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진상(眞相)

소요유 : 2012. 8. 20. 14:46


“나를 높이려고 남을 천하게 하지 말고,
자기가 크기 위해 남을 업신 여기지 말며,
용맹을 믿고서 적을 가볍게 여기지 말지니라.”

"勿以貴己而賤人,勿以自大而蔑小,勿以恃勇而輕敵。"

(明心寶鑒 孝行篇)

어떤 곳에서,
올려진 이런 글 하나를 대하자니,
생각 하나가 떠오른다.

저 글의 제목이 "명심보감. 나를 높이는 법" 이리 되어 있는데,
기실 이 제목이 나를 더 이 자리로 이끌었다.
내용도 그러하지만 제목으로부터도 우선 풍기는 바,
조금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강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높은 지위에 이르러야 하는가?

그런데 기실 이런 물음을 제기하는 것 자체가,
이미 그 물음이 펴는 그물에 스스로 갇히는 것이 아닌가?

가령 “강한 사람이 되는 법”이란 제하(題下)의 글이 올라왔다 치자.
거긴 펼치지 않아도 뻔 한 이야기가 적혀 있을 것임이라.

즉 강하기 위해선 몸을 낮추어라든가 남을 낮추지 말라.
또는 높은 자리에 오르려면 낮은 자리에 임하라, 남을 높여라.

실천이 따르지 않아서 문제지만,
그리고 진부(陳腐)하기 짝이 없는 문법을 빌어 토해내고 있지만,
여전히 이 말은 제법 근사하게 들린다.

겸양의 말씀인 듯도 싶고,
처세술로서는 아주 훌륭해 보인다.
제법 착한 사람씩이나 되고 마는 자신에게 아주 흐뭇해지기까지 한다.
게다가 꿩 먹고 알 먹기라 강해지기까지 한단다.
과연 그것만으로 족한가?

이 이야기기의 중심은 무엇인가?
거죽으론 강약(强弱) 중에서 ‘약’이라든가,
고저(高低) 중에서 ‘저’를 이야기 하고 있는 양 싶지만,
실인즉 ‘강’과 ‘고’를 말하고 있는 게라.
그것도 아주 강하게 내면적으로 원망(願望)하고 있음이다.

되돌려 말하기.
원하는 바를 감추고,
에둘러감으로써 실인즉 제 원하는 바를 지향하길 꾀한다.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저 가르침은 아닌 척하자는 것이다.
약한 척 해야 강해지고,
낮은 척 해야 높아진다.
그러하니 강해지고, 높아지려면,
그 반대로 꾸미고 위장해야 한다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말이다.

만약 이 지적이 거슬린다면,
그럼 이리 묻고자 한다.
그대는 강/약이든 저 물음 앞에 답을 내려고 집착하고 있지 않은가?
그 답의 마지막은 무엇인가?
이 물음 이후 그대는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 것인가?
과연 그대가 꾀하고자하는 것은 약함인가?
구하고자 하는 바는 낮은 지위에 머무르고자 하는 것임인가?

어린 아이들이 흙장난을 한다.

“두껍아 두껍아, 헌집 줄께 새집 다오.”

저 앞의 말 뿐이 아니라,
명심보감에 즐비하게 쏟아내놓는 그럴싸한 말들은
바로 이런 경지가 아닐까?

'내가 싸고 헐한 것을 내놓을 테니까 넌 좀 더 나은 것을 달라.'

그런데 아마도 대개는 모두 아시는 말씀일 것이다.
즉, 이런 말씀은 어떠한가?

누가복음
“네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 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금하지 말라”

여긴 무엇인가 주고 취하겠다는 생각 자체가 아예 없다.

다만,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이런 식으로 신에게 보상을 미룬다.

불교의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에 이르르면,
아예 탈색, 기체화돼 버린다.
즉 베풀 되, 베푼다는 생각도, 보갚음도 기대하지도 않는다.
그러하기에 무주상 즉 어디 머물러 상을 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저 명심보감엔 보상을 꾀하고,
과연 짐작대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내가 그러하기에 늘 말하길,
‘명심보감은 술(術)일지니 결코 도(道)를 말하고 있지 않다.’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하기에 혹 그대가 술수를 배우고자 한다면 명심보감에 의지할 수 있을지언정,
도와 덕을 기르려면 다른 길을 찾아야 한다.

자, 다시 길을 돌려 조금 더 저 명심보감의 구조를 살펴보자.

무위자연을 노래하고 있다는 노자(老子)를 보면,
이런 따위의 글귀를 만나게 된다.

將欲歙之,必固張之;將欲弱之,必固強之;將欲廢之,必固興之;將欲奪之,必固與之。

빨아먹으려면 반드시 베풀어야 하고,
약하게 하려면 반드시 강하게 해주고,
피폐하게 하려면 반드시 흥하게 해주고,
빼앗으려면 반드시 주어라.

이쯤이면 노장이 무위(無爲)의 철학이란 세간의 평이 아주 무색해진다.
무위는커녕 유의(有爲)를 넘어 아주 음흉스럽기까지 하지 않은가 말이다.

