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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자미상정(味味者未嘗呈)

농사 : 2016. 8. 24. 21:28


미미자미상정(味味者未嘗呈)


내가 며칠 전 손님 한 분을 만났다.

그 분 말씀이 이러하다.


“내가 먹어본 블루베리 중에 여기 초원의 빛 블루베리 것이 제일 맛이 있었다.”


이런 말씀을 다른 분에게서도 종종 듣는다.


그러면 나는 이리 말한다.


“맛은 고하 간에,

저희 것은 안전합니다.“


안전은 맛보다 더 우선하는 가치다.


제 아무리 맛이 있거나,

흔히 탐을 내듯, 크면 무엇하나?

안전이 담보되지 않으면 다 무용의 것에 불과하다.


우리 것은 위험하지 않다.


왜 그러한가?


인간의 작위적인 짓을 밭에다 부리지 않는다.

인간의 욕심을 블루베리에 붓지 않는다.

때문에 위험하지 않다.


우리 블루베리는,

밭이 정갈하고,

비료, 농약 따위는 물론 일체의 외부 자재를 투입하지 않기에,

자연을 본받아 천연덕스럽게 제 스스로 자라고 있다.

제 본성에 충실할 뿐,

어디에 매인 바 없다.


형형색색(形形色色)


이것은 ‘형상과 빛깔 따위가 서로 다른 여러 가지’를 뜻하는 말이다.


이 말의 출전은 원래 열자에 나오는 다음의 글이다. 

우선 그 글을 읽어본다.


故有生者,有生生者;有形者,有形形者;有聲者,有聲聲者;有色者,有色色者;有味者,有味味者。生之所生者死矣,而生生者未嘗終;形之所形者實矣,而形形者未嘗有;聲之所聲者聞矣,而聲聲者未嘗發;色之所色者彰矣,而色色者未嘗顯;味之所味者嘗矣,而味味者未嘗呈:皆无為之識也。

(列子 天瑞)


“그러므로, 생명이 있는 것도 있고, 생명을 있게 하는 것도 있으며,”

형상이 있는 것도 있고, 형상이 있는 것을 형상이 있게 하는 것도 있으며,

소리가 있는 것도 있고, 소리가 있는 것을 소리가 있게 하는 것도 있으며,

빛깔이 있는 것도 있고, 빛깔이 있는 것을 빛깔이 있게 하는 것도 있으며,

맛이 있는 것도 있고, 맛이 있는 것을 맛이 있게 하는 것도 있다.


생명을 받은 것은 죽지만,

생명을 있게 하는 것은 마침이 없다.

형상이 있는 것은 실제 있지만,

형상이 있는 것을 형상이 있게 하는 것은 있은 적이 없다.

소리가 있는 것은 들을 수 있지만, 

소리가 있는 것을 소리가 있게 하는 것은 있은 적이 없다.

빛깔이 있는 것은 빛날 수 있지만, 

빛깔이 있는 것을 빛깔이 있게 하는 것은 있은 적이 없다.

맛이 있는 것은 맛볼 수 있지만, 

맛이 있는 것을 맛이 있게 하는 것은 있은 적이 없다.

이것은 모두 무위의 작용일 뿐이다.”


내가 손님께서 주신 말씀 ‘맛’에 곰곰 생각에 빠졌음이다.

이에 이 글을 생각해보게 되었던 것이다.


윗글의 바로 앞에는 이런 글귀가 있다.


此皆隨所宜而不能出所位者也。


“이것은 모두 마땅한 바에 따를 뿐,

자신의 위치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천지 만물은 자기의 본성을 위배할 수 없다.

사물의 법칙이라는 것은 자기의 천직, 본분을 벗어날 수 없다.

그런데 사물의 현상 뒤에 숨어 그리 하게 하는 이치는

겉으로 나타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러한 모습을 무위(無爲)라 한다.


앞의 인용구,

전반부는 마치 만물의 뒤에 조물주의 존재가 있는 듯 읽혀진다.

하지만 후반부는 그 조물주의 부재를 말하고 있다.

열자의 철학에 따르면,

무엇인가가 현시(顯示)하면, 조물주가 되지 못한다.

세상에 드러나는 순간, 조물주에 의해 창조된 피조물이 되고 만다.

따라서 조물주가 있다면 드러난 존재가 아니다.

결국 인간은 그의 존재를 아지 못한다.

알 수도 없다.

