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별명과 시참(詩讖)

소요유 : 2009. 8. 12. 22:48


언제 닉(nick)에 대하여 쓴 적도 있습니다만,
( ※ 참고 글 : ☞ 2008/02/17 - [소요유] - 별명산고(別名散考))
최근 모 사이트에서 어떤 닉을 대하고는 새롭게 다시 감상이 일었습니다.
하여, 예전에 어떤 분과 나누던 이야기를 중심으로 객설을 풀어봅니다.

흔히 어른들이 하시는 말씀 중에 ‘말이 씨가 된다.’라는 속언이 있습니다.
이야기를 더 이끌기 전에,
이와 관련되어 먼저 살펴 볼 일이 있습니다.

‘동요(童謠)’란 보통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원래는 그저 단순히 어린아이들이 부르는 노래가 아닙니다.

저잣거리에 유행하는 근거 없는 말을 요언(謠言)이라고 합니다.
하늘이 임금을 경계하려면 형혹성(熒惑星)에게 명을 내립니다.
형혹성은 어린 아이로 변해서 지상으로 내려오고,
요언을 지어서는 모든 아이들에게 퍼뜨립니다.
이것을 동요라고 이르는 것이지요.
그러하니 동요란 곧 요언이고,
이는 하늘이 임금을 경계하는 말이자,
실인즉 그 땅에 사는 백성들의 핏빛 소리, 한이 맺힌 절규이기도 한 것이지요.

그래서 현인들은 이 동요를 빙자하여,
노래를 지어 어린 아이에게 은밀히 가르치고,
그것이 온 세상에 자연스럽게 퍼지도록 꾸미곤(기획) 합니다.
그 당시는 왕이든, 서민이든 미신에 상당히 혹하여 빠져 있기에,
이런 술책들이 제법 씨가 먹히지요.

동요가 퍼지면,
보통의 경우, 임금은 그게 하늘의 경고로 알고,
근신을 하기도 합니다만,
늘 그러하듯이,
얘깃거리에 등장하는 포악한 임금은 이를 무시하고,
황음방탕하다가 끝내 자리를 쫓겨나거나 죽임을 당합니다.
이럴 경우 ‘말에 씨가 있는’ 전형적인 예가 되겠습니다.

그러하기에 옛날 사람들은 말을 삼가고 함부로 하지 않았습니다.

원래 참(讖)이란,
진(秦), 한(漢) 시대 무당 또는 방사(方士)가 길흉을 예시(豫示)하기 위한 은어를 말합니다.
장래에 응험(應驗)할 예언, 징조를 뜻하지요.

이에는,
시참(詩讖), 어참(語讖), 요참(謠讖), 서참(書讖) 등 여러 가지 있습니다만,
당사자가 부지불식간에 지어낸 시라든가 말 또는 노래에 숨어 있는,
불리(不利) 또는 불행(不幸)한 징조가 나중에 그대로 현실에서 일어나곤 합니다.

그래서 신통한 것인데,
예로부터 그런 사례들이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시참(詩讖)으로 아주 유명한 것이 있지요.

수양제가 물놀이를 하고 있는데,
마침 물 위에 사람도 없는 빈 배 하나가 풍랑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리저리 휩쓸리는 그 모습을 보고는 감흥이 일어 시를 짓습니다.

三月三日到江頭,正見鯉魚波上遊。
意欲持竿往釣取,恐是蛟龍還複休。

삼월삼일 강가에 이르러, 잉어가 물을 헤치고 노는 것을 보노라.
낚시로 장대를 가지고 가서 잡으려하나, 교룡이 돌아와 다시 쉴까(머무를까) 두렵노라.

이 사구시(四句詩)는 겉보기에는 뭐 별로 특별할 것이라고는 없습니다.
하지만 잉어의 이(鯉) 자와 이연(李淵)의 이(李) 자는 그 발음이 같습니다.
당시 이연은 점점 기세가 오르고 있었습니다.
그가 후에 수나라를 무너뜨리고, 대신 당나라를 세운 당고조(唐高祖)입니다.
시에서는 결국 이연이 용, 즉 왕의 뜻을 가진 것으로 불리워진 셈입니다.
식자들은 모두 이게 불길한 징조인 것을 알아차렸지요.

