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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소비(消費)하지 말라.

소요유 : 2016. 9. 7. 09:33


내가 가진 것이 블루베리뿐이라,

남에게 줄 수 있는 것도 이밖에 별로 없다.

나는 그동안 묘목 기증을 제법 한 편이다.

관공서, 종교단체에 주로 무상 기증하였다.

공적인 장소에 블루베리가 심겨져,

여러 사람에게 즐거움을 선사한다면 다행이라 하겠다.


올 봄 모 종교단체 두 곳에 묘목을 기증하였다.

묘목을 가져간 이는 예상외로 많이 주셔서 고맙다며 가져갔다.

그 중 하나, 어제 그쪽으로부터 다시 연락이 왔다.

내년 봄에 추가로 심으려 하는데 더 줄 수 있느냐 묻는다.

거긴 산이 있어 심으려면 무한정 들일 수 있다.

내가 그러마 하였다.

거긴 외부인에게 공개가 되지 않는 닫힌 곳이라,

기실 전직(專職) 교역자들만의 공간이다.
온전히 공적인 곳이라 할 수도 없는 바임이라,

나의 기증하는 기준엔 다소 빗겨 간 곳이다.


나는 어느 특정 종교를 믿지 않는다.

소싯적엔 가리지 않고 저들에 대하여 공부를 하였다.

그렇다하여 지금이나 그 때나 어디 적을 두진 않았다.

저들의 교의(敎義)를 존중하지만,

마음으로 수긍할 수 없으면 따르지 않는다.


이즈음엔 저들 살림살이에 대하여 보고 듣는 것이 많아,

얼추 저들의 진면목을 짐작을 하고 있다.

흔히 저기 종사하는 이들을 성직자(聖職者)라 하는데,

나는 이 말을 잘 쓰지 않는다.

그저 종교인(宗敎人)내지는 교직자(敎職者), 교역자(敎役者)라 부른다.

종교인은 목사, 스님 외에 신도들도 지칭할 수 있으므로,

교역자가 조금은 더 한정적이라 나을까 싶기도 한데,

일상에선 굳이 가리지 않고 사용한다.


종교인들은 제 종교가 성스럽다 여길는지 몰라도,

나는 종교가 성스럽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세상의 한 현상, 표상 정도로 여긴다.

저들 사상, 철학에 놀라기도 하고 존경심을 일으키기도 하나,

무작정 떠받들지는 않는단 말이다.


큰 교회 목사나, 큰 절 스님보다,

내 눈엔 우리 동네 골목길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폐지를 주어 나르는 할머니가 더 성스럽다.

염천지절 조그만 수레를 끌고 헉헉거리며 거리를 지날 때,

저들의 노고엔 왜 사회적 보상이 바르게 따르지 못하는가 의문을 갖는다.

만약 저들이 폐지를 가져가지 않으면,

도시는 며칠 지나지 않아 쓰레기더미 속에서 신음할 것이다.

저들 노역은 그저 폐지 그 자체의 가치 이상으로 사회적 편익을 창출하고 있다.

그런데 매양 저들은 사회적 착취를 당하고 있다.

마땅히 시 차원의 對희생 보상 프로그램이 만들어져, 저들을 제대로 대우하여야 한다.


오늘 날 교역자들은 저들에 비하면 꽃방석에 앉아 호의호식하고 있다.

종권 다툼에 여념이 없고, 

사찰 빼앗기 싸움을 벌이는 저들을 나는 올해 직접 목격하기도 하였다.

도가 높고, 소임에 충실한 교역자가 왜 아니 없으련만,

나는 폐지 할머니와 곧잘 저들을 견주곤 한다.


때문에 저들과 일정 거리를 두고 객관적으로 쳐다볼 수 있다.

오늘의 글 주제에 한정하여 말한다면,

저들은 매양 받고만 살아 좀 뻔뻔할 때가 많다.

신도들이 경원(敬遠)하여 높이 대하는 것이 일상이기에,

도가 높지 않은 이들은 교만해지기까지 하다.

특히 물질적 자량(資糧)은 전적으로 신도들의 부주(扶助)에 의지하여,

저들의 독특한 태도, 습속(習俗)을 만들어내고 있다.


“시주물 무서운 줄 알아야 한다.”


글을 읽다보면,

스님 네들이 밥알 하나를 두고, 수챗구멍에서 주어다 먹는다는 등,

시냇물에 흘러간 밥알을 쫓아 내려가 건져 먹는다는 등,

그럴듯한 이야기를 적지 아니 접하게 된다.

이게 결코 거짓말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내가 겪기로는 이와 정반대인 경우도 적지 않다.

절간 후미진 곳에 국물 우려낸 멸치며, 덩어리 밥이 버려져 있었다.

중이 멸치 먹는 것은 이젠 새삼 놀라운 일이 아니다.

내가 어느 날 저것을 보고는 속에서 열이 올라 우라질 놈들이라 욕을 뱉어버렸다.

산사에 들려, 소피를 보면서 목격한 광경이다.


헌데 그로부터 오래지 않아 동네 구멍가게 아주머니로부터 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여기엔 중들이 내려와 젓갈, 멸치를 수시로 사간다는 것이다.

아, 나만 모르고 있었구나.

이젠 이것이 일상이 되어 버린 것이다.


물론 내가 승단 전체를 모욕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청정심을 지키고 있는 훌륭한 스님이 왜 아니 계시겠음인가?

청법(請法)

그런 스님을 모시고 법문을 들으면 환희심이 올라 마냥 행복할 것이다.

청정승(淸淨僧)께 삼가 귀의한다.


"일하지 않았으면 먹지 말라."


"댓가를 치루지 않고 거저 구하지 말라."


이를 지킨 이로 나는 백장을 떠올린다.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

당나라 무종의 폐불 때도 다른 종파는 다 쑥대밭이 되었지만, 선종만은 무사했다.

까닭은 백장(百丈)의 선문규식(禪門規式) 때문이라 하지 않던가?


내가 블루베리를 사회에 기증하는 것은 돈이 많아서도 아니오,

거저 풀어내고는 마냥 우쭐거리고자 함도 아니다.

다만, 공적인 일에 조그만 도움이 되길 바랄 뿐인 것을.


공것을 마냥 탐할 것이 아니라,

문득 멈춰 삼갈 일이 아니겠음인가?

이것은 종교인/비종교인을 떠나 모두에게 필요한 일이다.


욕심이 일 때,

이 때가 가장 조심할 순간이다.


그대들,

나를 소비(消費)하지 말았으면 싶다.

내가 일으킨 순정을 이용하지 말고, 존중해주기를 바란다.

나는, 

남들이 단순히 소비할 객체가 아니라,

오롯이 제 홀로 서 있는 주체적 인격일 뿐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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