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럭체인과 탈중앙화
블럭체인과 탈중앙화
탈중앙화(脫中央化, decentralization)라는 말은 중앙을 대상화 하고,
그 내용이 무엇이 되었든 간에 이를 벗어나고자하는 모색, 행동을 지시하고 있다.
때론 그 주변에서 분권화(分權化)라는 말도 곧잘 듣게 되는데,
이 말은 좀 더 구체적이어서, 정치, 사회, 경제, 문화적 함의를 갖지만,
역시 힘(power), 권력(authority)이 중앙에 집중된 선행 현실을 전제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런 말들은,
공간적으로 상대적(相對的)이며, 시간적으로 후발적(後發的)이며,
내용적으로는 후취적(後取的)이다.
하니까, 탈중앙화는 중앙이 없으면 성립되지 않는다.
탈중앙화는 그래서 반란을 꿈꾸는 편족(片足) 쪽발이에 불과하다.
그래서 슬픈 존재이다.
설혹 저들의 탈중앙화 기도가 성공하였다 하여도,
편족인 저들은 갈 길을 잃고 방황하거나,
스스로 중앙화 되며,
방황을 끝내고,
긴 휘파람 불며 안심하고 만다.
여전히 저들은 슬픈 존재일 뿐이다.
글을 더 잇기 전에,
내 생각의 기초를 공고히 하기 위해,
이런 사실 내용을 보다 확실히 먼저 점검해두고 싶었다.
저 말들의 어의(語義)는 한결같이,
구속된 상태로부터 탈출(脫出)하고,
빼앗긴 것을 나눠 갖자(分取)는 것이니,
언제나 앞선 상대를 의식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든 동물이든 사회가 형성되면,
생명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먹이는 물론,
타자를 압박하고, 위협하는 힘, 권력이라든가,
자존을 지키고, 위엄을 드러낼 명예, 권위를 탐하게 된다.
문제는 이들 즉 재화나 권세 따위는 대개 한정 자원이라,
분점(分占)이 구성원 모두가 동의하는 원칙 또는 정의, 이치에 따라 이뤄지지 않고,
상호 이해가 갈려 갈등과 다툼이 일어나기 일쑤이다.
게다가 자원이 부족할 때보다 풍족할 때,
외려 독점(獨占)이 심해지는 경우가 더 많다.
古人亟於德,中世逐於智,當今爭於力。
(韓非子)
‘옛 사람은 덕을 중시하였으며, 중세에는 지식을 쫓고,
지금은 힘을 다툰다.’
여기 당금(當今)이라는 시절을,
오늘 날 뒤돌아보면 까마득한 옛날이 아니더냐?
古者人寡而相親,物多而輕利易讓,故有揖讓而傳天下者。
‘옛날은 사람이 적어 서로 친하였으며,
물자도 많아 이(利)를 가벼이 하고, 쉬이 양보하였다.
그러므로 읍하며 천하를 전(선양)하는 이도 있었다.’
이게 BC 200 여년 전국시대 당시의 말씀이다.
물론 오늘날의 경우엔 물건이 적어서가 아니라,
외려 많은데도 이(利)를 다투고, 난을 일으키고 있다.
난 이게 결코 상충되는 말이 아니라 생각한다.
무슨 말인고 하니,
물자의 다과가 아니라,
그 분배 문제 때문에 난(亂)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공정한 분배 경로에 애로(隘路)가 생기면 물자가 아무리 많아도,
사람들은 제한테는 부족하다고 여기게 된다.
사정이 이러한데, 바로 지난 엇그제 위정자는 부자 감세를 천연덕스럽게 외치곤 하였다.
노동자들 가운데 태반은 비정규직이란 표찰을 가슴에 달고,
탁한 세류(世流)에 개구리밥처럼 이리저리 휩쓸려 떠내려가고 있다.
참으로 참람스런 세태라 아니 할 수 없다.
탈중앙화 문제는 정치사회경제학적 고찰을 통해 정밀히 탐색해보아야겠지만,
고대의 봉건제도(封建制度)를 살펴보면,
보다 깊은 이해의 단서를 얻으리란 기대가 있다.
봉건이란 본디 고대 중국 천자가 영토를,
식읍(食邑)으로써 종실(宗室)이나 공신(功臣)에게 나눠주는 제도를 말한다.
식읍이란, 경제적 이익을 국가에서 나눠 줄 때 이를 토지로써 행하게 되는데,
바로 이를 이르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경제적 이익뿐이 아니고,
그 식읍에 속한 인민 모두를 통치할 수 있는 정치, 사법적 권력까지 이르게 된다.
