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호박 단상(斷想)
소요유 : 2013. 9. 16. 09:45
슈퍼호박 단상(斷想)
여기 연천군은 해마다 호박 축제가 벌어진다.
각종 호박을 하우스 안에다 재배한 것을 전시하는데,
기기묘묘한 호박들이 다 모여 있다.
슈퍼호박이라 불리는 것은 크기가 여느 호박과 달라 무지막지하게 크다.
큰 수레에 하나 싣기도 벅찰 지경이다.
나도 한 때 초보 농부시절 저것에 혹하여, 심어볼 욕심이 일기도 하였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선뜻 놀라 그 마음을 거두며 급히 추스른 적이 있다.
암(癌)이란 무엇인가.
암은 한마디로 종양(腫瘍)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일반 종양과 다른 점은 이게 치명적이어서 생명을 위협한다는 점이다.
정상적인 세포나 일반 종양(양성)과 달리 암은 세포 성장이 조절되지 않는다.
전자는 일정한 크기가 되면 더 이상 성장하지 않지만,
암은 조절이 되지 않고 계속 증장(增長)하게 된다.
팽창조대(膨脹粗大)
이게 혹이든 종양이든, 암의 모습이다.
슈퍼호박이란 것도 어떠한 이유로 세포 성장이 그치지 않고 장달음친 것이 아닌가?
이런 의문이 들었던 것이다.
다행이 가을 서늘한 기운을 맞자 그 짓을 하기 어려워졌기에 망정이지,
아니 그렇다면 그 욕심의 끝을 아지 못하였을새라.
물론 생물학적으로 저것이 세포 크기가 커져가기 때문이 아니라,
다만 세포 수가 많아서 저리 커진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진실이 어떠하든,
나는 저것의 모습으로 추단하건데,
필시 ‘팽창조대(膨脹粗大)’의 본성이 어딘가에 숨겨져 있다고 의심한다.
나는 이를 ‘팽창조대소(膨脹粗大素)’라 부르기로 한다.
양(量)이든 수(數)든 염치없이 크고 많은 것을 탐내단 기어이 탈이 나고 만다.
이것은 사뭇 삿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대저 멈추고 삼갈 줄 모른다면,
이를 어찌 예(禮)를 안다고 할 수 있겠음이며,
의(義)롭다 할 수 있음인가?
나는 블루베리의 경우에도 대과를 향한 개량(?) 경쟁도 어느 선에서 그쳐야지,
도를 넘게 되면 무서운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염려한다.
가령 자두만한 블루베리가 만들어졌다면,
거긴 필시 팽창조대소(膨脹粗大素)가 숨겨져 있을 것이다.
이런 것을 사람이 먹게 되면,
어찌 우리들의 세포라 한들 편안하리요.
과연 이것을 개량(改良)이라 불러도 괜찮은가?
개악(改惡)이라 하여야 마땅하지 않은가?
과연 이런 내 생각을 뼛속까지 깊이 자본에 복속된 오늘 날의 사람들이 용히 받아들일 수 있음인가?
과연 이것을 개량(改良)이라 불러도 괜찮은가?
개악(改惡)이라 하여야 마땅하지 않은가?
과연 이런 내 생각을 뼛속까지 깊이 자본에 복속된 오늘 날의 사람들이 용히 받아들일 수 있음인가?
요즘은 슈퍼호박뿐이 아니다,
슈퍼복분자, 슈퍼오디, 슈퍼대추, 슈퍼매실 ....
온갖 식물 앞엔 가리지 않고 슈퍼란 장식어가 달라붙어 있다.
이 말을 앞잡이로 세우지 않으면,
도대체가 장사가 되지 않는 사나운 세상이 된 것이다.
(내 언제 기회가 닿으면,
슈퍼 식물을 탄질율에 비추어 내 생각을 펼쳐보고 싶다.
조사하지 않아도 필경 슈퍼식물은 탄소보다 질소분이 많을 터인데,
그 이치를 밝혀보려는 것이다.)
이 말을 앞잡이로 세우지 않으면,
도대체가 장사가 되지 않는 사나운 세상이 된 것이다.
사람의 경우에도 덩치가 큰 사람 정도는 봐줄 수 있지만,
이게 정도를 넘어 거인 수준으로 넘어가면,
여긴 필시 ‘팽창조대소(膨脹粗大素)’가 유전적 또는 생리적으로 작동을 하고 있음이니,
이를 어찌 병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음인가?
슈퍼 너무 좋아하다 병든다.
우리가 깊은 산속 옹달샘에서 길은 물을 약수(藥水)라고 이른다.
산속에서 돌보지 않고 절로 자란 토종밤을 우리는 약밤이라고 말하곤 한다.
아프고 병이 들었을 때,
약밤을 삶아 찻수저로 한 술 두 술 떠먹으면 몸이 풀리고 마음까지 편안해진다.
우리네 아낙네들은 자정 밤에 우물을 길어 정한수라 이르며,
장독대 위에 바치고는 집안의 안녕을 빌었다.
