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과 약사불
소요유 : 2013. 5. 20. 11:50
내가 모자란 성품이다 보니 본디 세간의 모임에 잘 끼질 않는다.
그런데 여기 시골에 와선 우연치 않은 인연으로 일편 망설이면서 한 모임에 들게 되었다.
어느 날 그 모임에 갔는데 테이블 위에 공연 포스터 한 장이 올려져 있었다.
여자가 웃통을 거의 벗고는 선정적인 모습으로 뒷태를 슬쩍 보여주고 있다.
백그라운드는 어두운 색조로 마스킹 처리가 되어 농밀한 야기(夜氣)가 자욱한데,
여인은 그를 배경으로 도발적 색향(色香)을 흩뿌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상단에 죽 나열된 홍보 표제어 중에 ‘힐링’이란 글자가 우쭐 우쭐 춤을 추고 있다.
한 동안 ‘웰빙’이란 말이 유행하더니만 ‘힐링’이란 말이 콩떡에 콩알 박혀 있듯,
우리네 삶 구석구석에 섞박혀 들어오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참으로 맹랑하지 않은가 말이다.
춤판으로 구경 오라는 홍보, 선전이라면,
‘재미있다든가’, ‘짜릿하다든가’, ‘놀랍든가’ 하며 그대 흥을 돋우게 하겠다면 족할 터인데,
지들이 도대체 무엇이관대 남을 고치겠단 말인가?
손객들이 모두 병든 이도 아닐 터인데,
감히 치료해주겠다고 대들 수 있음인가?
마음이 아픈 것도, 육신이 고장 난 것도 아니고,
다만 공연을 보고 한 바탕 웃고 떠들며 흥겹고자 찾아가는 이까지 싸잡아,
볼기 까, 주사 놓고 약 주며 고쳐주겠다고 주제넘게 나설 수 있는가?
꼴 같지 않고, 주제넘은 짓거리라 하지 않을 수 없음이다.
‘힐링’이란 말을 지친 심신을 위무해드리겠다는 정도로
일응 할인하여 새겨준다 하여도 사정은 변하지 않는다.
단 한 치라도 자존심을 가진 손님에겐 도시 마뜩치 않은 짓거리일 수밖에 없다.
(※ 참고 글 : ☞ 2012/11/06 - [소요유] - 웰빙과 힐링)
(※ 참고 글 : ☞ 2012/11/06 - [소요유] - 웰빙과 힐링)
저들은 말이 아니라 연출, 기예(技藝)로 내 흥을 돋기만 하면 된다.
그게 내게 위로가 되든, 힐링이 되든 그 무엇이 되든 간에,
그것은 내가 구매하고, 평가할 나름이지 저들이 참견할 영역이 아닌 것이다.
우리가 싸구려 대중음식점에 가서도,
곧잘 ‘맛있게 드세요.’란 말을 듣곤 하는데,
이것도 사뭇 엉터리인 것이다.
나중에, 내 혀로 맛있게 느끼든 아니든 간에 판명이 나는 것이지,
앞서, 저들의 말 부주(扶助)에 의해 달라질 까닭이 없다.
음식으로 말을 해야지 입으로 말을 해서는 아니 된다.
(※ 참고 글 : ☞ 2010/09/19 - [소요유] - '성불하십시오' 유감)
(※ 참고 글 : ☞ 2010/09/19 - [소요유] - '성불하십시오' 유감)
‘내 혀의 일에 주제넘게 참견하지 말라.’
마찬가지로,
‘내 눈의 일에 분수 벗어나 관여하지 말라.’
이런 말씀을 저 공연자들에게 건네주고 싶은 것이다.
서비스 공여/소비 그리고 평가 주체를 혼동하는 저들은,
장바닥 강매꾼내지는 야바위꾼 수준과 내용적으로는 별반 다를 것이 없다 하겠다.
그런데, 왜 요즘 세상 사람들은 ‘힐링’을 그리 즐겨 쓰는가?
나는 스스로에게 이런 물음을 던지자 불현듯 약사불(藥師佛)이 떠오르고 만다.
약사유리광여래(藥師琉璃光如來)
서방 극락정토엔 아미타불이 살고 계시지만,
동방 유리광토엔 약사여래가 살고 계시다.
일찍이 석가는 이 사바세계가 고해(苦海)라 했다.
삶은 고(苦)의 연속이고, 세상은 고해가 분명한데,
그 와중에서도 아미타불, 관음보살, 지장보살, 약사여래 등이 다투어 나투시며,
고통에 빠져 신음하는 중생을 위로하고 구제한다.
그러하다면, 참으로 다행인 노릇이라 일러야 하는가?
칭념(稱念), 칭명(稱名)
게다가 놀라운 것은 저들 부처를 다만 생각만 하여도, 명호를 외기만 하여도
나타나셔서 구해준다는 말씀이다.