기실 고대엔 산업이라야 농업이 거의 유일한 것이었다.
봉건제도를 서양에선 feudalism이라 하는데,
어근(語根)인 feuds 역시 토지, 봉토를 말한다.
하니까, 양의 동서를 불문하고,
농본(農本) 시대에선, 토지가 경제적 이익을 창출하는 기본 요소 단위가 되었던 것이다.
헌데, 인민들은 그 요소 조건에 강하게 묶여 있었으니,
어찌 슬프다 하지 않을 수 있는가?
아니 그런가?
먹지 못하면 죽는다.
그런즉 토지를 양여하는 grantor는 선심을 베푸는 것이요.
이를 받는 grantee는 grantor에 예속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소수의 grantee는 그 토지에 예속될 수밖에 없는 다수의 인민들 위에 군림하여,
저들의 땀을 훔치고, 피를 빨며 호의호식하게 된다.
은(殷)의 말왕(末王) 폭군 주(紂)의 학정에 넌더리를 낸 인민들은,
주무왕의 시원한 혁명에 환호한다.
기실 주문왕은 이들의 인심을 얻기 위하여,
때를 고르고, 인재를 기다렸으나,
이게 과연 인민들을 위한 것이었을까?
나는 결코 믿지 않는다.
은(殷)나라를 거꾸로 무너뜨린 주(周)나라가 바로 이 봉건제도를 최초로 시도하였다.
주는 종실뿐이 아니라 건국공신에게도 인색하지 않게 식읍을 나눠주었다.
예컨대 제(齊)나라는 건국의 일등공신인 소위 일컫는 강태공(太公望姜尚)에게 주었다.
주나라 성은 본디 희(姬)인데, 이리 성이 다른 이에게도 식읍을 나눠주었은즉,
이야말로 탈중앙화의 역사적 기원을 이룬다 하겠다.
同姓異姓之分
동성, 이성 가리지 않고 나라 땅을 나눠주었으니,
봉건제도란 이제까지 혈연(血緣)에 강고히 결착된 권력을,
이성(異姓)에게까지 분배하는 획기적 조치라 하겠다.
하지만, 분배 대상이 백성(인민) 일반에게 미치지는 못하고,
공을 이룬 내부 소수 핵심 분자에게만 한정되었으니,
권력의 속성(attribute) 중 하나인 점성(黏性)이 얼마나 찰진 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실제 주대엔 분봉제(分封制)가 틀을 잡아,
종법제(宗法制)와 굳게 결합하고,
예제(禮制)에 의거하여, 다섯 작위제(五等爵制)가 확립되는 등,
사회 계층별 존비서열(尊卑序列)이 도리어 엄격히 구별되었다.
어림없는 소리인지라,
감히 일반 백성들이 어디를 넘볼 수 있었으리요?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요, 객체에 불과한 인민들을,
어찌 권력자가 챙길 리가 있을 것인가?
그런즉, 이로써,
천하사가 마무리가 되었으랴?
욕망의 당체(當體),
인간들이 무리를 짓고 사는 이상,
그에 그치고 말았을 리가 없다.
춘추, 전국시대에 이르러서 각지에 봉해진 봉건 제후가,
저마다 제 잘났다고 들고 일어나 천하가 어지러워졌다.
본디 인간은 grantee로는 만족하지 못한다.
부단히 grantor의 지위를 탐하고,
이의 획득을 위해 갖은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당(唐) 시대의 유종원(柳宗元)은 봉건론(封建論)에서,
봉건제도는 百害而無一利라,
즉, 백 가지 해만 있을 뿐, 하나도 이로운 것이 없다 하면서,
군현제(郡縣制)의 우월성을 말하였다.
후대 여럿 학자들이 좌우로 쪼개져,
이에 대하여 찬반 의견을 개진하였다.
곽말약(郭沫若) 같은 이조차, 중앙집권제를 옹호하였으니,
내가 누차 말하듯이,
본디 떡 먹는 일은 남과 나눌 것이 아니라,
한 입에 몰아 구겨 넣어 아구창이 찢어져도,
결코 남과 함께 할 일이 아닌 것이다.
이게 변치 않는 인심의 향로인 바임이라.
(※ 참고 글 : ☞ 개자추(介子推)를 생각한다.)
