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rush current

생명 : 2023. 1. 14. 13:59


아기 고양이 하나가 죽었다.

녀석은 어찌 밥을 밝히는지 밥을 줄 때마다 발치를 맴돌아 걷기도 힘들었다.
다른 아이보다 사뭇 작았다.
그래 얼른 많이 먹고 자라길 바랐었다.
다행인 것은 활발하여 별 탈 없이 유아기 때를 건널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동물병원 의사의 말처럼,
야생의 고양이는 대개는 전염병에 걸려 2년을 넘겨 살기 어렵다 하였음을 기억한다.

그동안 병을 앓는 아이들을 데리고 여러 차례 병원에 데려간 적이 있다.
하지만 그때마다 별 효험도 없고, 치료 중 죽기까지 하였다.
  (※ 채 한 뼘도 되지 않는 아이에게 링겔을 맞추겠다며 주사바늘을 마구 쑤셔 되었다.
  끝내는 혈관을 찾아내지 못하고 포기하였다.
  그 틈에 아이는 기진하여 심장이 멎었다.
  그러자 강심제를 또 주사하니 이내 숨이 멎어버리고 만 것이다.)
하여 그 여자 의사를 신뢰하지 못하게 되었다.
게다가 욕심이 등천하여 돈을 너무 밝히는 악덕도 가지고 있다.
그래 이번엔 병원에 데려가지 못했다.
미안한 노릇이다.

이틀 전에는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더니만,
어제는 기운을 차리고 물을 마시고 밥을 조금이나마 챙겨 먹었었다.
이제야 기운이 돌아오는가 싶었다.
하지만 몇 시간 후 집 앞에 나와 비실대는 것을 발견하였다.
배설하고서는 그 자리에 엎어진 것이다.
날이 추운즉 물로 씻어주지는 못하고,
티슈로 젖은 것을 얼추 처리하고는 집 안으로 들여놓았다.

뉴턴의 법칙 중 제1의 법칙이 관성의 법칙(the law of inertia)이다.
자연계의 가장 자연스러운 운동 형식은 현재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움직이는 것은 계속 움직이고 움직이지 않던 것은 계속 움직이지 않는 상태.
영원지속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어디 세상사가 그런가?

樹欲靜而風不止 子欲養而親不待

나무가 고요히 있으려나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이 부모를 봉양하려나 기다리지 않고 돌아가시고 마는 법.

간단(間斷)없이 외부에서 사(邪)가 침범하여,
interrupt를 걸며, 그냥 내버려 두지를 않는다.

전기 스위치를 올리면 소위 돌입전류(rush current)가 흘러,
계 전체에 돌발적인 영향을 미친다.
욕조의 물을 뺄 때 보면, 
마지막 순간에 구멍을 빠져나가는 물의 속도는 급격히 커진다.
이를 terminal effect라 부른다.

전기 스위치를 넣게 되면 그림처럼 계(界, system)는 돌발적 변화에 대하여 저항하게 된다.
그 저항의 주요 주체 요소는 소위 용량성 저항이다.
그림의 실험에선 캐퍼시터(capacitor)로 측정하였다.

(출처 : texas instrument - Managing Inrush Current)

돌입전류의 크기는 이리 식으로 나타낼 수 있다.

나는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고자 함인가?
아기 고양이가 몸을 추스르고 밥을 먹기 시작할 때,
장하다 싶어 밥을 많이 준다든가 소화하기 힘든 고기 등을 주게 되면 탈이 날 수 있다.
하여 나는 그날 녀석들이 잘 먹는 파우치를 덥혀 조금만 주었다.
저 전기 회로에서 캐퍼시턴스(capacitance)가 크게 되면,
돌입전류가 급격히 커져 계가 미처 감내할 수 없는 상태가 돼버린다.
따라서 계를 교란하지 않게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

사람이 죽을 때 보면, 어느 날 갑자기 반짝 기운을 차리는 때가 있다.
이때를 조심하여야 한다.
과연 그가 기운을 차리고 살아 돌아오려는 것인가?
아니면 저 욕조의 terminal effect처럼 마지막 남은 정기를 다 소진하며,
서산의 낙조처럼 최후를 붉게 붉게 장렬히 태우려 함인가?
이를 잘 헤아려야 한다.

