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孤獨)
바람이 분다.
비가 나린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눈보다 비가 더 마음 기슭에 와 닿고,
바람은 더욱 마음 밭 깊숙이 들어와 앉는다.
오늘같이 태풍이 불 때,
우풍(雨風)은 함께 내 뜨락에 떠밀려든다.
나는 절로 고독(孤獨)을 떠올린다.
아니, 나는 고독한 단독자(單獨者)로 들녘에 서 있는다.
고독(孤獨)은
현대인에게 친숙한 화법이로되,
이게 실인즉 알고 보면 과히 실존적인 부름인지라.
老而無子曰獨,幼而無父曰孤
늙었으되 자식이 없는 이를 독(獨)이라 하고,
어렸으되 아비가 없는 이를 고(孤)라 이른다.
아비가 자식이 없고,
자식이 아비가 없다면,
이는 곧 필요로 할 때,
의지할 곳이 없음을 이르고 있음이다.
정작 소용(所用)이 될 때,
그가 없다면 어디에 머무를 것인가?
소도 비빌 언덕이 있어야 비빌 것임이라,
언덕이 없음이니 그 커다란 덩치가 무삼 소용이 닿으랴?
맹자의 이런 말씀은 기실 유치하다.
고독이 이쯤이라면 차라리 사치스럽다.
왜인가?
이 선상(線上)에 선 위정자는,
걸핏하면 시장 바닥에 나와,
이명박 씨처럼,
오뎅을 입에 물고 시위한다.
“난 궁민을 위무하는,
치인(治人)의 도리를 아는,
그럴 듯한 사람이야!”
이게 실인즉,
그가 고상하니 남 다른 게 아니다.
그자는 몸이 아니라 입으로 말한다.
"나는 맹자의 문법을 알고 있다.
입으로는.
이리 뽐내고 있는 것이리라."
그건 그렇다 치고,
내가 궁하고 어려울 때,
다른 사람을 구하고 있다면,
차라리 이자는 구원이 가까이 있다.
이 지경인데도,
천지간 한 톨, 한 터럭도 구할 바가 없다면,
이 자야말로 지상에 남은 유일한 고독한 사람이라 칭하여,
그 숭고한 말씀을 오로지 전일하게 헌정하여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도 그날의 맹자는 말했다.
환과고독(鰥寡孤獨)을 사궁(四窮)이라 한다.
즉, 홀아비, 과부, 고아 따위의 외로운 사람을 궁한 사람이라 이르고 있다.
궁하니 구휼(救恤)하여 할 대상으로 카테고리화하고 있다.
이게 그 날엔 절실한 과제였겠지만
오늘 날은 몸이 궁한 사람보다,
마음이 궁한 사람이 더 많지 않던가?
그리고 이는 또한 치인, 즉 다스림의 문제가 아니다.
그러하니 한 입 오뎅으로 해결 될 성질이 아니라,
그냥 내버려두어야 한다.
이게 최소한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의 예의다.
환과고독이든 아니어든,
진짜배기로 고독한 사람은,
기대고 비빌 사람이 곁에 없어서가 아니라,
비와 바람을 사무치게 그리는 사람이 아닐까?
난 단호히 그리 생각한다.
이건 빈궁하다는 의미의 궁(窮)이 아니라,
"다함, 끝에 다다른"이란 의미로서의 궁(窮)으로 엿보아야 한다.
구극(究極), 궁극(窮極)의 끝자락에 선 사람.
그게 우주의 비밀이든, 질서든, 섭리든,
그 밑끝절미에 다다른 사람,
이를 이름하여 궁민(窮民)이라 할 수는 없는가?
오늘같이 바람이 크게 불면,
나는 궁민의 시민권을 다시 찾아주고 싶다.
궁짜든 인간이 아니라,
절대 고독에 든.
비와 바람을 진정으로 아는 사람,
구극인(究極人)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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