崇儒抑法이라,
유가의 법을 숭상하며,
은근히 법가의 법치주의를 억압하는 전통은,
지식인들의 전근대적 고질적 병통인 것이다.
법가는 인간을 결코 신뢰하지 않는다.
하지만, 끝내 인류애를 저버리지 않았음이니,
저들 무리를 예가 아니라, 법으로써 규율할 수밖에 없음을 알았다.
헌즉, 휴머니스트는 유가가 아니라,
종내는 법가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고 나는 믿는다.
기실, 진시황은 천하를 통일한 후,
봉건제를 없애고 강력한 중앙집권제를 확립하였다.
이 때 실시한 것이 군현제(郡縣制)이니,
오늘날 우리나라에도 행정구역 중, 군이란 이름이 남아 있다.
이는 바로 이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그는 천하를 혼란케 한 것은 봉건제라 여기고,
모든 권력을 거둬 자신에게 집중하였다.
현대, 의식이 깨인 국가에선,
행여, 지방분권 정책에 따라,
지방자치화가 제법 이뤄지긴 하였으나,
여전히 중앙정부와 지방자치행정부와는 심한 대립을 하고는 한다.
멀리 찾을 것도 없이,
가령, 박근혜 정권 당시 성남시의 정책을 중앙정부에선 사사건건 시비를 걸며,
용납을 하지 못하였다.
그럼 현 문정권은 아니 그러한가?
어림없는 소리다.
내가 보기엔 이 양 정권은 정치사회학적으로보건대 그리 멀리 떨어진 존재가 아니다.
문정권 들어와 암호화폐 시장은 저들의 압살책으로 인해, 폭망하다시피 위축되었다.
중앙화 권력의 기득권을 지키기에 일점의 양보도 없기엔 양 정권은 근원적으로 별반 차이가 없다.
흔히 고대 사회를 칭하길,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무작정 봉건시대라 하는데,
우리 역사엔 원래 봉건제라는 것은 없었다.
강력한 중앙집권제가 있었을 뿐이다.
누차 지적하지만,
인간이란,
본질적 인간성에 의지하여 고찰할 때,
빵을 결코 타자와 함께 나눠 먹을 수가 없는 존재인 것이다.
혹간 인간이 상호 신뢰를 쌓고, 감정을 교류하며, 협조할지라도,
그리고 설사 주위에 재화가 남아도는 형편일지라도,
이는 결코 인간이 빵을 나눠 먹을 것이라는 증거가 되지 못한다.
위 인간의 외적 양태를 두고,
이로써, 인간성이 선하다고 믿는 것은,
은폐된 욕망을 간파하지 못하고,
피상적 관찰에 의지하여,
한낱 시장적 가치로 평가하는 장사꾼의 어리석음에 불과하다.
주나라 희씨가 강씨에게 땅을 나눠주었다 하여,
희씨가 착한 사람이라 여긴다면,
조만간,
쏟아지는 비를 일시 긋고자 기어든,
남의 집 처마 밑 한 뼘 터까지 내주게 되고 말 것이다.
종실이나 믿을 만하다 여기는 공신에게,
주왕(紂王)으로부터 빼앗은 떡을 나눠주었지만,
춘추전국시대를 거치면서,
종실은 서쪽(西周)에서 동쪽(東周)으로 쫓겨 가고 말았지 않았던가?
피를 나눈 혈육도 그대의 살을 헤치고, 피를 빨며, 뼈를 바르고 말리니,
항차 이성(異姓)받이에게 무슨 의리를 기대하랴?
춘추오패 제환공(齊桓公)이 일시 주(周)나라를 받드는 양 하였지만,
이 모두 관중의 책략에 불과한 것인 바라,
종내 죽을 때, 자신 하나 못 지키고,
제 자식에 의해 버려져, 몸에 구더기 슳도록 방치되고 말았지 않않지 않은가?
이제,
비트코인으로 대표되는 탈중앙화(decentralization)에 대하여 말할 차례이다.
인류의 삶은 외재적 폭압에 예속되어 왔다.
국가, 사회는 개별 사회 분자들을 강압하여,
그들이 펼쳐놓은 질서에 굴복하길 강요한다.
국가의 폭력은 늘 그렇듯이,
달콤한 권유나, 충성을 앞잡이로 세워,
인민들을 저들의 욕망 구조 속으로 밀어 넣는다.
법제(法制), 부역, 세금으로 압박하고,
급기야 총칼로 윽박지르면,
저들의 원하는 바를 취하고 만다.
