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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득권

소요유 : 2012. 9. 11. 21:44


김진홍 목사.

이 분이 한 때 빈민 구제 활동을 하였는가 보다.
한 때라고 써놓고 보니 송구하다.
비록 한 때일지라도 그리 생심(生心)내어 아름다운 일을,
어찌 잊거나 폄하할 수 있으리오.

하지만 인생유전이라,
이 분이 요즘엔 참으로 요상한 모습이라,
나로선 더는 관심이 없다.
이 분에 대한 최근 활동은 다음 링크를 참고하기로 하고,
( http://h21.hani.co.kr/arti/cover/cover_general/29143.html )
이 자리에서는 이 분이 말씀하신 이야기 하나를 꺼내본다.

빈민 구휼 활동을 할 때,
구휼미인지 구휼 밀가루분인지를 정기적으로 빈민에게 나눠주었는가 보다.
그런데 어느 날 이를 나눠주지 못할 사정이 생겼다.
해서 걸렀는데 이를 참지 못하고 이들이 나서서는,
왜 이번엔 주지 않느냐고 김목사에게 따졌다고 한다.

보지 않아도 빤히 그 장면이 읽히운다.
개중엔 얼굴을 붉히고, 삿대질을 하는 인간이 왜 아니 없겠는가?

이것은 완전히,
물에 빠진 이를 건져내었더니,
내 보따리를 왜 아니 건졌느냐며 나무라는 형국인 게라.

그런데,
나는 저리하는 저들을 나무라고 싶지도 않다.

기왕에 하는 일,
왜 아니 철저하지 못하여,
뭇사람의 신임을 져버릴 수 있음인가?

이미 얻어 든 떡인데,
이게 제 손에 돌아오지 않으면,
그 상실감이란 그 누구라도 제법 크지 않으리?

그런데.
바로 이 지점.
김목사를 탓하려는 순간.

우리는 멈춰 설 수는 없을까?
나아가려다 잠간 주춤이며 멈출 수 있는 양심(良心)의 한 오락 실 터럭.
나는 이를 염치(廉恥)라고 부른다.

이런 염치가 내 가슴 속에서 스믈스믈 비져나오면,
혹 일어나는 서운함을 거둬 기어이 나아가길 멈출 수밖에 없다.

김목사가,
책임을 지어야 하는 귀책자(歸責者)인가?
고마운 시혜자(施惠者)였는가?
이런 가늠을 바로 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게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다면,
두 가지를 의심하여야 한다.

하나는 저들이 염치가 없거나,
아니면 김목사가 남으로부터 널리 모금을 하여,
개인적으로 착복하고 이를 저들에게 나누지 못하였는가?
당시로선 김목사가 절대 그럴 위인이 아니었다고 나는 믿는 것은 물론,
빈자를 돌보는 아름다운 이였다고 기억한다.

헌즉,
저들 빈자들은 참으로 염치없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미 손아귀에 거머쥔 떡은 네 것이 아니고 내 것인 것임이라.
기득권(旣得權)이란 염치가 거세된 현장임을,
저들은 이토록 여실히 그 실상을 증언하고 있는 것이 아니어든?

군부대로부터 무단 점유된 토지를 최근 회수하였다.
이에 앞서 부대가 이전되자 나는 회복될 토지와 도로 사이에,
돌들을 늘어놓아 외부인에게 이곳이 사유지임을 널리 고지하였다.

이로부터 오늘까지 근 2개월이 지나고 있다.
그동안 별 일이 다 벌어졌다.
야밤에 나타나 술 처먹고 난동을 부리며 돌을 치우라는 작자 하나.
도저히 말로 해결할 수 없어 경찰을 불러 조치하였다.
짐작컨대 동행인 중 운전수는 음주운전 상태였을 것이다.
저 치가 그리 난동을 피우는데도 차에서 내리지 않고,
꼼짝도 하지 않더니만 길이 풀리자 저 치를 내버려두고 그냥 도망을 가버린다.
경찰이 바로 그 뒤에 도착하였기에 망정이지,
아니면 저들은 적지 아니 댓가를 치러야 했을 것이다.

전곡읍장은 도로 우측 토지는 포장이 된 곳이기에 나 보고 손을 대지 못한다고 윽박질렀다.
전곡읍 산업팀장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막말을 해대며 거의 무아지경을 달려나갔었다.
저들은 나를 마치 무지렁이 촌부를 다루듯 강압하여 제 욕심을 채우려 들었다.
(※ 참고 글 : ☞ 2012/08/08 - [소요유] - 천지불인(天地不仁))

어림없는 짓이다.

지들 같으면 행여나 자신의 땅을 단 한 치라도 내놓았을 터인가?
댓가도 없이 남의 사유재산을 내놓아라 말아라 할 권리가 있음인가?
행여라도 어르고 달래며 할양, 양해주셨으면 한다고 정중히 청을 넣는 것도 아니고,
감히 지들이 무엇이관대,
저리 안하무인 불한당 짓을 태연히 저지를 수 있음인가 말이다.
저들은 공무 담임, 수권자의 역할을 하기엔 사뭇 미심쩍은 바가 그 도를 넘는다 하겠다.

내가 저들의 행악질을 군, 도 감사실에 알려 정식으로 문제를 제기하려 하였으나,
조금 시간을 두고 하회를 두고 보자 하며 참아 두고 있었다.
내가 글을 잘 짓지는 못하지만,
명명백백 내가 옳고 상대가 그를 경우엔,
나의 글은 그저 글이 아니고 칼과 매 한가지다.
한 번 내가 글을 쓰게 되면 그것은 양심을 겨누는 예리한 칼에 다름 아니다.

