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룡은 구름을 타는가?
내가 오늘 소개하려는 것인즉,
한비자 전체를 통해 특히 내게 인상적인 편절(片節)인데,
이는 한비자의 자저(自著)라기보다, 후학들의 강학(講學)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아무려면 어떠하리.
그것이 어떠하든,
법가(法家)의 법(法), 술(術), 세(勢).
이 세 가지 중 법(法), 세(勢)에 대한 입장을 헤아려 볼 수 있는 중요한,
편(編)인즉 이리 꺼내어 본다.
술(術)인즉슨,
실인즉 나도 삼가 꺼리는 편이나,
본 편은 법(法), 세(勢)에 대한 중요한 시사(示唆)를 던져주고 있다.
내가 근래 촌동네 공무원 하나 둘을 접해보았는데,
저들이 모두 다 가히 인물이 아니더라.
깜냥도 아닌데 저리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임이라.
저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세위(勢位)를 뽐내고 있으나,
그 자리에 임할 그릇들이 아닌즉,
과시 비인(非人)이언데 감히 자리를 빌려 호가호위(狐假虎威)함이니,
실로 그 작폐(作弊)가 하늘을 가리고, 땅을 더럽히고 있다 하겠다.
한즉,
한비자의 소론을 펴 다려,
오늘을 다시 경계하려 한다.
***
※
작성 중
.
난세
1.
신자(慎子)가 말했다.
비룡(飛龍)이 구름을 타고, 등사(騰蛇)가 안개를 노닐지만,
구름이 걷히고 안개가 개면, 비룡이나 등사도 지렁이나 개미와 같아진다.
이는 나를 수 있는 의지처를 잃었기 때문이다.
현인이 어리석은 자에게 굽히는 것은 그 권력이 작고 지위가 낮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자가 현인을 복종시킬 수 있는 것은 그 권력이 크고 지위가 높기 때문이다.
요(堯)가 필부에 불과했다면 세 사람도 다스리지 못하였을 것이며,
걸(桀)도 천자였기에 능히 천하를 어지럽힐 수 있는 것이다.
이로써 세위(勢位 - 세력과 지위, 처한 상황논리를 이르고 있음.)야말로 의지할 만한 것이며,
현지(賢智 - 현명함과 지혜)는 선망할 만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무릇, 쇠뇌(弩)가 약하면서도 화살이 높이 나르는 것은,
바람을 타고 오르기 때문이다.
그 몸이 어리석지만 다른 사람을 명령할 수 있는 것은,
여러 사람의 조력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요가 노예에게 가르침을 주려한다면 아무도 들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천하의 왕이 되어 명령하면 실행되고, 금한즉 그치게 된다.
이로 보건데,
현지(賢智)는 사람들을 복종시키기에 부족하지만,
세위(勢位)는 현자까지도 굴복시키기에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難勢
慎子曰:「飛龍乘雲,騰蛇遊霧,雲罷霧霽,而龍蛇與螾螘同矣,則失其所乘也。賢人而詘於不肖者,則權輕位卑也;不肖而能服於賢者,則權重位尊也。堯為匹夫不能治三人,而桀為天子能亂天下,吾以此知勢位之足恃,而賢智之不足慕也。夫弩弱而矢高者,激於風也;身不肖而令行者,得助於眾也。堯教於隸屬而民不聽,至於南面而王天下,令則行,禁則止。由此觀之,賢智未足以服眾,而勢位足以詘賢者也。」
2.
신자의 이런 말에 대하여 어떤 이가 반론을 제기한다.
“비룡(飛龍)이 구름을 타고, 등사(騰蛇)가 안개를 노닌다.”
나는 비룡과 등사가 구름이나 안개의 힘에 의탁하지 않는다고 하지는 않겠다.
허나 현명함을 버리고 오로지 세위에만 의지하여,
과연 천하를 족히 다스릴 수 있겠음인가?
나는 아직 그런 예를 본 적이 없다.
무릇 구름과 안개라는 세위가 있더라도,
그것을 타고 나를 수 있음은 비룡이나 등사에 능히 그럴 만한 우수한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구름이 아무리 두텁더라도 지렁이는 이를 타지 못한다.
안개가 아무리 짙더라도 개미는 그를 타지 못한다.
짙은 구름과 안개가 있더라도 그것을 타고 나를 수 없는 것은,
지렁이나 개미의 재주가 박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걸이나 주가 남면하여 천하의 왕이 되고, 천자의 위세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천하가 어지러운 것을 면치 못하는 것은,
걸, 주가 재목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면 요가 천하를 다스렸다는 세위와
걸이 천하를 어지럽혔다는 그 세위에는 무슨 차이가 있는가?
