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농법 유감(遺憾) 6
관행농이 여러 문제를 유발하자 유기농이 대두(擡頭)되었다.
관행농은 소출을 많이 내고자 필요 이상으로 비료, 농약을 밭에 넣는 게 일상이었다.
비료, 농약 그 자체에 대한 경고가 쉼 없이 발해졌지만,
관행농 농부들은 오불관언(吾不關焉) 생산량 제고에 집중하며 달려나갔다.
그러자 이에 대한 반성으로 화학 비료 사용을 지양하고,
유기비료로 전환하자는 운동이 일어났다.
농약 역시 화학제재에 의지하지 않고,
친환경 재료를 개발하여 일정분 성과를 내기도 하였다.
하지만 문제는 유기농 농부라 하여도 여전히 소출 경쟁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았다.
비록 유기질 비료라 하지만, 필요 이상으로 욕심껏 많이 투입하기 일쑤였다.
게다가 농약이 아니고 자연에서 취한 친환경 농약이라는 것도,
마냥 사람에게도 안전하다고 할 수만은 없다.
저것이 병충해를 제압하는 능력을 가졌다는 것은,
동, 식물은 물론 인간에게도 독(毒)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관행농이나 유기농은 내가 보기엔 동일 선상에 서있다.
무기질비료와 유기질비료는 분명 차이가 있으나,
둘 다 식물에게 인위적 처치를 가하여 소출 증대를 꾀함에 한결 같기 때문이다.
게다가 농약에 있어서도 매한가지다.
화학비료와 친환경농약.
이 양자도 분명 차이가 있지만 근원을 따지고 들면 오십보백보이다.
왜 그런가?
유기질 비료가 좋다면 왜 병충해가 여전한가 말이다.
유기농을 짓는다고 하지만,
여전히 그 밭에 병충해가 만연하니까 (친환경)농약을 쓰는 것이 아닌가?
유기농 밭에 병충해가 만연한다는 것은,
여전히 비료가 화학비료이든, 유기비료이든 가리지 않고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는 반증이다.
게다가 과도하게 투입되고 있기에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화학비료이든, 유기질비료이든 농부들은 여전히 소출 경쟁에 몰두하기 때문에,
과도한 비료를 밭에 넣는다.
이에 따라 과잉 질소는 작물의 생체를 약하게 하고,
병충해는 쉽게 이들을 공격하여 먹이로 삼을 수 있게 된다.
유기농이란 것도 애초엔 갸륵한 뜻으로 출발하였음에 틀림없다.
하지만 세상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뜻을 취하지 않고, 이를 빌어 돈을 벌 궁리를 트는 이들이 적지 않다.
내가 시골에서 알려고 하지 않았음에도 절로 알게 된 것이 있다.
블루베리를 재배하면서 제초제 치고,
1급 발암성분인 벤젠이 스며 나오는 카펫을 방초망 삼아 밭에 깔아 놓은 이가 있다.
이 자의 홈페이지를 들어가 보면 친환경, 유기농 운운하며,
농장 개설 이후 한 번도 비료를 주지 않았다고 선전하고 있다.
하지만 처음부터 화학비료를 주고 키었음은 나도 알고 가근방 삼이웃 모두가 안다.
몸뚱아리가 시꺼먼 인간이 친환경이란 하얀 옷 뒤집어쓰고,
유기농이란 푸른 고깔모자를 빌려 쓰고서는 법석(法席) 위에 앉아 요령을 흔들고 있음이다.
이를 불가에선 요승(妖僧)이라 부른다.
게다가 온갖 SNS을 동원하여 품앗이로 서로를 이끌고 띄어주며,
실(實)도 갖춤이 없이, 그저 허명(虛名)으로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있다.
SNS니 스토리텔링이니, 6차 산업이니 하는 것들도,
지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이런 사이비 농부들에게 오염되고 있는 것이다.
내 언제 기회를 내어 이들에 대한 고발 기사를 발표할 예정이다.
그러니까 차라리 관행농 농부가 더 정직하다.