파사현정(破邪顯正)
그릇된 사법(邪法)을 깨고 정법(正法)을 펴는데는 역시나 칼이 제격이다.
하지만, 내 글은 칼보다 곱은 더 예리하리라.
나는 내 자신보다 내 글을 더 믿는다.
예전에 겪고 치룬 일로 미루어 나는 내 글을 신뢰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산업팀장이 청하여 나온 군청 직원 세 명이,
저희로선 더 이상 조치할 일이 없어서 돌아가겠다고 하며 물러난 이후,
읍에선 근 한 달이 지나고 있지만 아직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그 동안은 일주일이 멀다하고 찾아와,
암상이 나서 포달을 부리던 작자가 군청 직원한테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근 한 달이 지나도록 찾아오질 않는다.
내가 다행인 것이 아니라,
저 자가 운수가 좋았음이라,
한 번만 더 건드리면 내 기필코 끝장을 내려 하였던 바임이라.

내, 사진을 여기 배설하면서,
사정을 짚어가 보기로 한다.

(농원에서 건너편 부대 점유지였던 곳을 쳐다보다.
 전일은 점유회복에 따라 복토하기 위해 흙무더기를 쌓아두었다.)

가운데 도로도 우리 땅,
현재 농원이 들어선 왼 편도 우리 땅,
그리고 오른쪽이 부대가 점유하였던 우리 땅이다. (아래 사진 기준)

이제 부대가 떠나가자,
나는 그 점유지와 도로 경계 사이에 임시로 돌을 듬성듬성 놓아두었다.
이제부턴 여기 토지에 대해 본래의 소유자가 권리 행사하겠다는 것을,
널리 알리고자 하려 함이었다.
그러자니 별 각다귀 패들이 나타나 갖은 행패를 다 부렸었다.

가운데 도로조차 우리 땅인데,
이를 막은 것도 아니요 개방하여 뭇 사람들의 통행을 여전히 인용(忍容)하였음이다.
막말로 저 도로도 사람 통행만 할 정도로 열어두고,
나머진 다 막아도 법적으로는 아무런 하자가 없다.

그러함인데,
전곡읍장은 말하길,
사진에서 흙더미 쌓아놓은 곳이 포장이 되었으니,
나 보고 손을 댈 수 없다고 이른다.
도대체 이 자가 행정법이라든가 최소한 민법이라도 공부를 한 적이 없지 않은가 말이다.
그러고도 읍장의 소임을 다 할 수 있음인가?
저게 어찌 공중의 이용에 공하기 위해 포장이 된 것인가?
다만 부대에서 자신들의 들고 남에 편리하도록 즉 전용(專用)으로 포장한 것이 아니던가?
게다가 부대 측은 잘못된 점유임을 알고 자진하여, 
원상회복하여 곱게 돌려주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가운데 (현)도로를 내가 막았다면,
일응 내게 와서 불평을 할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전혀 이와는 무관한 토지가 아닌가 말이다.
그러함에도 저리 막가는 말을 토해내고도 저 자가 읍장 노릇을 제대로 다 할 수 있겠음인가?

(저 안쪽으로는 10여 장(丈) 남짓 제법 깊다.
도대체가 전곡읍장은 낮도깨비도 아니고 멀쩡한 사유지를 두고 손을 대지 못한다고 으름짱을 놀 수 있음인가?
나는 이 분의 행정 담임 능력을 부쩍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내 오늘 보차경계석(步車境界石)도 도로에서 사뭇 물러나 저리 설치하였다.
저리 설치해놓고 보니 아연 우측 저곳이 전혀 다툴 여지가 없는 것이 확연하지 않은가?

(점유회복된 토지. 연 나흘 간 공사를 하여 가까스로 원상회복하였다.)

내 여기 시골에 와서 촌무지렁이, 양아치들의 텃새 때문에 매양 치가 떨렸다.
그런데 이를 계도하고 이끌 위치에 있는 행정 담임 공무원들,
역시 저들과 한 치도 다름이 없지 않은가 말이다.

내가 이 번엔 하회를 한 번 지켜보자 하다가,
하루 이틀 시나브로 근 한 달이나 시간이 흘러가 버려 결국 지난 일이 되어 그냥 넘긴다.
허나 또 한 번 일이 벌어지면 아마 저들은 된 고생을 자초(自招)하여야 할 것이다.
 
도대체가 촌구석은 인걸은 없고 기껏 남겨진 이들은 촌스럽고 용렬하기 그지없다.
그 누가 말하였는가?
시골 사람이 인심이 곱고 아름답다고.
다른 곳은 내 몰라도 여기는 전혀 아닌 것 같다.

나는 사실 좋은 인심을 바라지도 않는다.
나 역시 인심을 남에게 평가 받기를 원하지 않듯이,
저들을 내가 재고 따지고 하고 싶지 않다.

다만 옳고 그름 앞에선 나는 한 치도 물러설 수 없다.
명명백백 뻔한 이치 앞에서 내가, 아니 모든 이가,
굽힐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옳은 이가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것처럼 용서가 아니 되는 일이 없다.
나와 설혹 원수지간이라도,
그가 옳다면 그른 상대를 나무라면 나무랐지,
원수를 그르다고 편을 가르진 못하는 것.

이리 시시비비가 명확한 이후라야,
인심을 논하려면 논할 것이지,
경우 없고, 막무가내, 형편무인지경으로들 살아가면서,
무슨 잘나 빠진 인심 운운하며 단작스럽게들 위선과 허세로 칠갑을 하려함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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