무릇 세위라는 것은 현명한 사람만이 이용하고,
어리석은 사람이 이용하지 못한다는 것은 아닐 것이다.
현명한 사람이 그것을 이용하면 천하를 다스려지고,
어리석은 사람이 그것을 이용하면 천하는 어지러워지는 것이다.
인간의 성정을 살펴볼 때, 현명한 사람은 적고 어리석은 사람은 많다.
게다가 세위로써 세상을 어지럽히는 어리석은 사람을 도우면,
세위로써 천하를 어지럽히는 사람이 많아지고,
세위로써 천하를 다스리는 사람은 적어질 것이다.
무릇 세위라는 것은 세상을 다스리는 사람에게도,
또는 어지럽히는 사람에게도 편한 것이다.
그러므로 주서(周書)에서도 이리 이르고 있다.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주지 마라. 마을에 뛰어들어 사람을 잡아먹을 것이다.’
무릇 어리석은 사람이 세위를 이용하면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격이 될 것이다.
걸, 주는 높은 대와 깊은 연못을 만드는데 백성의 힘을 다하게 하고,
포락의 형으로써 백성을 죽였다.
걸, 주가 이리 악행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왕의 세위란 날개를 달아주었기 때문이다.
걸, 주가 필부에 불과하였다면,
단 하나의 나쁜 짓을 하기도 전에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세위라는 것은 호랑이의 마음을 길러 난폭한 일을 성취시키는 것이고,
그것은 천하의 큰 근심거리가 된다.
세위라는 것이,
잘 다스려진다든가, 어지러워진다든가 하는 것은,
본시 어떤 정해진 위치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함에도 세위에 따라 천하를 족히 다스릴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그 지혜가 너무 천박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무릇, 양마와 튼튼한 수레가 있더라도,
그것을 노예에게 맡기면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그러나 왕량(王良)에게 몰게 하면 하루에 천리라도 갈 수 있다.
마차는 다를 바 없음인데,
혹은 천리를 가고, 혹은 웃음거리가 된다.
이는 그 기술이 교묘함과 졸렬함이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라를 수레에 견주고, 세위를 말에 견주고,
호령은 고삐에 견주고, 형벌은 채찍에 견주며,
마부를 요, 순에 견준다면 천하는 잘 다스려지는 것이다.
반대로 마부를 걸, 주에 견준다면 천하는 어지러워 질 것이다.
이는 현명함과 어리석음이 서로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무릇 빨리 몰아 멀리 가려고 하면서,
왕량에게 맡기지 않는다든가,
이익을 꾀하고 해를 제하려 하면서,
현명한 사람에게 맡기려 하지 않는다면,
이는 곧 이런 이치를 모르는 소이라 하겠다.
요, 순도 역시나 백성을 다스리는 왕량인 것이다.
應慎子曰:飛龍乘雲,騰蛇遊霧,吾不以龍蛇為不託於雲霧之勢也。雖然,夫釋賢而專任勢,足以為治乎?則吾未得見也。夫有雲霧之勢,而能乘遊之者,龍蛇之材美也。今雲盛而螾弗能乘也,霧醲而螘不能遊也,夫有盛雲醲霧之勢而不能乘遊者,螾螘之材薄也。今桀、紂南面而王天下,以天子之威為之雲霧,而天下不免乎大亂者,桀、紂之材薄也。且其人以堯之勢以治天下也,其勢何以異桀之勢也,亂天下者也。夫勢者,非能必使賢者用已,而不肖者不用已也,賢者用之則天下治,不肖者用之則天下亂。人之情性,賢者寡而不肖者眾,而以威勢之利濟亂世之不肖人,則是以勢亂天下者多矣,以勢治天下者寡矣。夫勢者,便治而利亂者也,故《周書》曰:「毋為虎傅翼,將飛入邑,擇人而食之。」夫乘不肖人於勢,是為虎傅翼也。桀、紂為高臺深池以盡民力,為炮烙以傷民性,桀、紂得乘四行者,南面之威為之翼也。使桀、紂為匹夫,未始行一而身在刑戮矣。勢者,養虎狼之心,而成暴亂之事者也,此天下之大患也。勢之於治亂,本末有位也,而語專言勢之足以治天下者,則其智之所至者淺矣。夫良馬固車,使臧獲御之則為人笑,王良御之而日取千里,車馬非異也,或至乎千里,或為人笑,則巧拙相去遠矣。今以國位為車,以勢為馬,以號令為轡,以刑罰為鞭筴,使堯、舜御之則天下治,桀、紂御之則天下亂,則賢不肖相去遠矣。夫欲追速致遠,不知任王良;欲進利除害,不知任賢能;此則不知類之患也。夫堯、舜亦治民之王良也。
3.