사실 노장(老莊)의 도가(道家)에서 한 줄기 내리 흘러,
병가(兵家)가 이뤄지기도 한다.
병가는 도가와 등을 진 사이가 아니다.
이 둘은 안팎 짝을 이루고 있음이다.

그 증거를 여기 제시해본다.

故能而示之不能,用而示之不用,近而示之遠,遠而示之近。利而誘之,亂而取之,實而備之,強而避之,怒而撓之,卑而驕之,佚而勞之,親而離之。攻其無備,出其不意,此兵家之勝,不可先傳也。

고로 능하면서도 무능한 듯이 보이고, 쓸 만한데도 아니 그러한 듯 내보이며,
가까이 있으면서 멀리 있는 양 보이고, 멀리 있으면서 가까이 있는 양 보인다.
이로써 꾀고, 어지럽혀서 취하며,
실하면 대비하고, 강하면 피한다.
격분하여 있으면 구부러뜨리고, 의기소침해 있으면 교만하게 하고,
안락하면 피로하게 하고, 친하면 떨어져 나가게 한다.

그 방비가 아니 된 곳을 공격하고, 예상치 못할 때 나아가 친다.
이런 것들이 전쟁에서 이기는 바라,
그런즉 나아가지도 않고 미리 어쩌니 저쩌니 할 바가 없느니라.

손자병법에 나오는 말이다.
노자의 말씀과 그 달리고 있는 궤(軌)는 하등 차이가 없다.

그러함이니,
저 앞선 말.

“나를 높이려고 남을 천하게 하지 말고,
자기가 크기 위해 남을 업신여기지 말며,
용맹을 믿고서 적을 가볍게 여기지 말지니라.”

점잖은 듯 전하는 말씀인즉,
이게 유가(儒家)류의 도덕군자의 말씀이 아니다.
다만 싸움터에서 창칼을 휘두를 때나 써먹는 수법이란 게다.
실제 저 말을 내놓은 태공은 생몰간 시대를 무시한다면,
병가쪽 사람으로 분류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리 말씀을 드려도,
혹 아직도 이해가 아니 되는가 모르겠다.
그럼 저 말을 이리 뒤집어 보면 어떠할까?

“나를 높이려면 남을 천하게 하지 말고,
자기가 크기 위해선 남을 업신여기지 말며,
내 용맹을 믿으려면(의지하려면), 적을 가볍게 여기지 말지니라.”

사실 모든 한문을 이해한다는 것이 늘 그러하듯,
태공의 원래 저 말도 번역하기 나름이다.
생선 뒤집듯 이리 뒤척이나 저리 잦히나,
그 해석은 일정분 새기는 이의 몫으로 남겨져 있다.
나는 여기서 애초 처음 번역하신 분의 한글 번역을 기초로,
원문의 뜻을 잃지 않는 범위 내에서 약간씩 자반 뒤집기를 해보는 것이다.

그럼, 여기서 한 번 더 뒤집어 보겠다.

“남을 천하게 하지 않으면 내가 높아지고,
남을 업신여기지 않으면 내가 커지며,
적을 가볍게 여기지 않으면, 내 용맹이 제 값어치를 해서 적을 이긴다.”

나는 지금 저 말의 이면에 숨어 있는 의도내지는 욕망을 찾아내 본 것이다.
이를 선의(善意)으로든, 욕망으로든, 어찌 보든 상관없지만,
분명 앞 서 지적한 그러한 그림자가 드리어져 있지 않은가?
나의 역할은 저 글월 속, 아니 이를 두고 해석하는 이들의 가슴 속에 숨어 있는 바를,
나름 캐내어 본 것에 그친다.

옛날 아낙네들은 흑발(黑髮)을 빗어 내리는 것으로부터 새벽을 열었다.
아아, 아득하니 멀어진 정경이지만,
생각만 하여도 은은하니 곱구나.

그런데 간밤 서캐가 머리를 가렵힐 때가 있다.
이 때는 그냥 얼레빗으로 빗어서는 아니 된다.
가는 참빗으로 훑듯이 좍좍 빗어내려야 한다.
참빗으로 빗자,
세발(細髮) 가는 머리카락 올올은 마침 내려 쬐는 아침 햇살에 비춰
가는 삼베 올실처럼 살랑 바람결에 떤다.

흑발이 말 그대로 비단결 같으려면,
거기 서캐가 끼어 있어서야 되겠는가?

난 오늘,
저 글 앞에 기꺼이 참빗이 되고자 한다.

그러하기에,
저런 따위의 말씀은 마냥 취하여 맑고 향기롭다 할 수만 없다.
최소한 무엇인가 의도하는 바가 숨어 있는 만큼일지라도.

이 때라서야,
바로소 남에게 의지 않고 홀로 서서,
내 마음을 맑고 향기롭게 밝히울 수 있다. - 필요조건

저 말씀을 소비하는 것은 제 마음대로이지만,
혹여 무작정 고상한 말씀이라 여긴다든가,
좇겠다고 내심 다짐하는 자신 역시 제법 착한 노릇을 한다고 여겨도 좋은가?
나는 이리 의문을 던져 보는 것이다.