오늘 아침에 살펴보니 녀석은 미동도 하지 않는다.
어제 잠시 기운을 차린 것은,
마지막 에너지가 rush하여 이 허무한 세상을 하직하려,
뒷동산에 피오르는 혼불을 태웠던 것이리라.
불꽃은 오늘은 꽃비가 되어 나리고 있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죽으면 경직 현상이 온다.
그의 몸은 이미 굳어 있었다.
금병매를 보면 왕노파가 사람을 독살하고는,
죽인 것을 확인하기 위하여 무대의 허리춤에 손바닥을 넣는 장면이 나온다.
죽으면 허리 근육이 몸을 지탱하지 못하고,
침상에 허리 S자 만곡부가 침상에 붙어버려 공간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여러 번 겪은 일이지만,
녀석들이 죽으면 순식간에 사지가 마른 가지처럼 딱딱해지고 만다.
수습하여 안전한 곳에 올려 두었다.
오늘은 비가 오기에 땅에 묻기에 적합하지 않다.
여기 시골에 들어와 이제까지 죽은 아이들을 수습한 것이 근 마흔에 이른다.
(※ 참고 글 : ☞찰나멸(刹那滅)과 고양이)

이제 한 생각 떠올라, 그를 다시금 꺼내들었다.
(※ 참고 글 : ☞ 새로 사 신고 온 신발만 다 낡았구나!)

'사벽의 대화'엔 석우, 지허 스님이 수행하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
어느 날 두 분이 산에서 약초를 찾아 나섰다 비를 만났다.
너럭바위 밑으로 피하여 꿀밤(도토리)으로 허기를 달랬다.
헌데, 꿀밤은 반드시 물과 함께 먹어야 했는데,
물을 구하기 어려워 그냥 꿀밤만 먹었다.
이게 탈이 나 석우 스님이 기색혼절(氣塞昏絕)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하는 그 시점에서의 기록이다.
고양이가 죽자 문득 이 장면이 생각났다.

***

사벽의 대화 발췌

~ 면서 천둥과 번개가 소리와 빛으로 다툼질을 하더니 어느새 비는 폭우로 돌변하였다. 우리는 걸음을 더욱 빨리 했다. 비가 세차게 내릴수록 비례로 우리들의 걸음발도 빨라졌다.

함박산 정상을 넘어 우리들의 토굴이 있는 구릉을 따라내려 달릴 때 앞서 달리던 석우당이 비실비실하더니 잎이무성한 떡갈나무 밑에 기대어 섰다. 그러더니 곧 주저앉아두 손으로 머리와 이마를 감싸 쥐었다.

"석우당, 몸이 불편한가요?"

“아, 속이 메스껍고 머리가 빠개지는 것 같군요."

나는 그의 안색을 살펴보았다. 전신에 경련이 일고 있는그의 안색은 흑황색으로 변해 있는데, 그 위로 빗물이줄줄 흐르고 있었다.

나는 얼른 석우당의 채약다래끼와 나의 다래끼를 떡갈나무에 걸어 두고 석우당을 끼고 걸었다. 처음 얼마간은다소 비틀거리며 걸었으나 종내는 두 발이 질질 끌렸다.나는 웃옷을 벗어 석우당에게 뒤집어씌운 후 그를 업고 토굴을 향해 내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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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는 여전히 세차게 퍼부었다. 토굴에 당도하여 방 안에눕히니 그의 사지는 여전히 경련하고 평상시의 평화롭고조용했던 안색은 찾아볼 길 없었다.

나는 땅굴로 가서 나의 장삼을 꺼내와서석우당의 절은누더기를 벗기고 물기를 닦고 갈아입혔다. 부엌으로 나가부리나케 불을 지펴놓고 방으로 들어와 석우당의 사지를주물렀다. 사지를 주무르면서 그의 입술이 메말라 있음을읽어낸 나는 따뜻한 물을 가져왔다.

상반신을 일으켜 안고 입을 벌리고 숟갈로 물을 떠 넣었다. 물은 곧잘 넘어갔다. 한 홉가량의 물을 먹인 후 다시 눕혔다. 나는 석우당을 몇 번이고 불러봤으나 대답이없었다. 그는 정상적인 의식을 잃고 일종의 치매상태痴狀態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구들이 따뜻해지자 경련은 멎었지만 그 대신 사지가 축 늘어졌다. 그에게서 종말감終末感이 뼈저리게 느껴지면서 갑자기 공포와 불안이 한꺼번에몰려왔다.