수양제가 의도할 리는 없었겠지만,
왜 하필이면 이런 시를 짓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지요.
그의 무의식이 미래에 일어날 일을 미리 시로서 예시한 것이라는 것이지요.
이런 것을 시참(詩讖)이라 부릅니다.

노랫말 중에 자신의 앞날을 암시하는 가사가 들어 있었는데,
이게 나중에 그대로 들어맞는 경우도 있지요.
이런 것은 요참(謠讖)이라고 합니다.
예컨대, 예전에 차.중.락이라는 가수가 있었는데,
한참 인기가 좋았었는데 도중에 돌아가셨습니다.
그 분 노래 중에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이란 노래가 있었지요.
그는 낙엽 따라 그리 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게다가 이름이 ‘중락’이니 중간에 떨어진다라는 뜻이라며,
당시 세상 사람들은 쑥떡거리기도 하였습니다.
저는 그 분의 노래를 참 좋아했는데,
설마하니 이름 때문에 그리되었다고는 지금도 믿고 싶지는 않습니다.

선비가 글을 쓰다가 붓이 우연히 뚝 부러진다든가,
글씨 획이 흩뜨려지면, 그 날은 근신을 합니다.
또는 도모하는 일이 있다면 중단하거나 재차 점검을 합니다.
이런 것을 일러 서참(書讖)이라고 합니다.

관상학에서도,
기(氣)가 돌며 색(色)이 얼굴에 뜨면서,
앞일을 미리 예비하여 징험(徵驗)을 드러낸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를 기색론(氣色論)이라고 하는데,
한의학에서도 망기(望氣) 또는 찰색(察色)이라 하여 환자의 용태를,
기색을 통해 짐작하기도 합니다.

그러하니,
참(讖)이든 기색(氣色)이든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간에,
결국 이런 것들은,
우리들이 무심코 내뱉는 말, 글, 노래, 몸짓 등이 모두,
나의 내밀한 본성의 발현이니
무엇인가 미래를 예증하는 조짐, 징조, 기미가 될 수 있다는 사고방식입니다.

부처가 짓는 인(印)도 의미가 다르지만,
이 참과 관련되어 한번 쯤 되새겨 볼만 합니다.
( ※ 참고 글 : ☞ 2008/02/17 - [소요유/묵은 글] - code - ⑥ 終回)
일본의 닌자(忍者)도 둔갑술을 부리고
손으로 갖은 결인(結印)을 짓습니다.

하여간 우리 몸을 통해 발출된 갖은 짓(짓거리)이라는 것이,
자신의 내적인 본성,
그리고 그 발현 가능태들과,
마치 엄마와 아이가 서로 탯줄로 연결되어 있듯이
긴밀히 관련이 되어 있다라는 사상입니다.
(※ 참고 글 : ☞ 2009/06/24 - [상학(相學)] - 전각요퇴(顫脚搖腿 - 발떨기))

이것을 믿고 안 믿고는 모두 제 나름이겠습니다만,
저는 색다른 닉을 보면, 이 참(讖) 또는 계인(契印)을 떠올리곤 합니다.
가령 이런 닉들은 참(讖)이 아니라도, 굳이 그리 쓸 필요가 있을까 의문이 듭니다.

‘아이구죽겠다.’
‘개장수’
‘노숙자’
‘똥개’
‘비리비리’
‘또라이’

설혹, 참(讖)과 관련이 없다한들,
우선은 저 닉의 주인들은 그리 고상한 인물이 아닐 것으로 짐작이 되고도 남지요.

게다가 이런 이치도 성립됩니다.
본성이 거죽으로 드러나 시참, 요참 등이 됩니다만,
거꾸로 거죽을 빌어 본성을 조정하거나 억제 또는 조장할 수도 있습니다.
즉 형식이 내용을,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라는 문법을 따른다면,
닉을 제대로 잘 쓰면 내 본성도 좋은 길로 인도 할 수 있음이며,
시를, 글을, 노래를 좋은 형식으로 정성을 다해 빚으면,
내 깊은 마음까지 통어(通御)할 수도 있겠다라는 조촐한 믿음을 가져 볼 수도 있습니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하지 않습니까?
요는 바른 기(氣)를 길러 형형(熒熒)스런 신(神)을 벼리는,
정성스런 마음이 중요하다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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