이러하듯 유기농이라는 것도 무작정 신뢰하기엔 현실이 따르지 못한다.
우리네 농업 형편이 이러함인데,
자연농법이라는 것이 등장하였다.
이는 관행농, 유기농에 이르는 일련의 역사적 반성 발전 단계의 선상 위에 있지 않다.
이를 뛰어넘는 새로운 농업에 대한 자각 의식 속에서 태어난 것이다.
자연농법(自然農法)은 일본으로부터 유래한다.
이는 불경운(耕耘), 불제초(不除草), 불시비(不施肥), 무농약(無農藥)을 특징으로 한다.
불경운(不耕耘), 불제초(不除草), 불시비(不施肥)를 우리나라에선 흔히,
무경운(無耕耘), 무제초(無除草), 무비료(無肥料)라고 하는데,
무경운(無耕耘), 무제초(無除草)보다는,
불경운(不耕耘), 불제초(不除草)가 더 말법에 맞는다 생각한다.
경운이 없다, 제초가 없다보다는 경운을 하지 않는다, 제초를 하지 않는다고 하여야,
경운(耕耘), 제초(除草)의 뜻에 부합한다.
한마디로 명사가 아니라 동사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 자연농법의 실천자로선,
오카다 모키치(岡田茂吉, 1882~1955)
후쿠오카 마사노부(福岡正信, 1913~2008)
카와구치 요시카즈(川口由一, 1939~)
기무라 아키노리(木村秋則, 1949~)가 유명하다.
오카다 모키치는 세계구세교(世界救世教)를 창시하였고,
그는 약(藥)이 질병의 본(本)이 됨을 깨달았다.
즉 약독(藥毒)을 해를 알게 되었는데,
후에 화학비료는 물론 유기비료도 사용을 하지 않고 작물을 재배하는 실험을 하였다.
1948년 무비료재배(無肥料栽培)란 논문을 발표하여 세상을 계몽하였다.
약이 독이며, 비료가 독이 됨이니,
이는 후대에 자연재배자들이 흔히 말하는 비료가 비독(肥毒)이 됨을 일찍이 알아낸 것이다.
후쿠오카 마사노부는 제 삶의 철학과 농업을 일치시켜,
즉 도농일여(道農一如)의 정신으로 자연농법을 제창(提唱)하였다.
노장(老莊)의 철학을 농업 속에서 구현하였으니,
그의 실천 철학을 나는 존경한다.
카와구치 요시카즈는 무비료, 무농약의 자연농법을 지향하지만,
제초에 대하여는 관대한 태도를 견지한다.
기무라 아키노리는 한국에선 기적의 사과로 유명하다.
세계 최초로 무농약, 무비료로 사과 재배를 성공시켰다.
무농약, 무비료, 불제초, 불경운을 특징으로 하는 자연농법은,
기존의 비료, 농약에 의지하는 관행농, 유기농과는 전혀 다른 농업이다.
이는 농업을 대하는 철학 자체가 바뀌지 않으면 결코 나올 수 없다.
바둑을 두다 보면 초보자들의 어줍지 않은 모습을 자주 보게 된다.
가령 ‘쌈지뜨면 죽나니 대해(어복)로 나가라’하지만,
수가 낮은 이는 이를 들어 알고 있으면서도 감히 결행을 하지 못하고,
바닥을 파고 들며 벌레처럼 고치를 지으며 움츠려든다.
마치 관행농을 고수하며 유기농을 행하지 못하는 농부와 마찬가지다.
때론 어복으로 나아가지만 이게 뜻도 모르고 그저 거죽으로 흉내만 낸 것이라,
이내 허리를 잘리우고 큰 탈이 나고 만다.
마치 자연재배를 합네 하고 나섰지만,
거죽만 따르고 그 요의(要義)를 익히지 못하여 엉뚱한 짓을 하고마는 농부와 같다.
자연농법, 자연재배, 자연농업, 자연농 등 용어가 서로 섞어 쓰이고 있으나,
본디 일본에선 자연농업이란 말보다 자연농법이란 말이 주로 고정되어 쓰이고 있다.