또 어떤 이는 이리 말한다.
신자는 세위에 의지하면 족히 다스릴 수 있다 하였다.
이를 반대하는 어떤 이는 필히 현명한 사람을 기다려서야 다스릴 수 있다 하였다.
하지만 이는 모두 잘못된 생각이다.
무릇 세위란 이름은 하나이지만 무수히 많은 뜻을 갖고 있다.
세위가 자연적인 것이라면 굳이 말할 필요는 없다.
내가 여기서 거론하는 세위란 사람이 만들어내는 것을 가리킨다.
이제들 말하길,
요, 순이 세위를 얻어 나라를 다스리고,
걸, 주가 세위를 얻어 어지럽혔다라고 한다.
나 역시 요나 걸이 아니 그렇다고 여기진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 하여도 이는 사람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무릇 요, 순이 태어날 때부터 왕의 자리에 있었다면,
비록 걸, 주가 열이라도 나라를 어지럽힐 수 없을 것이다.
이는 세위가 이미 다스려지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무릇 걸, 주가 태어날 때부터 왕의 자리에 있었다면,
비록 요, 순이 열이라도 나라를 다스릴 수 없을 것이다.
이는 세위가 이미 어지럽히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고로,
‘세위가 다스려지게 되어 있으면 어지럽힐 수 없으며,
세위가 어지럽히게 되어 있으면 다스릴 수 없다.’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자연의 세위이며 사람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세위는 사람이 만들어낸 것을 말할 따름이니,
어찌 현인을 요하겠는가?
무엇을 가지고 그러하다는 것을 밝힐 수 있는가?
사람 가운데 창과 방패를 파는 자가 있었다.
방패가 단단함을 자랑하여,
‘어떤 물건도 뚫을 수 없다’고 말하였다.
그리고는 또 한편 창을 자랑하여,
‘창이 날카로워 어떤 물건도 뚫지 못하는 것이 없다’라고 말하였다.
한 사람이 이를 보고 말하길,
‘너의 창으로 너의 방패를 뚫는다면 어떻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러자 그 사람은 대꾸를 하지 못하였다.
뚫을 수 없는 방패와 뚫지 못할 것이 없는 창은 명목상 함께 양립하지 못한다.
무릇 현인의 위세는 금할 수 없으며,
세위의 길이란 금하지 않는 것이 없다.
금할 수 없음과 금하지 않는 것이 없음의 논리는 곧 이 모순의 논리와 같다.
대저 현인과 세위는 서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또한 요, 순, 걸, 주는 천년 만에 한 번 태어난다 하여도 언제고 또 나타난다.
세상의 통치자는 중질 정도가 끊이지 않고 나타난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 중질 정도이다.
중질 수준은 위로는 요, 순에 미치지 못하지만,
아래로 역시 걸, 주도 되지 않는다.
법을 지키고 세위에 있으면 다스려지고,
법을 어기고 세위를 버리면 어지러워진다.
만일 세위를 버리고 법을 어기면,
요, 순을 기다려 요, 순이 나타나면 이내 다스려지지만,
이는 천년 어지러워졌다가 한 번 다스려지는 격이 된다.
만일 법을 지키고, 세위에 있으면,
걸, 주를 기다려 걸, 주가 나타나면 이내 어지러워지지만,
이는 천년 다스려졌다가 한 번 어지러워지는 격이 된다.
또한 천년 다스려졌다가 한 번 어지러워지는 것과,
한번 다스려졌다가 천년 어지러워지는 것은,
마치 빠른 말을 타고 반대로 달리는 것과 같아 서로 차이가 크다.
무릇 굽은 나무를 바로 잡는 기구와 같은 법을 버리고,
길이를 재는 자의 칫수를 버린다면,
혜중(奚仲)으로 하여금 수례를 만들게 하여도 단 하나의 바퀴도 만들 수 없을 것이다.
상을 주어 권장하는 바 없고, 형벌의 위엄도 없이,
세위를 놔버리고 법을 포기하면,
요, 순이 집집이 설득하고 사람을 변설로 꾀어도,
세 집조차 다스릴 수 없을 것이다.
무릇 세위의 쓰임이 유용하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러함인데도 필히 현자를 기다려야 한다고 함은,
역시나 그렇지 않다고 보아야 한다.
또한 백일 동안 먹지 않고 좋은 양식과 고기를 기다린다면,
굶은 자가 살지를 못한다.