알려고 할 일도 없다.

그래서 이를 무위(無爲)라 할 뿐인 것을.


무위는 본체 그 자체가 아니라 작용 내용을 지시한다.

조물주란 존재를 지칭하고 있지 않다. 


기실, 조물주가 있고, 없고는 상관이 없다.

유신론, 무신론 따위로 논쟁하며 시간을 허비할 이유가 없다.


味之所味者嘗矣,而味味者未嘗呈


“맛이 있는 것은 맛볼 수 있지만, 

맛이 있는 것을 맛이 있게 하는 것은 있은 적이 없다.“


그러니까 손님이 블루베리를 잡수고는 그것이 맛이 있다, 없다,

이리 느낄 수는 있다.

하지만 그리 맛이 나게 하는 그 무엇인가는 드러난 존재가 아니란 말이다.

이것은 농부 을밀의 재주 때문이 아니다.

재주를 피울수록 블루베리 맛은 더 엉망이 되고,

노하우가 있다고 뽐내면 뽐낼수록 더 엉터리 블루베리가 된다.

작위적인 짓을 하지 않고,

저들로부터 물러나 있을수록 더욱 맛이 좋아진다.


오늘날 현대 농법이라는 것은,

농부가 조물주라도 된 양,

갖은 교묘한 농기계를 만들고,

농약, 비료 따위의 야릇한 물질들을 밭에 처넣고는,

식물들을 쥐어짜내며 소출 경쟁에 몰두한다.

그러면서 재주가 신묘하다고 등을 두드리며,

나라에서는 상을 주고,

농부는 술수가 뛰어나다 스스로 우쭐거린다.


하지만,

우리 블루베리가 그리 맛있는 것은,

농부의 재주 때문이 아니라,

그리 맛있게 하는 그 무엇,

그러나 결코 앞으로 나와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그 무엇의 작용일 뿐이다.

이를 일러 무위(無爲)라 한다.

외려 나 을밀이 아무런 일을 하지 않을수록 블루베리 열매는 더욱 맛이 있고, 건강체가 된다.
이것은 그저 말 장난이 아니라,

내가 실제 우리 밭에서 실천하고, 실증한 사실이다.


후쿠오카 마사노부(福岡正信, 1913~2008)는 이를 깨우친 이다.

그의 농사법을 일러 자연농법이라 부른다.


그는 현대농법을 미친 짓이라고 규정한다.

유기농도 그는 부정적으로 본다.

하지만 방임내지는 방치농과는 다르다.

애초부터 인간의 손이 가지 않은 자연에 맡기고,

자연의 순환에 맡겨두면 좋지만,

일단 인간의 손에 들어간 것은 내버려 두어도 자연의 형태로 돌아오지 않는다.

때문에 자연으로 돌아오기 위해 손을 빌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의 농법을 자연농법이라 하지만,

그를 따른다고 하는 사람들도 그와는 완전히 같지 않다.

그들 역시 자연농법이라 주장하지만, 조금씩은 달라,

여러 변형된 모습으로 전개되고 있다.

하지만 마사노부를 자연농의 창시자라고 부른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그가 ‘건조 계분’을 쓰고, 농약을 썼다는 소문도 들리고 있다.

하지만, 이게 오해에서 비롯되었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이 부분은 깊이 있게 추적 조사한 것이 아니라, 

내가 확인해줄 위치에 있지 않다.


하지만, 불경운, 불제초, 무비료, 무농약을 초석으로 한,

자연농법의 정신은 여러 사람들을 일깨우고, 열정의 한 마당으로 끌어드릴 것이다.


한편, 현대의 상업적 농업 현실에선 도저히 적용 불가능한 도가의 무위자연에 뿌리를 둔,

그의 농법은 결코 따라할 수 없다고 비판하는 측도 상당히 많다.


다행스러운 것은,

블루베리는 자연농법과 친(親)하다.

나는 수 년 간 내 철학, 내 식대로 농사를 지어왔다.

마사노부든, 자연농법, 유기농, 아니 관행농도 다 나의 스승이다.

하지만, 그들을 무작정 따르진 않는다.

내 농사 철학을 위배하면 마사노부도 나는 버릴 것이다.  


요는 농법이 먼저가 아니라,

농부의 농사 철학이 먼저 서있어야 한다.

이게 아니면 언제 모방농법, 유사농법 혹은 사이비농법이 끝날지 기약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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