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물개유가관(凡物皆有可觀)
새누리당의 공천을 둘러싼 암투가 실로 가관(可觀)이다.
김무성과 진박(眞朴)간 다툼의 결과를 두고,
어느 언론에서 양패구상(兩敗俱傷)이라 하였다.
이를 글자 대로 풀이하자면, 양쪽이 패하고, 모두 다친다는 뜻이다.
당연히 이 성어(成語)엔 배경이 되는 옛 이야기가 별도로 있다.
齊欲伐魏。淳於髡謂齊王曰:「韓子盧者,天下之疾犬也。東郭逡者,海內之狡兔也。韓子盧逐東郭逡,環山者三,騰山者五,兔極於前,犬廢於後,犬兔俱罷,各死其處。田父見之,無勞勌之苦,而擅其功。今齊、魏久相持,以頓其兵,弊其眾,臣恐強秦大楚承其後,有田父之功。」齊王懼,謝將休士也。(戰國策 齊策)
“제나라가 위나라를 공격하려 하였다.
순우곤이 제왕께 아뢰다.
‘한자로는 천하에서 제일 빠른 개이요,
동곽준은 온 나라에서 제일 교활한 토끼입니다.
한자로가 동곽준을 쫓았습니다.
산 둘레를 돌기 세 번,
산 꼭대기를 오르길 다섯 차례,
토끼는 앞에서 기진하고,
개는 뒤에서 힘이 다하여,
모두 지쳐 각기 제 자리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농부가 저들을 발견하고는,
힘 하나 들이지 않고 그 공을 차지하였습니다.
이제 제나라, 위나라가 서로 병사끼리 오래도록 대치하면,
그 병사들이 피로하여 피폐해집니다.
신은 강대국 진나라와 초나라가 그 뒤를 이어,
농부의 공을 이룰까 두렵사옵니다.’
제왕은 겁을 내고는,
장수를 물리고, 병사를 쉬게 하였다.’”
이 고사를 견토지쟁(犬兎之爭)이라 이른다.
우리가 흔히 아는 어부지리(漁父之利) 즉 방휼지쟁(蚌鷸之爭)과,
그 이야기 전개의 구성이 거의 같다.
兩虎方且食牛,食甘必爭,爭則必鬬,鬬則大者傷,小者死,從傷而刺之,一舉必有雙虎之名。
(史記)
“호랑이 두 마리가 바야흐로 소를 잡아먹으려 한다.
맛있는 것을 먹을 때는 필히 다투게 된다.
다투게 되면 필히 싸움이 일어난다.
싸움이 일어나면 강한 놈은 다치고,
작은 놈은 죽는다.
다친 놈을 찔러 죽이면,
일거에 두 마리 호랑이를 취할 수 있다.”
내부의 적과 싸우다 지치면,
외부의 적에게 공멸을 당한다.
이런 따위의 교훈(敎訓)은 우리가 소싯적부터 듣고, 배우며 자란다.
하지만 이 교훈을 따라,
삼가고, 근신하는 사람이나 집단을 보기 쉽지 않다.
왜 그런가?
본디 떡이란 혼자 먹어야 맛있다.
비록 함께 노력하여 떡을 얻었다 하여도,
먹을 때는 상대를 내치고 혼자 먹고자 한다.
한 때, 동고동락한 옛 정을 생각하여 나눠먹고자 하더라도,
나중에 세월이 흐르면 정은 해져 얇아지고,
욕심은 비온 뒤 뒤뜰의 죽순처럼 자란다.
결코, 재물이 적어서 나누지 않고 홀로 먹고자 함이 아니다.
외려 콩알 한 톨은 반으로 갈라 나눠먹기 쉽지만,
만석 곡식은 한 됫박도 덜어 남에게 주기 아까운 것이다.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라,
넘쳐도 결코 남에게 넘기려 하지 않는다.
만약, 온정을 베풀어 떡 하나를 나누면,
상대는 힘을 얻어, 남겨진 나머지조차 엿본다.
아직 남겨진 것이 있는 한,
나눠질 것을 끝이 날 때까지 원하며,
아니 이뤄짐엔 원망(怨望)을 품는다.
그런즉, 상대에게 베푸는 것은 덕을 쌓는 것이 아니라,
종내는 자신의 자리를 위태스럽게 하는 싹을 키우는 것이다.
이 이치를 사무치게 아는 자는,
공을 이루고서도 마지막엔 스스로 물러난다.
功遂身退天之道。
(道德經)
“공을 이루고, 몸이 물러나는 것은 하늘의 도다.”
자칫 머뭇거리며 떡을 나눠먹길 원하다가는,
죽임을 당한다.
그런즉 공을 이루는 즉시 자리를 털고 물러나야 한다.
그런즉 한나라의 개국공신 장자방(張子房)은 미련 없이 물러났다.
월나라 도주공(陶朱公) 즉 범려(范蠡) 역시 오나라를 이기고나서는 월왕 구천을 떠난다.
하지만, 천하에 이러한 사람은 한, 둘만 있고,
나머지는 모두 승냥이가 되어 한 점 쥐새끼 살점을 뜯기 위해 아귀다툼질을 한다.