아미타불 명호를 부절(不絶)하니 외며,
망자(亡者)를 서방 극락정토로 인도하는 모습을 장례식장에서 목도한 적이 있다.
필시 서방에 계신 아미타불을 불러 모셔내고도 남을 그 사무치는 간절함에,
내 온 몸의 솜털들이 일시에 일어나 바르르 떨며 주력(呪力)을 함께 빌어드렸다.
아닌 게 아니라 아미타불 위신력이 진정 그리 위대하다면,
명실이 각기 외로 틀어 나뉠 일이 없겠음이니,
명호를 외는 것만으로도 사무쳐 그 실질에 가닿지 않을 까닭이 없겠다.
대승불교에 들어와 이런 외력(外力)에 의지하는 불(佛)들이 부쩍 늘고,
보살도 정신을 강조하자, 불교는 아연 대자대비(大慈大悲)한 종교로 자리 잡게 된다.
약사불(藥師佛)은 일찍이 소위 12대원을 세웠다 하는데,
아미타불의 48대원도 그렇고 보살 시절 큰 원을 세우고,
나중에 깨우쳐 부처가 되는 형식을 밟는다.
이들 대원들은 내용적으로 별반 큰 차이가 없는데,
폐일언(蔽一言)하여 석가께서 설한 이 한 세상의 고통을 구제한다는 것이다.
약사불의 경우엔 특히 병신(病身), 병(病)이 없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원을 세우셔서,
중생들이 많이 귀의하여 기도를 드린다.
(※ 6.제근구족원(諸根具足願), 7.제병안락원(除病安樂願))
대구 팔공산 갓바위 부처도 약사불인데,
이 불상의 전형적인 특징인 손에 약합을 들고 계시다.
정녕 저로써 중생들의 아프고 고단한 심신을 치료함이시런가?
석가가 이 세상을 만드신 것은 아니로되,
마치 병 주고, 약 주듯,
세상의 고통, 환난으로부터 중생을 구하여 주신다는 것이니,
어찌 보면 참으로 얄궂기 짝이 없다.
자력으로 견성하여 부처가 되는 것이 벅찬 이는,
간단히 저들 부처에 의지하여 타력(他力)으로 단박에 성불 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닌가?
이게 과연 사실이라면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인가?
하지만 내 과문한 탓이겠지만,
타력으로 성불하였단 이를 혹간 하나 둘 들어는 보지만,
이 또한 자력만치 녹록치는 않은가 보다.
이 이중 복선 구조의 구제 형식은,
중생들에게 사뭇 길음(吉音)이라 일러야 할 터이지만,
어둠의 우물로부터 희망을 두레박질하는 동안 일시 위로가 될지언정,
그 마지막 성취는 실로 아득하니 멀리 있을 따름이다.
아마 대개는 속아 넘어가기 일쑤일 것이다.
그래도 저들은 포기하지 않는다.
중생의 명운이 그러하다.
고통이 깊은 만큼,
기도는 더욱 간절해진다.
다만, 명확한 것이 둘 있으니,
중생이 열심히 원력(願力)을 모아 기도하는 동안,
불단 앞에 놓인 복전함은 허전함을 메우고,
스님들은 공양미를 빌어 주린 배를 채운다.
지랄 맞은 상인들은,
엊그제까지만 하여도 아미타불도 아니면서 웰빙 상품을 안기더니만,
이젠 약사불도 아니면서 힐링해주겠다고 기염을 토하고 있다.
천하인들은 장사꾼 앞에 서면,
멀쩡한 사람도 어딘가 고장이 나 있어야 한다.
문득 편치 않아져, 웰빙 상품을 사야 하고,
불현듯 아파져, 힐링 상품을 구매하도록 강요되고 있다.
저들의 필요에 의해,
대중들은 자빠지고 엎어지며, 멍들고 아파야 한다.
아미타불, 지장보살, 약사여래 등불은
몇 겁을 건너 불법을 수행하고,
때론 중생을 위해 자진 불위(佛位)를 유보하기도 하며,
중생 구제의 대원을 세워나간다.
여기 무슨 대가 수수관계가 있겠는가?
그저 대자대비(大慈大悲) 저 뜨거운 보리와 자비심만 현현한다.
다만 부처님 전에 놓인 복전함만은,
누군가 그 주인이 있어 요긴한 데 쓰겠다며 거둬가겠지만.
오늘날,
힐링은 부재하나 장사치는 북적이고,
구원은 부재하나 기도불사는 끊임없다.
난 설혹 힐링이 필요하다한들,
장사치 수완의 노리개 완물(玩物)이 되고 싶지 않으며,
요령 흔들며 향불 지피어 올리는 법사의 제물로 전락되고 싶지도 않다.
어느 그믐 밤.