그러하다면,
과연 착하면서도 바르게 사는 길은 무엇인가?
(혹은 악하게, 그르게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리 물어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나에게 물을 것이 아니며,
남에게 답을 구할 것도 아니다.

다만 각자는 각자의 길을 걸어갈 뿐인 것임을.

촛불이 스스로를 태워 불을 밝히우지,
옆에서 타고 있는 촛불을 빌려 제가 밝다고 이를 수 있다든가?

부처가 말한 자등명(自燈明), 법등명(法燈明)에서
중심어는 자등명(自燈明) 하나 뿐이다.
법등명은 군더기에 불과하다.
법등명은 다만 절집 사람 밥값하라고 던져준 부처의 자비가 아닐까 싶다.
이 덕에 땡중도 먹고 살고 있음이니, 아니 그렇다 반론할 수 없으리라.
내 안에 법이 있는데 밖으로 무슨 법을 달리 구할 일이 있겠는가?

원래 자등명(自燈明), 법등명(法燈明)은,
자치연(自熾燃),치연어법(熾燃於法)이 변용되어 일반에게 알려진 것이다.
여기서 熾燃於法을 法熾燃이라 하지 않은 것은,
自와 다르게 法은 熾燃의 외적 객체가 되기 때문이다.
즉 自의 경우는 자기자신의 身, 受, 意를 觀하는 것이지만,
法은 자신 바깥의 존재를 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기사 法에 내외가 따로 있겠음이나,
글을 짓자니 방편상 주객을 이리 나눠 대상화한 것일 터이리라. 

이러하듯 자신 외에 별도로 법을 구할 일은 아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나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마라." 

이게 불교와 완전히 판이 다른 것이지만,
저기서 신을 나로 환치하면,
결국 자등명과 하나도 다를 바 없다.

"나외에 다른 나를 섬기지마라"

물론 이리 말하면 기교도들이 지나치게 불경스럽다고 야단을 치시겠지만.
나는 특정 종교를 믿고 있지 않다고 이르면,
조금 걱정을 덜 하실려나?
그래도 용서를 하실 수 없다면,
자등명을 신등명(神燈明)으로 바꾸어 내 글을 읽어주시면 되겠다.
  ( 기실 내가 보기엔 신등명(神燈明)은 법등명(法燈明)과 하등 다를 바 없다.
    여기서 法은 곧 진리 그 당체를 가리키고 있는 바임에랴. )
나는 이리하신다 한들 하등 이의가 없다.

끝으로 잊지 않도록 아래에 출전을 덧붙여둔다.

『 佛說長阿含經卷第二 』

是故,
阿難!當自熾燃,熾燃於法,勿他熾燃;當自歸依,歸依於法,勿他歸依。
云何自熾燃,熾燃於法,勿他熾燃;當自歸依,歸依於法,勿他歸依?

阿難!比丘觀內身精勤無懈,
憶念不忘,除世貪憂;觀外身、觀內外身,
精勤不懈,憶念不忘,除世貪憂。受、意、法觀,
亦復如是。是謂,阿難!自熾燃,熾燃於法,
勿他熾燃;當自歸依,歸依於法,勿他歸依。
佛告阿難:「吾滅度後,能有修行此法者,
則為真我弟子第一學者。」

그런고로,
아난이여!
마땅히 자기를 등불로 삼고, 법을 등불로 할 뿐, 다른 것을 등불로 하지 말아야 하느니.
마땅히 자기 스스로에게 의지하고, 법에 귀의할 뿐, 남에게 의지하지 않아야 하느니라.

이르길 그럼 어찌,
자기를 등불로 하고, 법을 등불로 하며, 다른 것을 등불로 하지 않는 것인가?
또한 마땅히 스스로에게 의지하고, 법에 의지하며, 다른 것에 의지하지 않는 것인가?

아난이여, 비구는 몸 안을 관(觀)함에 부지런히 힘써, 게으름을 부리지 않으며,
단단히 챙겨, 잊지 않으며, 세간의 욕망과 근심을 없앤다.
몸 밖과 몸 안팎을 관(觀)함에 부지런히 힘써, 게으름을 부리지 않으며,
단단히 챙겨, 잊지 않으며, 세간의 욕망과 근심을 없앤다.

受、意、法을 관(觀)함도 역시 이와 같으니,
아난이여,
또한 이와 같으니 이것을 이른바,
자신을 등불로 삼고, 법을 등불로 삼으며 그 외 다른 것을 등불로 삼지 않는 것이요.
마땅히 자기에게 의지하며, 법에 의지하며 다른 것에 의지하지 않는 것이라 하느니라.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이르신다.
「내가 열반에 든 뒤에 능히 이법을 수행하는 자는 곧 진실된 나의 제자이며,
제일 으뜸가는 배움에 (힘쓰는) 자가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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