적진에 양패구상(兩敗俱傷)이 일어나면 무엇하나,
전부(田父) 즉 농부 역시 양패구상하긴 매한가지인데.
여야 불문 이전투구(泥田鬪狗)함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
이게 사람의 실상인 것을.
天下爭霸
천하인은 모두 하나 같이 패권을 다툰다.
功遂身退는 天之道지만,
人之大慾은 天下爭霸를 필연적으로 부른다.
다투고, 싸우는 모습을 보며 상을 찡그리지 않는 이가 어디 있으랴?
하지만, 사람들은 격투기 관람을 즐기며, 박수를 치고, 선수들을 격려한다.
어찌 이리 같은 사람이 다른 태도를 가질 수 있는가?
衛人有夫妻禱者,而祝曰:『使我無故,得百束布。』其夫曰:『何少也?』對曰:『益是,子將以買妾。
(韓非子)
“위나라에 기도드리는 부부가 있었다.
빌기를 이리하다.
‘우리 부부가 무탈하게 해주시고,
백 묶음의 돈다발을 얻게 해주시압소서.’
남편이 묻는다.
‘어찌 그리 적은가?’
답하여 이리 말하다.
‘그보다 더 하면,
당신은 첩을 들이지 않겠소?’”
저 처가 돈을 적게 비는 것은,
결코 욕심이 적은 것이 아니라,
더 급하고 무거운 숨은 다른 의도가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같이 사는 부부 사이에도,
제 입장에 따라 원망(願望)과 욕심이 다른 것이다.
功遂身退天之道。
공수신퇴를 하늘의 도라 하였지만,
신퇴를 함이 하늘의 도를 따르려 함에 그 뜻을 두기보다는,
기실은 제 목숨을 보존하기 위한 방책이라면 어찌 되는가?
하니까, 천지도의 실천이 아니라, 제 이해를 위해 이를 이용하였을 뿐이라면,
저 행동을 두고 천지도를 행하는 성인이라 매양 칭송할 수 있음인가?
가령 정청래가 출마하지 않겠다 하였을 때,
이게 과연 당을 위해서, 정권탈환을 위한 멸사봉공(滅私奉公)함인가?
아니면, 그 다음을 노린 뜻을 숨긴 사적인 전략적 결정인가?
노자(老子) 도덕경(道德經)에서 천양하고 있는 기술 내용은,
전후를 뒤집고, 본말을 엎으면,
도(道)가 아니고 술(術)이 된다.
도는 마땅한 길이기에 걷는 것.
하지만 술은 전략적 목표가 있고,
그를 이루기 위한 기술적 이해타산에 따른 술수(術數), 기술(技術)이 되어,
비릿한 지상으로 내려오게 된다.
양패구상(兩敗俱傷)이란,
천하쟁패(天下爭霸)가 일어나는 땅의 도(地之道)내지는 사람의 길(人之道)엔,
매양 일어나는 일이다.
저것을 비난하는 것은 자유지만,
당신이 저 자리에 있으면 아니 그러할 자신이 있는가 먼저 물어야 한다.
정치하는 이들은 입만 열었다 하면 국민을 위해 나섰다고 한다.
하지만 제 사적 이해에 복무하지 않은 이가 과연 있었던가?
녀석들이 양패구상(兩敗俱傷)을 하든,
천패만사(千敗萬死)를 하든 알 바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은 기실 인간세엔 늘 일어난다.
특별히 개탄할 일도 아니다.
마냥 탓한다고 무슨 좋은 일이 별도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저런 짓을 하여도 50% 국민은 저들을 지지한다.
변함없이.
양패구상(兩敗俱傷)하는 놈들보다,
이런 궁색(窮塞)한 민초들이 더 문제다.
양패구상하는 녀석들은 제 문제를 너무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궁민(窮民)들은 남은커녕 제 문제의 실상도 아지 못한다.
天下爭霸
이게 과연 인간세의 변함없는 모습이라면,
이젠 어찌 하여야 하는가?
저 50%의 국민들을 보면,
공자의 인(仁)이나, 맹자의 의(義)란 얼마나 안타까운가?
凡物皆有可觀。苟有可觀,皆有可樂,非必怪奇偉麗者也。餔糟啜醨,皆可以醉;果蔬草木,皆可以飽。推此類也,吾安往而不樂?
(蘇軾 超然臺記)
“무릇 사물은 모두 과히 볼 만한(感想) 꺼리가 있다.(지니고 있다.)
진실로 볼 만하다면, 모두 즐길 만한 것이다.
반드시 기이하고, 참신하고, 웅위(雄偉)하고, 아름다울 필요는 없다.
술지개미를 씹고, 박주를 마시든 모두는 취(醉)할 만하다.
과일, 소채 또는 초목근피이든 이 모두는 가이(可以) 배를 부르게 할 만하다.
이리 미뤄보건대,
내가 어찌 어딘들 가서 즐기지 않을 까닭이 있으랴?”
彼遊於物之內,而不遊於物之外。
“저들은 물질세계에서 노닐어,
물질세계를 벗어나 노닐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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