원력 돋우며 아낙들이 겁도 없이 산사를 향해 오른다.
달빛에 겨워,
고은 아미(蛾眉) 숙여,
소지(燒紙) 사르듯 스렁스렁 뱀길 따라 오르는 실루엣들.
저들을 쳐다보면 눈물이 난다.
그리고는 엄마가 떠오른다.
갓바위 부처님을 뵈려 새벽길을 돋아 오른 아낙들.
징그럽게도 덕지덕지 쌓이고 덮인 이승의 원망들이 겹다.
순간 젊디 젊은 짙은 화장(化粧) 하나를 보았다.
왠지 가슴이 울렁거린다.
낯 닦기도 벅찬 어둑새벽,
꾸며 차리는 저 정성이 갸륵하다.
눈물이 번진다.
나라도 아미타불, 지장보살, 약사여래, 유마힐은 왜 아니 되랴?
저 화장의 원력을 돕고 싶다.
이 때 나는 문득 보살이 된다.
육바라밀(六波羅蜜) 보살도를 행하는 중생 하나.
이 때, 화장과 나는 동시에 부처가 된다.
그로 인해 내가 깨우치고,
나로 인해 그가 (시름을) 벗는다.
아미타, 관음, 지장, 약사도,
필시 이런 아픈 홍분(紅粉) 하나를 만나고서야 원력을 세웠으리라.
유마힐(維摩詰)도 중생이 아프듯 자신도 아프시다 하지 않았던가?
일체 중생이 병에 드니, 이런 고로 나도 병이 들고,
일체 중생이 병에서 나으면, 내 병도 멸하리.
以一切眾生病。是故我病。
若一切眾生得不病者。則我病滅。
대승 보살도 실천행의 영원한 이상상(理想像)인 유마힐.
이 위대한 모습 앞에 서면 우리들의 ‘힐링’ 프로그램은 얼마나 어줍은가?
유상보시(有相布施)는커녕 주판을 숨겨 셈하며,
힐러 당신의 주머니를 불리려 중생을 동원하고 있질 않은가?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 그 어느 경계에도 끄달리지 않는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는 십항하사(十恒河沙等 佛土之外) 지나 먼 곳에 계신
서방, 동방 교주에게서만 가능한 일이 아니다.
누구나 자신이 서 있는 자리 사방 한 척 안에서부터 당금 시작할 노릇이다.
돌로 만든 갓바위 부처에 비는 것도 좋지만,
살아 숨쉬는 내가 우리 집 마당에서 스스로 부처가 되어야 한다.
원망을 일으켜 기도하고 불사를 일으킨다든가,
속셈 차리기 바쁘면서 주제넘게 힐링한다고 나서기에 앞서,
당장 네 집 마당부터 물 뿌리고 비로 쓸어 정성을 모아야 한다.
농부라면 농민대학에서 가르치듯 년 소득 일억 농가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할 것이 아니라,
당장 네 밭에 비닐 태우고, 제초제 퍼붓는 짓을 멈추고 땅을 정갈히 하는 것부터 출발하라.
정토(淨土)
수고롭게 서방 멀리 극락정토를 찾아 갈 일이 아니며,
동방 유리광토를 일구월심 사모할 노릇이 아니라,
당장 네 밭부터 깨끗이 하면 게가 곧 정토(淨土)임이니.
원(願),
왕생(往生) 서방 극락정토,
회향(回向) 동방 유리광토.
이것도 좋지만,
원(願),
현생(現生) 중앙 복덕정토.
쉬운 이 일부터 시작하라.
마지막으로, 내가 그날의 모임에서 소개하였던,
한비자(韓非子) 내저설 상(內儲說 上)의 이야기 한토막을 인용해둔다.
殷之法,棄灰于公道者斷其手,子貢曰:「棄灰之罪輕,斷手之罰重,古人何太毅也?」曰:「無棄灰所易也,斷手所惡也,行所易不關所惡,古人以為易,故行之。」
은나라의 법에 공도에 재를 버린 자는 그 손을 자른다고 한다.
자공이 여쭙다.
“재를 버린 죄는 가벼운데, 손을 자르는 벌은 무겁습니다.
옛 사람은 어찌 그리 엄한 것입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신다.
“재를 버리지 못하게 하는 것은 쉬운 일이며,
손을 자르는 것은 싫어 하는 것이다.
쉬운 일을 행하게 하여,
싫어하는 일에 걸려들지 않게 하는 일을 옛 사람들은 쉽다고 생각하였기에,
고로 그것을 행하였던 것이다.”
내가 이를 소개하면서 말 하나를 더 보태니 좌중은 실소를 금치 못하더라.
“마당, 밭 가리지 않고 비닐 태우는 패악스런 짓거리만 없어져도,
여기 촌무지렁이들의 나머지 행패는 얼마든지 견딜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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