나 역시 자연농업이란 말보다는 자연농법이란 말이 더 바람직한 말이라 여긴다.
그 이유를 말하려면 한 두 마디로 끝낼 수 없다.
이는 다음 기회로 미뤄야겠다.
자연농법을 한다는 이들 중엔 사이비가 적지 않다.
어차피 농업이란 사람이 자연과 식물 사이에 개재(介在, involved)되어 있어,
사람의 인위적 작용이 가해진다.
하지만 언필칭 자연농법을 따른다면, 그 취의를 거슬러서는 곤란하다.
풀을 제압하기 위해 부직포 따위의 방초망(防草網)을 깐다든가,
새 피해를 막기 위해 전 밭 위에 방조망(防鳥網)을 친다면,
제 아무리 농약을 치지 않고, 비료를 쓰지 않는다 하여도,
자연농법이란 이름을 빌려 쓸 수 없다고 생각한다.
어떤 이가 블루베리를 키우면서 자연농법을 따른다고 열심히 선전을 하고 있다.
우연치 않게 그의 블로그에 이르게 되었다.
그래 가만히 관찰하니 좀 문제가 있어 보인다.
그의 일으킨 뜻은 존중하지만,
실천 현실에 대한 돌이킨 성찰이 있었으면 한다.
그의 농장을 보니 두둑이 부직포내지는 포대 등으로 덮여 있다.
이게 충분히 풀을 제압하지 못하니까 풀이 높이 자라고 있다.
그는 풀을 모두 뽑아내는 작업을 하며,
이게 나중에 거름이 될 것이라 기염을 토하고 있다.
이 장면에서 이 분은 자연농법을 크게 잘못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밭도 하나, 농부도 하나이지만 거기 두 가지 이치가 서로 충돌하고 있다.
제초를 인정하고 있는 카와구치 요시카즈 농법에서도
잡초 뿌리는 그냥 흙속에 두고 깍은 풀을 표면에 깔아둔다.
식물, 곤충, 벌레, 곰팡이 등의 다양한 생명체들 간의 생태 균형 때문에,
해충만 나타나는 경우는 없고, 해충, 익충이 공존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이 분은 카와구치 요시카즈의 농법을 좀 더 연구해두면 좋을 것이다.
다음의 링크가 혹 도움이 된다면 다행이겠다.
나는 현재 이들이 펴고 있는 농법을 자연농법으로 분류를 하지 않고,
유기농법의 하나로 본다.
나름 훌륭한 농법으로서 소규모 텃밭 농사를 짓는 이에겐,
재미있는 길잡이가 될 수 있겠다.
그들은 ‘풀과 벌레를 적으로 대하지 말라’고 한다.
나도 이를 지지한다.
하지만 그들은 풀을 적절히 제어하는 작업을 행한다.
나는 더 엄격하여 기본적으로 풀을 제어하지 않는다.
다만 유목인 경우에 풀에 치이지 않을 정도로 도와줄 정도이다.
그렇지만 올해엔 유목인데도 그냥 내버려 둔 곳이 많다.
아직 죽지 않고 잘 버티고 있으니 다행이라 생각한다.
올해 유목이 자라고 있는 일부 구역을 딱 한 번 예초를 하고,
농장 거의 대부분인 나머지 구역은 예초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이번 주말엔 올해 들어 처음으로,
환삼덩굴이나, 야생딸기가 번지고 있는 일부 구간을 다스릴 예정이다.
여담이지만,
내가 아는 어떤 블루베리 농부는 ‘풀은 적이다.’ 이리 말하고 있다.
이런 정신을 가진 한 자연재배는커녕 유기농도 행하기 어려울 것이다.
저분이 애초 풀을 키움은 자연을 사모하였기 때문임이라,
그러함인데 이제 와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 잘라내고, 뽑을 것이라면,
무엇 때문에 자연을 본(本)으로 삼고 따르려 하였음인가?
첫 순정은 봄 아지랑이 같은 것인가?
