誼,義,正)하는 소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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