아나키스트(anarchist)들은,
절해고도(絶海孤島)에 떨어져,
기껏 허공을 향해 감자바위나 먹일 뿐,
저 흉악한 괴물을 당해내지 못한다.
그런데,
우리 이공(理工, science and engineering)인들은 이제,
저들을 대신하여 신(新) 병기로 무장하고 일어섰다.
전통적 세계에선 제왕(帝王)은 세상의 재화와 권세를 대세(對世) 절대적으로 독점한다.
곁다리로 들러붙은 신하들은 제왕이 흘린 콩고물을 주워 먹으며,
신명(身命)을 받쳐 봉사한다.
대다수 인민들은 이들이 펼친 강고한 관계망에 갇혀,
제대로 저항 한번 하지 못하고,
말라비틀어지고 만다.
헌데,
수년전부터 블록체인(blockchain)이라 일컫는 핵심 기술로,
암호화화폐(cryptocurrency)가 만들어지고 있다.
마치 무림 고수들이,
소맷자락 휘뿌리면 암기를 날리듯,
병든 세상을 향해 천둥 소리를 내며, 벼락을 내리고 있음이다.
블록체인은 코드(code) 작업을 통해 구현된다.
기실 현실의 세계는 각종 코드(code)로 억압되어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법이다.
code는 법, 규칙, 규약을 뜻한다.
(※ code에 대하여는 code - ①로부터 이어지는 일련의 내 글을 참고 할 것.)
그런데 재미있게도,
컴퓨터 프로그래밍 작업도 coding이라 부른다.
프래그래머들은 일정한 컴퓨터 언어의 법식에 따라 수 만 라인을 엮어낸다.
블랙체인은 이 coding 작업으로 구현된다.
그런데 그 결과는 기존의 현실 code 관계망들을 해체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블록체인은,
중앙 통제 기관 없이,
분산된 구성 개별 단자들에 의해,
신뢰 체계를 자율적(autonomic)으로 구축한다.
암호(crypto)는 자율성을 담보한다.
암호화 되지 않으면,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선 필연적으로 타율적 통제가 따라야 한다.
가령 우리가 은행에 계좌를 개설하기 위해선,
원하지 않아도 우리의 신분 정보를 은행에게 제공하여야 한다.
공적 안전과 신뢰를 획보하기 위해,
내 정보를 남에게 노출하여야 한다.
이로써, 원하지 않아도 관계망에 도리없이 예속되고 만다.
큰 형님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나서야, 조폭 조직원이 된다.
그리고 나서야, 점심 때 사무실 한쪽 귀퉁이에 쪼그리고 앉아,
자장면이라도 얻어먹을 수 있다.
내일도 얻어먹으려면,
두목에게 연신 허리를 굽히고, 머리를 조아려야 한다.
하지만 블록체인 기술 하에선,
큰 형님이 없다.
다만 peer to peer
익명(匿名)내지는 가명(假名)의,
은폐된 개별 단자들의 수평적 참여만으로 조직이 유지된다.
어느 누가 어느 누구에게 구속되어 있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누구도 신뢰 체계를 넘보고, 조직을 해칠 수 없다.
(※ 익명과 가명은 다르다.
익명이라면 더욱 바람직하겠지만,
아직 완벽한 익명 처리는 어려운 과제에 속한다.)
암호 화폐란,
이 신뢰 체계를 관통하는, 마치 인체의 피와 같은 역할을 한다.
재화, 권력이 분산되는 것만으로 평등, 공정한 세계가 유지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의 욕망은 이런 세상을 끊임없이 엿보며 위협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블록체인의 유지를 위해 암호화폐란 당근이 필요악으로 요청된다.
기술이란,
일차적으로 가치 종속적으로 탄생하지만,
가치 해체를 위해 복무하기도 한다.
인터넷은 절대 평등 세계를 여는 단초를 제공했다.
(※ 참고 글 : ☞ 아름품과 꽃바다(華嚴))
이제 이 위에 블록체인은 구체적 실천 현실을 여는 강력한 기술로 나투었다.
이로써,
타율적 봉건이 아니라,
자율적 자유와 평등이 보장되는 세계가 펼쳐지길 바란다.
끝으로,
블럭체인 기술로 비트코인(Bitcoin)을 개발한,
사토시 나카모토(Satoshi Nakamoto)의 백서를 첨부하여 둔다.
Bitcoin: A Peer-to-Peer Electronic Cash System
(출처 : https://bitcoin.org/bitcoin.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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