사고무친四顧無親을 지나 사고무연顧無緣한 심산유곡에서반라의 사자를 앞에 한 나의 눈동자는 행여나 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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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매달려 있을까 하고 곱게 바른 사방 벽을 훑어보고 있었다. 익사 직전의 인간이 검불이라도 휘어잡으려 버둥거리는 것과 같았다. '심적토굴'은 석우당을 위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다만 아늑한 보금자리일 뿐이었다.

나는 석우당의 맥을 짚어 보았다. 맥이 힘없이 뛰고 있었다. 아직 종말은 아니었다. 나는 바랑 안에 마지막 남은 가사를 꺼내어 석우당을 덮어 주고 밖으로 나가 빗속을 뚫고 황지를 향해 달렸다.

이것저것 따져볼 겨를이 없었다. 타산을 떠나 공리空理를 외면한 채 무작정 내달렸다. 컴컴한 빗속에서도 컴컴한 어둠이 깃들기 시작했다. 나는 거의 광인처럼 외치면서 달렸다.

"석우당, 당신이 말했던 인간의 가능성은 한계성의 종말인 운명 직전까지 열려 있소. 조금만 더 기다려 주오. 조금만 더!"

나의 말끝은 거의 울고 있었다.

가사자를 두고 달리는 나는 공포스럽고 불안했기에 뭔가를 계속해서 외쳐야 했다. 어둠이 깔린 심산유곡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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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석우당이 누워 있는 토굴의 방안처럼 음산했기 때문이었다.

"석우당, 익사 직전의 인간이 검불을 휘어잡으려고 마지막까지 버둥거린대요. 결과는 차치해 두고 그 인간적인몸부림이 가상치 않아요? 그 동물적인 한계성에 대하여몸부림치는 인간적인 가능성이 말입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 주오. 조금만 더"

완전히 어두워지면서부터 다행히 비는 멎었다. 폭우 때문에 개울물이 갑자기 불어나 징검다리가 없어졌기에 개울을 건널 때마다 물에 풍덩 빠져 허우적거리며 건넜다.빗소리가 멎으니 산속은 다만 개울물 소리뿐이었다. 계곡의 양쪽 벼랑을 울리는 개울물 소리는 때로는 진혼곡鎭魂曲처럼 때로는 만가처럼 들려왔기에 나는 개울물 소리를의식하지 않으려고 “조금만 더, 조금만 더―”를 울부짖으면서 뛰어 내려갔다.

석우당에겐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는 비원이었고나 자신에게는 '조금만 더' 힘을 내어 달려가자는 애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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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짜기를 따라 내려갈수록 안개는 걷혀 갔으나 개울은폭을 넓혀 갔다. 칠흑 같은 어둠이 몇 번이고 나의 발부리를 돌에 걸리게 하면서 나를 엎어뜨렸다. 나는 다시 땅을짚고 일어서서 달렸다. 달리다가 숨이 차면 걸었고 걷다가숨이 돌려지면 다시 또 달렸다.

그렇게 토굴에서 20여 리를 달려 내려오니 심적에서내려뻗는 구릉이 다하는 곳에 희미한 불빛이 가물거렸다.언젠가 시장길에서 보았던 화전민의 찌그러져 가는 오막살이 봉창에서 희미하게 명멸하는 그 불빛은 가사상태에있는 석우당의 운명처럼 안타깝기만 했다.

화전민 집을 지나가며 나의 입은 다물어졌고 내 안은 조용해졌으나 나의 밝은 여전히 간단없이 분주했다. 두 손으로 허공을 끌어당기고 두 발로는 대지를 박차면서 산모롱이를 돌아 저 아래 널려 있는 황지를 향해 줄곧 나아갔다.

다른 산모롱이가 가까워지자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그 개 짖는 소리가 까맣게 잊어버린 소년시절의 어느 이름모를 친구의 속삭임처럼 은은하고 다정하게 들려왔다. 그처럼 나는 고독했기에 그처럼 어린 동심에 사로잡혀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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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다.