이제 요, 순과 같은 현인을 기다려 지금의 백성을 다스리려 한다면,
이는 마치 좋은 양식과 고기를 기다리느라 굶주림을 구한다는 이야기와 같다.
‘무릇 좋은 말과 튼튼한 수레라도 노예가 몰면 남의 웃음거리가 되지만,
왕량이 그것을 몰면 하루에 천리를 달린다.’라고 하였으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무릇 월나라 사람 중에서 헤엄을 잘 치는 사람을 기다려서,
중국의 물에 빠진 자를 구한다면,
월나라 사람이 헤엄을 잘 친다하여도,
물에 빠진 자를 건져내지 못할 것이다.
무릇 옛날의 왕량을 기다려,
지금의 말을 부린다면,
이 역시 월나라 사람을 기다려 물에 빠진 이를 구한다는 이야기와 같다.
이는 불가함이 분명하다.
무릇 좋은 말과 튼튼한 수레를 오십 리마다 하나씩 두고,
중질의 마부로 하여금 부리도록 하면,
빠른 것을 쫓고 멀리 이르고자 함을 가히 이룰 수 있어 하루에 천리에 이를 수 있다.
어찌 옛날의 왕량을 기다리겠는가?
또한 말을 모는데 왕량을 시키지 않으면 반드시 노예를 시켜 실패할 것이며,
나라를 다스리는데 요, 순을 시키지 않으면,
반드시 걸, 주를 시켜 어지럽힐 것이라 한다.
이는 맛이란 엿과 꿀이 아니면,
필히 고들빼기나 미나리라고 하는 것과 같다.
이는 변설을 거듭 늘어놔 이치를 여의고 법술을 잃어,
양극단의 논의에 빠졌다 하겠다.
어찌 비난하려고 도리에 어긋난 말을 하겠는가?
저 사람의 논의는 내 의론에 미치지 못한다 하겠음이다.”
復應之曰:其人以勢為足恃以治官。客曰「必待賢乃治」,則不然矣。夫勢者,名一而變無數者也。勢必於自然,則無為言於勢矣。吾所為言勢者,言人之所設也。今日堯、舜得勢而治,桀、紂得勢而亂,吾非以堯、桀為不然也。雖然,非一人之所得設也。夫堯、舜生而在上位,雖有十桀、紂不能亂者,則勢治也;桀、紂亦生而在上位,雖有十堯、舜而亦不能治者,則勢亂也。故曰:「勢治者,則不可亂;而勢亂者,則不可治也。」此自然之勢也,非人之所得設也。若吾所言,謂人之所得勢也而已矣,賢何事焉?何以明其然也?客曰:「人有鬻矛與楯者,譽其楯之堅,物莫能陷也,俄而又譽其矛曰:『吾矛之利,物無不陷也。』人應之曰:『以子之矛陷子之楯何如?』其人弗能應也。」以為不可陷之楯,與無不陷之矛,為名不可兩立也。夫賢之為勢不可禁,而勢之為道也無不禁,以不可禁之勢,此矛楯之說也;夫賢勢之不相容亦明矣。且夫堯、舜、桀、紂千世而一出,是比肩隨踵而生也,世之治者不絕於中。吾所以為言勢者,中也。中者,上不及堯、舜,而下亦不為桀、紂。抱法處勢則治,背法去勢則亂。今廢勢背法而待堯、舜,堯、舜至乃治,是千世亂而一治也。抱法處勢而待桀、紂,桀、紂至乃亂,是千世治而一亂也。且夫治千而亂一,與治一而亂千也,是猶乘驥駬而分馳也,相去亦遠矣。夫棄隱栝之法,去度量之數,使奚仲為車,不能成一輪。無慶賞之勸,刑罰之威,釋勢委法,堯、舜戶說而人辯之,不能治三家。夫勢之足用亦明矣,而曰必待賢則亦不然矣。且夫百日不食以待粱肉,餓者不活;今待堯、舜之賢乃治當世之民,是猶待粱肉而救餓之說也。夫曰良馬固車,臧獲御之則為人笑,王良御之則日取乎千里,吾不以為然。夫待越人之善海遊者以救中國之溺人,越人善游矣,而溺者不濟矣。夫待古之王良以馭今之馬,亦猶越人救溺之說也,不可亦明矣。夫良馬固車,五十里而一置,使中手御之,追速致遠,可以及也,而千里可日致也,何必待古之王良乎!且御,非使王良也,則必使臧獲敗之;治,非使堯、舜也,則必使桀、紂亂之。此味非飴蜜也,必苦萊亭歷也。此則積辯累辭,離理失術,兩末之議也,奚可以難,失道理之言乎哉!客議未及此論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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