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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사 신고 온 신발만 다 낡았구나!

소요유 : 2023. 1. 2. 12:37


'새로 사 신고 온 신발만 다 낡았구나!'

선방일기(지허), 사벽의 대화(지허), 산중일지(현칙)

이 셋은 스님들이 각기 자신이 겪은,
선 수행이나 만행을 하는 모습을 일지(日誌)식으로 기록한 책이다.

그 중 지허 스님이 계셨던 심적암(深寂庵)이란 곳엔 지금도 후학이 살고 있다.

https://youtu.be/4ksOWzg8NSw

동영상을 보면 그 내력을 엿볼 수 있다.

이제, 사벽의 대화에 나오는 한 장면을 여기 옮겨둔다.

홀로 토굴에 수행하던 석우당이란 분이 계셨는데,
지허 스님이 그곳을 찾아와 막 살림을 꾸리던 시점,
그들 간 나누던 대화 한 토막를 내가 빌려온 것이다.
(※
꿀밤 : 도토리를 강원, 경상, 충북 지역에서 이르는 말이다.
비동성(鼻動聲) : 지허 스님이 이르는 코골이를 뜻한다. 鼻鼾)

***

차를 시원스레 한 모금 마신 석우당이 입을 얻었다. 새벽에 부엌 아궁이 앞에서 입을 다문 이후 처음이었다.

"지허당, 윗방에 거처하셔도 좋고 이 방을 같이 써도 좋습니다. 스님 편할 대로 하시지요."

"글쎄요."

나는 얼른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어젯밤 그의 비동성이 생각나자 얼른 윗방으로 가고 싶었으나 윗방이 깨끗이 도배되어 있다는 것이 생각나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정淨과 예穢가 주는 차별감도 싫었지만, 혹시 주와 객 사이에 거리감이 생기지나 않을까 해서였다.

"지허당, 지나간 얘기 한 토막 하지요. 지난가을에 남방에서 올라온 어떤 수좌가 같이 지나자 하더군요. 무심코 그러자고 했어요. 이틀 동안은 나를 따라 같이 일하고 같이 먹었지요. 사흘째 되는 날 아침은 먹질 않더군요. 그러면서 꿀밤이 식성에 맞지 않으니 탁발을 해서 자기 양식은 따로 구하겠다고 하더군요. 난 또 그러라고 했지요.

나간 지 일주일 만에 돌아왔는데, 나갈 때는 비었던 바랑이 꽉 찼더군요. 쌀과 고춧가루와 간장이었어요. 나더러

--

꿀밤은 별식으로나 먹기로 하고 식생활을 쌀로 바꾸자고 했어요. 자기가 쌀은 계속 주선하겠다면서………. 나는 오히려 쌀밥이 잘 맞질 않는다고 거절했어요.

그날부터 우리는 취사를 각자 따로따로 했어요. 그런데 밥 냄새와 간장 냄새가 나의 창자를 확 뒤집더군요. 그래서 꿀밤과 쌀이 무척 싸웠지요. 그러나 끝내 꿀밤이 이겼어요. 사흘이 지나자 그는 또 나가더군요. 거처를 정결히해야겠다면서 말입니다. 여전히 빈 바랑을 걸머지고 나가서 일주일이 지나 들어오는데 역시 바랑이 가득하더군요.

밀가루, 신문지, 시멘트 포대와 주부식 등이었어요. 도배를 마쳐 놓고는 또 나갔어요. 이번에는 사흘 만에 돌아왔는데 도끼와 톱과 겨울 내의 등을 가져왔어요. 다음날부터 생목을 팍팍 찍더군요. 열흘 걸려 장작 두 평을 해놓고선 공부해야겠다면서 방에 들어앉았어요. 오로지 공부하려고 동분서주하며 애쓰는 양이 무척 고마웠어요. 그런데 들어앉은 지 나흘째 되던 날, 아침 먹은 뒤 바랑을지고 나서더군요.

이번에는 빈 바랑이 아니라 바람이 꽉 차고 그 위에 칡

--

으로 옷가지를 묶어 주렁주렁 매달았더군요. 그가 떠나가면서 이 산 속에 재미있는 말을 남겨 놓고 갔어요. 그는 가까이 토굴 주위를 훑어보고 멀리 산천을 둘러보고 난 후, 끝으로 자기 발밑을 내려다보더니, '새로 사 신고 온 신발만 다 낡았구나!' 라고 하더군요. 그 수좌가 토굴에 두고 간 것은 도끼와 톱 그리고 윗방에 도배 종이들이지요.”

"작심삼일이었군요."

내가 무심코 내뱉은 말이었다.

"글쎄요・・・・・…!"

아차! 나는 또 얻어맞았다. 석우당이 긴 여운을 두고 발한 "글쎄요!"에는 무수한 의미와 무한한 내용이 함축되어 있었다. 아찔함을 느낀 내가 화를 마저 달아 보면, ‘글쎄요! 작심삼일을 지껄인 당신은 이 생활을 얼마나 견디며 또 이 산을 떠날 때 무어라고 지껄이고 가겠소?' 라는 것이었다.

나는 침묵하면서 내심으로 통곡할 수밖에 없었다. 석우당은 차가 담겼던 발우를 구석으로 밀치면서 조용히 말했다.

--

“지허당, 밤이 깊었소."

윗방과 아랫방 중 거처를 택하라는 말이었다.

"석우당, 내가 이 방에서 거처해도 석우당의 마음에 거리낌이 없다면 천만다행이겠습니다만...….…."

"역시 지허당답구려! 자, 오늘은 이만 잡시다."

석우당이 아랫목에 자리 잡고 눕자 나는 윗목에 자리 잡고 누웠다. 곧 석우당의 어김없는 비동성이 또 다시 나를 괴롭혔다. 나는 몇 번 엎치락뒤치락하다가 누운 채 화두를 잡았다. 그러다가 잠이 들었다. 종일 눈 속에서 나무에 기어 오르내리면서 나무를 했기에 피로했던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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