(※ 참고 글 : ☞ 2008/02/27 - [소요유] - 야반삼경(夜半三更) 문빗장 - 자정수(子正水))
제 잘났다고 그리 길길이 치닫던 이들도,
다치고 깨져 아파 돌아와서는 어머니가 주시는 약밤, 약수 앞에서 마음을 누이고 쉰다.
환고향(還故鄕)
그 마음의 옛 고향으로 들어가 안겼음이다.
아프고 병이 들었을 때,
약밤을 삶아 찻수저로 한 술 두 술 떠먹으면 몸이 풀리고 마음까지 편안해진다.
우리네 아낙네들은 자정 밤에 우물을 길어 정한수라 이르며,
장독대 위에 바치고는 집안의 안녕을 빌었다.
(※ 참고 글 : ☞ 2008/02/27 - [소요유] - 야반삼경(夜半三更) 문빗장 - 자정수(子正水))
제 잘났다고 그리 길길이 치닫던 이들도,
다치고 깨져 아파 돌아와서는 어머니가 주시는 약밤, 약수 앞에서 마음을 누이고 쉰다.
환고향(還故鄕)
그 마음의 옛 고향으로 들어가 안겼음이다.
약(藥)으로 병을 고친다.
‘팽창조대소(膨脹粗大素)’ 이게 꼭이나 물질일 까닭도 없다.
마음이, 정신이 이리 욕심을 내어 장달음을 치고 있을 때,
우리는 가끔씩 멈춰 서서 자신이 내딛고 사는 땅을 살펴보아야 한다.
마음속에 암을 기르고 있는가?
아니면 약을 모시고 있음인가?
(허나, 약이란 본디 편급된 것이라, 조심히 다루어야 한다.
밖으로 외사(外邪)를 막고, 안으로 마음을 밝히는데 있음이니,
욕심을 내어 좋다고 약을 밥처럼 먹으면 외려 독이 된다.
삼가면 평소 먹는 밥이 곧 약일 뿐인 것을,
어이 밖에서 별도로 약을 구처하랴?
문득 영원한 처사 南冥을 생각한다.
佩釼銘 內明者敬外斷者義
선비, 그의 옆구리에 찬 칼날이 눈 앞 허공 중에 칼배를 뒤집으며 번뜩인다.)
(허나, 약이란 본디 편급된 것이라, 조심히 다루어야 한다.
밖으로 외사(外邪)를 막고, 안으로 마음을 밝히는데 있음이니,
욕심을 내어 좋다고 약을 밥처럼 먹으면 외려 독이 된다.
삼가면 평소 먹는 밥이 곧 약일 뿐인 것을,
어이 밖에서 별도로 약을 구처하랴?
문득 영원한 처사 南冥을 생각한다.
佩釼銘 內明者敬外斷者義
선비, 그의 옆구리에 찬 칼날이 눈 앞 허공 중에 칼배를 뒤집으며 번뜩인다.)
《孝經-諸侯》
“在上不驕,高而不危;制節謹度,滿而不溢。高而不危,所以長守貴也。滿而不溢,所以長守富也。富貴不離其身”
효경 제후 편에 나오는 말씀이다.
제후들의 마음가짐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인데,
잠깐 풀이하자면 이러하다.
“위에 있으면서 교만하지 않으면 높은 자리에 있어도 위험하지 않다.
절도를 지키고 삼가 근신하며 차도 넘치지 않는다.
높은 자리에 있어도 위험하지 않으니, 오래도록 귀한 지위를 지킬 수 있다.
차도 넘치지 않으니 오래도록 부를 지킬 수 있다.
부귀가 그 몸을 떠나지 않는다.”
그러면서 시경에 나오는 시 하나가 덧붙여 소개가 되고 있다.
“戰戰兢兢、如臨深淵、如履薄冰。”
“전전긍긍 깊은 못에 임한 듯, 얇은 얼음을 밟듯”
오늘 날의 사람들은 하늘 다음으로 자신이 잘났다고 생각하고들 산다.
아니 때론 하늘을 넘보거나, 욕을 뵈이려고 작정하고, 수작을 걸기도 한다.
제후 역시 천자 임금 다음의 지위에 놓여 있다.
잘났다고 할 때가 제일 위험하다.
박빙 얼음을 지치듯 삼가야 할 도리가 예 있음이다.
오늘 날의 사람들은 하늘 다음으로 자신이 잘났다고 생각하고들 산다.
아니 때론 하늘을 넘보거나, 욕을 뵈이려고 작정하고, 수작을 걸기도 한다.
제후 역시 천자 임금 다음의 지위에 놓여 있다.
잘났다고 할 때가 제일 위험하다.
박빙 얼음을 지치듯 삼가야 할 도리가 예 있음이다.
슈퍼 너무 밝히다 신망(身亡), 몸을 망치고 죽음에 이르게 된다.
가지런히 마음을 추슬러 삼가는 도리를 배워야 한다.
잠깐 흉중에 떠오르는 어줍지 않은 생각을 주어 섬겨보았은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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