개울을 건너 산모롱이를 돌아거니 튀기 시카의 크고은 불빛들이 지난시절의 추억처럼 병렬했다. 개 갖는 소리가 우렁차고 탄차의 클랙슨 소리가 선명해지가 나의 1박질은 더욱 빨라졌다.

엷은 송판으로 이리저리 두들겨 맞춘 것집이 즐비한광산촌의 새까만 골목을 빠져나가 신작로에 이르러 시장쪽을 향해 달리면서 약국을 찾았다. 밤을 외면하고 석탄과흙이 곤죽이 된 신작로를 끊임없이 오고가는 탄차들이 함부로 퉁기는 진창을 맞받으면서 달리던 나는 전주시에 붙은 정방형의 약국 푯말을 찾아냈다.

약국 문을 밀치고 들어선 나는 경황 없이 캠플KAMIER주사약을 찾았다. 약제사인 듯한 40대의 주인이 도수 높은안경테를 바로 하면서 유심히 나를 쳐다보았다. 더부룩한머리와 수염, 희멀건 안색, 토굴생활의 이력을 말해 주는더덕더덕 기운 승복, 그 승복이 물에 젖고 진창에 얻어맞았으니 그 몰골이 어찌 약국 주인에게 호감을 주었으랴.

나는 숨을 돌린 후 나를 야릇하게 훑어보는 약국 주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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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나의 처지와 석우당의 위급을 알린 후 품속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주면서 캠플 주사약을 달라고 애원조로 말했으나 그는 한마디로 거절했다.

그러면서 그는 여기서 더 내려가면 절에 다니는 사람이약방을 경영하니 그곳으로 가보라고 했다.

약국 주인이 서 있는 뒤쪽 벽에 걸려 있는 조그마한 목제 십자가매달린 예수의 표정에서 곤혹(困惑을에읽은 나는 주인과 십자가를 번갈아 본 후 말없이 약국을나섰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구름이 줄달음질치면서 스무날 달과별들을 한껏 희롱하고 있었다.

더벅더벅 몇 집을 지나 내려가니 과연 약방이 있었다.나는 조용히 약방문을 밀치고 들어가서 캠플 주사약 2회분과 주사기와 탈지면과 알코올을 포장해 달라고 했다. 약방주인인 듯한 50대의 남자가 나를 잠깐 살펴보더니 말없이나의 요청품목을 포장하였다. 왼손에 움켜쥔 회중시계를펴보니 밤 열시 반이었다.

약국 주인이 포장한 꾸러미를 나에게 건네주자 나는 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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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묻지 않고 냉큼 오른손으로 받아듦과 동시에 왼손에 쥐었던 회중시계를 진열장 위에 놓고 "몹시 위급해서입니다. 용서하십시오!"라고 말하면서 약방 문을 부리나케 열고 내려뛰었던 신작로를 치뛰었다.

거절당했던 약국 앞쯤 뛰어갈 때, 저 아래쪽 약방 주인이 “스님, 스님. 이 시계 도로 가지고 가십시오, 스님!"이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으나 나는 뒤돌아보지 않고 뛰었다.

신작로를 작별하고 판자촌의 골목길에 접어든 나는 뜀질을 멈추고 걸어 나아갔다. 산모롱이를 돌아가면서 고개를 뒤로 주니 황지의 크고 작은 불빛들이 다시 보였다. 두약종상 얼굴이 크고 작게 부각되어 왔다. 인간의 불평등은 저 크고 작은 불빛들이 존재하는 한 영원할 것만 같은 서글픈 기분을 어찌할 수 없었다.

그 서글픈 기분이 회중시계로 돌려지자 아쉬움과 허전함이 내 안을 온통 차지했다. 비록 고물이어서 헐값의 것이라 해도 나의 생애에 어떤 흔적을 남긴 것이어서 값을 넘어 소중한 보물처럼 간직했던 시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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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최초로 지리산토굴생활로 접어들 때였다. 토굴에필요한 이런저런 집물과 식량을 꾸려 짊어지고서 은사스님에게 하직을 고하자 스님은 산문 밖까지 나를 배웅해주셨다. 그때 품속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주시면서 정중하면서도 간절한 부탁을 하셨다.