가을비가 내리자,
님은 멀리 떠나고,
남은 것은 그리움뿐이어라.
한 가지 더.
저분처럼 자연농법에서 풀을 키우는 것은 거름으로 쓰기 위해서가 아니다.
보다 본질적으로는 땅 속, 땅 위의 생태환경을 자연스럽게 하기 위함이다.
풀의 공덕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중 대표적인 것만 생각나는 대로 알아본다.
풀뿌리는 토양을 팽윤(膨潤)시켜 통기성을 좋게 하고, 썩어 미생물 성장을 돕는다.
특히 벼과 식물은 토양 깊숙이 뿌리를 내려 토양 심층부의 각종 미네랄을 퍼 올린다.
지상의 풀잎은 토양의 수분 조절을 자연스럽게 유도하고,
익충/해충의 균형 있는 생태환경을 만들어낸다.
결국 작물의 건강한 성장과 결실에 유익하다.
이런 이해가 따르지 못하면,
애써 자란 풀을 손으로 일일이 뽑아내며 씩씩거리게 된다.
그런 한편 자신은 풀을 키워 자연농을 한다고 우쭐거린다.
이것은 거의 한편의 희극이다.
우리 시골 동네 이장 부인도 저 풀을 나중에 베어 거름으로 쓸 것이냐 묻는다.
대개 풀을 거름으로 대한다.
이런 의식을 탓하고 싶지 않지만,
이러고 있는 한 풀의 공덕은 결코 알아낼 수 없다.
자연재배합네 하면 풀을 키우고 있다 하지만,
이 이치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 한,
다 흉내를 내고 있을 뿐인 것을.
폼 잡고 뽐내려 풀을 키운다면,
더는 내가 참견할 일은 아니다.
풀의 공덕에 대하여는 내가 새삼 다시 주어 섬길 것이 없다.
앞에서 연신 논하였던 바이다.
헌데 풀을 뽑는 것은 자르는 것보다 더 나쁘다는 것을 저 분은 아는 것인가?
최소 풀을 자르면 땅 속은 쉬이 교란되지 않는다.
허나 풀을 뽑으면 땅 속의 생태 환경은 당장에 흔들리고 만다.
거기 깃들어 사는 무수한 미생물, 소동물의 집이 파괴되고,
영양 흡수 통로가 흩뜨려지고 만다.
게다가 블루베리처럼 천근성 식물은 뿌리가 끊어지고, 들려,
큰 혼란에 싸이게 된다.
양손에 떡을 들고서는 둘 다 먹으려 할 때,
난이 일어나는 법이다.
자연농법이란 이름을 사고도 싶고,
풀을 억누르고도 싶고,
이 색색(色色)의 떡을 모두 먹고 싶은 것이리라.
허나 자연은 이런 욕심이 없다.
풀도, 나무도 모두 품고 묵묵히 지켜보실 따름이다.
모름지기 자연농법을 배우려는 자는 자연을 본으로 삼아야 한다.
내 마음의 향방을 잘 관찰하여, 자칫 욕심이 앞으로 내달으려 할 때는,
고삐를 가로채 환고향(還故鄕) 그 본디 자리로 되돌아가야 한다.
여기를 가보면 오카다의 이론이 소개되고 있다.
하지만 주창하는 내용을 보면 유기농에 가깝다.
EM도 넣고, 보카시 등을 만들어 활용을 한다.
이 단체는 世界救世教 소속인데, 유기 JAS 인증기관으로 활동도 하고 있다.
이 역시 내가 지향하는 자연농법과는 궤를 달리하고 있다.
나는 아무런 인위적 노력을,
밭이나 블루베리에 가하지 않는 것을 내 농법의 본령으로 삼고 있다.
이러고서야 과시 명실(名實)을 함께 아우름에 부끄러움이 없다고 생각한다.
차후엔 앞에서 제기한 방조망 씌우는 짓에 대하여,
그 득실을 좀 더 자세히 논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내가 글을 씀에 있어 작정하고 쓰기 보다는 그날의 흥취에 따라,
쓰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앞일을 예정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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