"토굴은 사중의 대중생활과 달라 아무런 제약이 없는곳일세. 그래서 투철한 신심과 발심이 없는 수좌는 타락하기가 십중팔구야. 하지만 무용의 용계에 입각하여 무제약의 제약을 자득할 수 있다면 기필코 견성할걸세. 토굴은 나태심의 온상이어서 해이심이 기적처럼 교묘하게 찾아오는 곳일세.

나태와 해이가 찾아올 때마다 이 시계를 들여다보면서이 시계의 초침이 돌아가듯 자네도 간단없이 정진하길 바라네. 시계는 일정한 시간을 두고 태엽을 감아야 하듯 자네도 일정한 시간을 두고 육체적인 조건을 충족시키도록하게.

시계를 들여다보는 그 순간까지 정진하게 될 때 자네는비로소 수가 된 것일세. 거기에는 무제약의 제약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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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기 때문일세. 시계의 태엽을 빠짐없이 감아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게. 그럼 어서 가보게."

은사스님의 정중한 당부가 이어진 그 시계는 나의 몸에서 4년간 고락을 같이했었다. 부적처럼 집착심이 강렬했던시계였다. 그런 시계가 나로부터 떠나 버렸으니 허전한 마음 금할 길 없었다.

불교의 경구는 가르치고 있다. 아집에서 벗어나지않는 한 윤회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그렇다면 나만이 그를 제도할 수 있다는 아집까지 버려야 할까? 그래서 수보리는 물었었다.

"여래는 여래이기를 원하지 않습니까? 원한다면 자상自相에 떨어지고, 원하지 않는다면 무엇으로 중생을건지 나이까?" 라고.

나의 안은 잡다한 상념에 포로가 되었으나 나의 밝은 계속해서 토굴을 향해 달려 나아갔다.

개울을 건너고 또 건너니 화전민 집 봉창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이 여전히 가물거리고 있음이 보였다. 순간 나는천사만려 千思萬慮가 잊혀지고 석우당의 운명도 저 불빛마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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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미하게 졸고 있으면서 오직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강박관념만이 나의 안을 차지했다. 나의 손에 들린 캠플, 나의품에 간직되었던 회중시계로 바꾼 그 캔플만이 오직 석우당을 구할 수 있다는 사실은 아집도 윤희도 이래도 중생모두 군더더기로 밀어붙이고 인간의 한계성에 도전한 인간의 가능성이야말로 끝까지 인간적이라고 알려줄 뿐이었다. 그러면서 여래는 여래임을 잊고 있을 때 비로소 여래임을 알려 주었다.

나는 다시 뛰었다. 품속에는 회중시계를 안았던 손이 캠플을 안고 뛰었다. 구름이 달을 삼키고 뱉을 때마다 토굴길에 명암이 점철되었지만 나의 껍질은 일정한 보조를 따라 계속되었다. 달빛이 주는 명암 같은 게 나의 안을교란시킬 순 없었다.

토굴에 도착하여 방문을 열고 들어서니 여전히 석우당의 신음소리가 들렸다. 나는 마치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듯한 착각을 하면서 기뻐했다. 부엌으로 나가 관솔에 불을붙여 방 안을 밝혀 놓은 후 석우당을 살펴보았다. 내가 떠날 때와 다름없는 표정이며 고르지 못한 숨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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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난날 학창시절에 취미로 배워둔 주사 솜씨로석우당에게 주사했다. 캠플을 맞은 석우당은 계속 신음하면서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나는 어제까지도 평화로웠던 석우당의 표정과 어김없는비동성이 생생히 기억되자 인생의 허무함이 뼈저리게 느껴졌다.

옛날 장자는 그의 처가 죽었을 때 단지를 두들기며 노래를 불렀다지만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나는 끝까지 남이슬퍼하면 같이 슬퍼해 주길 내 자신에게 바랄 뿐이었다.그래야만 남들이 기뻐할 때 나도 기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슬픔과 기쁨을 떠난 인간이란 이미 인간이 아니고 한갓 우상일 뿐이다. 다만 슬픔을 쫓고 기쁨을 불러들이는피나는 노력만이 요구될 뿐이다.

화창한 봄날이었다. 과수원 안에 자리 잡은 우리 집 정원이었다. 장미덩굴 양 옆에 선 아버지와 어머니는 전도剪刀를 들고 장미를 손질하고 있었다. 화사한 정원에 선 그들은 행복한 미소를 주고받으면서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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